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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67화 (16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67화

    38. 노력하는 사람⑴

    최지훈이 추천한 이탈리아 레스토 랑으로 향했다.

    흰 벽돌로 된 2층 건물이었고 우 리는 붉은색 화단과 파라솔이 마련 된 정원에 자리했다.

    니나는 여전히 활달하다.

    “니나, 어떻게 지냈어요?”

    “너무 좋아! 저번 연주회에서는 한 꼬마가 장미 한 송이를 주는 거 있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이후로 니나 케베히리는 다른 일보 다 연주회를 많이 가졌다.

    한 달에 열 차례 이상, 활동하는 지역도 유럽을 넘어서 북미까지 진 입했는데 내게는 그보다 더 부러운 삶도 없었다.

    피곤하긴 해도 음악가는 대중을 만나야만 의미가 있는 직업이니까.

    “누나 연주는 정말 멋지니까. 정말 보석 같아.”

    ‘……말은 언제 놓은 거야?’

    폴란드와 독일, 이탈리아에서 주로 활동해서 그런지 최지훈의 상태가 좀 맛이 간 것 같다.

    “아부가 늘었네? 나쁘지 않았어.”

    “아하하!”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은지 니나도 웃었다.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1호기, 이렇게 여유 부려 도 되는 거야?”

    “뭐가요?”

    “오디션 있지 않아? 사장님이 말씀 하시던데.”

    히무라가 말해준 듯하다.

    “네, 이제 곧이죠.”

    에이드로 목을 축인 뒤 말을 덧붙였다.

    “제가 안 되면 누가 되겠어요. 걱정 말아요.”

    “흐응.”

    내 말을 들은 니나 케베히리가 눈썹을 꿀렁거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난 콘서트마스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거 연주도 잘해야 지?”

    “그럼요. 가장 기본이죠. 독주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지도자 역할을 해 야 하니까. 오케스트라에 대한 전반 적이고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하고요.”

    내가 굳이 대학을 가면서까지 현대의 음악학과 음악사를 공부하려는 이유다.

    “그럼 찰스 브라움이 더 유력한 거 아니야?”

    니나가 다리를 꼬고는 에이드를 마셨다.

    “다른 건 모르지만 오케스트라 경 력은 찰스 브라움이 훨씬 길잖아. 악장으로서의 경험도 짧지만 있고.”

    “누나, 도빈이는.”

    “게다가 여유 부려도 될까 몰라. 네 피아노라면 몰라도 바이올린이 예전과 같다면 찰스 브라움에게 못 이길걸?”

    “글쎄요.”

    “그 사람 정말 멋진 바이올리니스 트가 되었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그가 러브콜을 했을 때 함께하는 것 도 나쁘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해.”

    “누나!”

    최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진정해. 앉아.”

    녀석을 진정시키려 말했지만 최지훈은 조금 흥분해 있었다.

    녀석에게 나는 절친한 친구이자 형 제 그리고 스승.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함에 화를 내는 건 이해한다만.

    니나 케베히리가 내 속을 뒤집으려 고 말을 꺼낼 리 없다.

    내가 그녀의 피아노에 현혹되었듯 그녀 역시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니까.

    내 음악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적어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굳이 이 자리에서 내가 이 길 거라는 말을 내뱉는 건 내 자존 심이 허락지 않는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일어날까요?”

    니나 케베히리와 헤어진 뒤 최지훈은 운전하는 내내 불편한 기색을 숨 기지 못했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씩씩대는데, 만 17세가 되자마자 면허를 딴 녀석이 라 조금 불안했다.

    똑똑한 녀석답게 독일의 운 어렵다는 운전면허 시험을 쉽게 통과했다 고는 하지만 말이다.

    “왜 네가 열을 내는 거야?”

    “니나는 내게 충고하려는 거야. 찰스 브라움이든 오디션이든 쉽게 생 각하지 않게.”

    “좋게 말할 수도 있었어.”

    그거야 그렇지.

    잠시 대화가 끊겨 창문 밖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조금 기쁘지만 니나랑 잘해보고 싶으면 어른스러워질 필요가 있어.”

    니나와 최지훈의 나이 차이를 생각 하면 그러지 않아도 막내 동생을 보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너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데 가만있는 건 어른스러운 대처가 아 니야. 방금은 니나 누나가 잘못한 거야.”

    “그런가. 나는 좀 다르게 받아들였는데.”

    “……어떤 점에서?”

    “누구도 내가 우승하지 못할 거다, 떨어질 거다고 말한 적 없었거든.”

    “그거야 당연하잖아.”

    “당연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 든. 그래서.”

    최지훈이니까.

    지난 4년을 내리 쉬면서 반복해 생각했던 말을 조금 털어놓았다.

    “그래서 조금 재미없다고 생각해.”

    보다 솔직해진다면 두렵다.

    현재 내가 음악적으로 동등하게 여 기는 사람은 전 세계에 단 세 사람 뿐이다.

    사카모토 료이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마리 얀스.

    한스 짐을 제외하고는 모두 70대 에 접어든 노장들이고 100세 시대 라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세 상을 떠날 것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그러면 나는 그런 세계에서 내 음악의 깊이를 바닥까지 이해할 수 있어 그것을 교류할 사람 없이.

    진정한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없이 살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두렵다.

    한스 짐이나 미카엘 블레하츠, 가우왕 등이 지금 상태에서 한두 단계 껍질을 벗는다면 모를까.

    니나 케베히리나 최지훈이 나이를 먹으면 아마 가능할까?

    채은이가 정말 음악에 매진한다면 아마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정이고 나는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현대 의 거장들이 늙어감에 고독함을 느 꼈다.

    빌어먹을 신고식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죽음을 떠올린 것도 그 탓이다.

    그래서.

    나와 동등한 음악적 세계를 공유할 또는 적어도 내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에 있어서 나와 동등한 사람 이 생기길 바라고 있다.

    동시에.

    감히 그 어떤 사람이 나를 넘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이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 아.”

    “왜? 뭐 두고 왔어?”

    “아니.”

    어제 이시하라 린이 인터뷰를 부탁 했는데 까먹고 말았다.

    * * *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 카밀라 앤더슨의 집무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잔뜩 쌓인 문서를 보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이력서가 꽤 많이 왔구만.”

    “300명이나 몰렸어. 모두 유명한 사람뿐이고.”

    “암. 우리 악장을 뽑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어디, 확인해 볼까.”

    “굳이 직접 확인해야겠어? 악장들 과 나눠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은 데.”

    카밀라 앤더슨이 걱정스레 말했다.

    원체 건장한 사람이라 10년 전과 다르지 않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 면 과중한 업무였다.

    “그럴 수야 있나. 걱정 말고 오늘 은 먼저 퇴근해. 오, 도빈 군의 이 력서로구만.”

    푸르트벵글러가 배도빈의 이력서를 집어 들어 살피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정보야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푸르트벵글러는 배도빈이 어 떤 자세로 임하는지부터 알고 싶었다.

    【자기소개】

    가슴 뛰고 싶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다면 다 시 한번 그럴 수 있겠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말없이 그 짧은 자기소개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10살의 나이에 전 세계를 제패하 여 명실상부한 음악계 최고의 스타가 된 배도빈에게도 고민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음 에도 만족하지 못한 천재는 보다 나아가고자 하려 한다.

    그 앞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는 빌 헬름 푸르트벵글러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푸르트벵글러가 한동안 가만히 이 력서를 볼 뿐이라 카밀라가 의아하 게 물었다.

    그에게서 배도빈의 이력서를 받아든 카밀라 역시 시대의 천재가 가진 고민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많이 외로운 모양이네, 도빈 군.”

    “흥. 성의가 없어. 성의가. 겨우 두 문장이라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괜히 투덜 거렸다.

    * * *

    “야,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미안해요. 정말 깜빡했어요.”

    “그 깜빡한 게 서운한 거라구우.”

    이력서를 쓰고 니나 케베히리를 만 나느라 이시하라 린과의 약속을 까 먹고 말았다.

    작년 연말 연주회 뒤로 연초 연주 회까지 일정이 꽤 빡빡했던 탓에 우 리 집 3층의 게스트룸을 빌려주고는 의도치 않게 이시하라 린을 방치했는데.

    이시하라도 내 눈치를 보느라 약속 한 날만을 기다린 모양이다.

    잔뜩 심통이 난 그녀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야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히무라 씨랑 일할 때도 엄청 바쁘긴 했지만 연락은 잘 되었는데 말이 지. 독립하고 나선 정말 만나는 것 조차 어려워졌네.”

    “히무라가 일을 잘해준 거죠.”

    그렇게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마 스터로서 목표가 있다면?”

    “아직 오디션도 안 봤어요.”

    “어차피 될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우선 베를린 필하모닉에 익숙해져 야겠죠. 저도 베를린 필도요.”

    “지금도 훌륭히 녹아들었다는 평이 많은데 좀 더 명확히 말해준다면?”

    “지금은 제가 일방적으로 맞추고 세프가 도와주고 있을 뿐이에요. 푸르트벵글러의 악단이죠. 그럴 수밖 에 없는 게 전 아직 베를린 필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연주자 한 명 한 명에 대해 파악 해야 베를린 필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악장으로서 있으면 그것부 터 알아갈 생각이에요. 또 그 과정 에서 베를린 필하모닉도 저에 대해 알아가겠죠.”

    푸르트벵글러란 물감을 내 색으로 덧칠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작 업이다.

    그와 베를린 필이 함께한 시간이 오래된 만큼 말이다.

    “음. 좋네. 착실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야.”

    살짝 웃은 이시하라 린이 벌써 꽤 많이 들었던 질문을 했다.

    “다음은 찰스 브라움에 대해서. 경 력으로나 실력으로나 너만큼이나 대 단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인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잘 몰라요.”

    “ 엑.”

    “사실이니까요. 그의 연주회를 따 로 찾은 적도 없었고 접점도 없었어요. 모르는 게 당연하죠.”

    “왜 예전에 그런 도발도 있었잖아. 너한테 파이어버드의 진가를 못 알 아본다고 했던 거.”

    “유치한 사람 같기는 하네요.”

    “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해. 그런 면만 없으면 참 멋진 사람인데 왜 너에게만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란 말이야. 예전에 가우왕도 그 랬고. 혹시 다들 널 목표로 한다거 나 하는 거 아닐까?”

    “그런 건 모르지만 목표를 가진다는 건 그 사람에겐 좋은 일이겠죠.”

    말을 마쳤는데 이시하라가 나를 멀 뚱히 보고만 있다.

    “왜요?”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너 너무 빨리 늙은 거 같아.”

    나이라면 본래 많지만.

    사실 죽기 전의 나와 비교하면 정 말 달라진 게 많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 웠고 여유가 생기다 보니 이것저것 고려할 수 있기도 하며.

    현대의 지식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느낀 바가 크다.

    이시하라 린의 표현이 정확하진 않지만 나도 인지는 하고 있다.

    배도빈으로서의 삶에 익숙해질수록 조금씩 나도 변화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 마지막 질문. 공백기에 만들었다던 피아노 협주곡은 언제 발표 할 예정이야?”

    “콘서트마스터로서 처음 무대를 가질 때요.”

    “멋진 계획이네.”

    이시하라 린이 메모장을 덮었다.

    이로써 인터뷰는 종료라는 그녀의 신호다.

    “참, 네게는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겠지만, 타마키 히로시라고 기억해?”

    이시하라 린이 남은 커피를 마시곤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그 왜 크리크 때.”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 인상을 쓰 니 이시하라 린이 한숨을 푹 내쉬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기적이고 멍청한 집단에 의해 망 가진 꼬맹이. 건방졌던 녀석이 떠올랐다.

    “네. 그 사람이 왜요?”

    “그 뒤로 꽤 열심히 했는데 아무래 도 일본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평 이 좋지 않았어. 어쩔 수 없잖아. 그런 일에 연류되었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해서 이젠 더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나 봐. 한때는 일본 최고의 유 망주였는데.”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이 유망한 인재를 망쳤고 결국 몰락하고 만 모양 이다.

    비록 건방진 놈이긴 했지만 일본 대 표로 크리크 콩쿠르에 출전했더라면 의지와 재능은 갖추고 있었을 텐데.

    애석한 일이다.

    “작년 일인데 한동안 언론과 접하 지 않았거든. 듣기로는 팔을 다친 거랑 예전의 욕까지 해서 폐쇄적이 되었대. ……그런 걔가 얼마 전에 자기 SNS에 글을 올렸거든.”

    이시하라 린이 핸드폰을 만지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타마키 히로시란 녀석이 올린 글인 것 같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앉아 있는 배도빈을 다시 볼 수 있다니, 래.”

    “그 아이한테도 넌 희망이자 목표였나 봐.”

    찰스 브라움과 타마키 히로시.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팬들.

    문득.

    홍승일이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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