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65화 (16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65화

    37. 귀찮은 불새(1)

    ‘역시 베를린 필이다.’

    연말 연주회의 두 번째 곡 합창이 끝나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 연말을 풍성히 보낼 수 있게 해준 베를린 필하모닉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푸르트벵글러의 깊은 사색으로 표현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메인 레퍼토리, 베토벤 교향곡 9번은 그들이 왜 세 계 최고라 불리는지 증명하는 듯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배도빈이 돌아오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점.

    배도빈이 훌륭히 베를린 필에 녹아 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나 내심 악마 와 같은 마성을 듣고 싶었던 사람도 적잖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퇴장했던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무대 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앙코르를 기대하며 다시 자리 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연주자와 함께 자리를 잡은 뒤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한번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함께한 사람과 시선을 나눈 관중들 은 크게 기뻤다.

    바이올린 주자들 사이, 푸르트벵글러 옆에 배도빈이 서 있었기 때문.

    오늘 연주회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던 배도빈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 그들은 점잖게 그들의 연주를 기다렸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 곡 4번 도단조.

    지금은 ‘겨울’이란 이름으로 알려 진 명곡이 불안감을 조성하기 시작 했다.

    1악장 너무 빠르지 않게 (Allegro n on molto).

    배도빈과 함께 현악 주자들이 활을 짧게 움직이며 곧 들이닥칠 격정을 예고했다.

    배도빈은 왼손을 튕기듯 움직이며 바이올린 연주의 집중했다.

    연주를 하는 악기가 점차 늘어날수록 음량과 무게가 늘어나고.

    일순간 모든 악기가 연주를 멈추었다.

    배도빈의 짧은 독주.

    캐논은 배도빈의 뜻을 그 어떤 악기보다 효과적으로 소리 내어 노래 하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금씩 변주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배도빈의 바이올린에 사람들 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격정적인 합주.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연주함에도 배도빈의 바이올린은 그 소리의 명 확성과 깊이감을 완벽히 표현했다.

    그 집요함.

    한겨울의 서린 바람이 지나간 듯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관객들은 모두 일어서 박수를 보냈다.

    연말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풍부한 음악적 세계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 연말 연주회, 마 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진가 발휘]

    【베를린 필의 베토벤 현악 4중주에 대하여]

    【4년 만에 앙코르를 했던 2021 베를린 필하모닉 연말 연주회 이모저모]

    이러한 기사들이 올라옴에.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다른 쪽으로 향해 있었다.

    바로 앙코르 무대에서 배도빈, 베를린 필의 ‘겨울’.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직 관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SNS를 통해 배도빈의 겨울에 대해 언급 하기 시작했다.

    그 힘찬 연주에 매료되어 회자되었는데 한 사람이 배도빈의 바이올린 이 옛 악장 니아 발그레이가 사용하 던 ‘캐논’임을 발견하면서.

    언론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ㄴ 연말 연주회에서 배도빈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완벽히 베를린 필에 녹아 있었고 앙코르 무대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빛났다.

    ㄴ 배도빈이 연주한 바이올린이 캐 논이라던데?

    ㄴ 악기를 알아보는 눈은 없지만 그 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베를린 필이 배도빈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후 임자로 인정한 거라 봅니다.

    ㄴ 억측임.

    ㄴ 니아 발그레이가 배도빈에게 선물해 준 건가?

    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니아 발 그레이의 캐논은 단순한 명품이 아 닙니다. 베를린 필의 보물이었고 그 걸 니아 발그레이는 그것의 전통 후 계자였습니다. 아마 세대교체를 의 미하는 것 같네요.

    ㄴ 난 저게 베를린 필에 있었는지도 몰랐네.

    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캐논은 다른 바이올린과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국빈급 경호를 받는 악기는 캐논이 유일할 겁니다.

    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왜 니아 발그레이가 가지고 있었지?

    ㄴ 2차 대전 전후 제노바에서 카라 얀과 베를린 필에 기증했었음.

    ㄴ 니아 발그레이가 베를린 필에서 만 20년 있어서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입단 전에는 야샤 하이페츠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의 고향도 제노바였고 연주 또한 대단 했으니까요. 어쩌면 파가니니의 캐 논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죠.

    ㄴ 캐논이 소리가 너무 좋아서 오케스트라에 있기에는 아깝기도 하고 튀기도 합니다. 니아 발그레이 정도 되는 연주자가 아니었으면 조절 못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ㄴ 결국 그러니까 베를린 필의 보물을 배도빈이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네요.

    ㄴ 베를린 필과 푸르트벵글러, 배도빈도 말을 아끼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사실상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이라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베를린 필하모닉을 찾았던 그들이 이제 40대, 50 대가 되어 그들의 자식과 함께하게 되었다.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집권이 무려 20년이 넘었기에 언젠 가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거라 모 두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후보자는 여럿 있었다.

    대니얼 바렌보임, 손레리 게르기예 프 등 재기 넘치는 인물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실제로 베를린 필하모닉 또는 푸르트벵글러와 사적 친분을 나누기도 하였는데.

    10년 전 베를린 필하모닉을 찾은 천사이자 악마를 접한 뒤로는 여론 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수많은 클래식 음악 팬들이 배도빈이 여섯 살 때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던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로부터를 잊지 못했다.

    21세기 최고의 교향곡 연주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배도빈의 곡 해 석 능력과 음 조율 능력은 탁월했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성장해 미래를 이끌어가길 바라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도리어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하나 의 바람이 되었는데.

    배도빈의 찬란한 재능은 그를 가만 히 두지 않았고 베를린 필하모닉 팬 들은 그저 아쉬움을 가질 뿐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나타난 배도빈이 푸르트벵글러로부터 음악 감독으로 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보물이자 베를린이 가장 사랑했던 콘서트마스터 니아 발그레이의 ‘캐논’을 물려받으니.

    다시금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한편.

    다른 의미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남자가 있었다.

    영국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현재는 가우왕, 이승희와 함께 30대 클래식 음악가 중 최고의 연주자로 손꼽히는 찰스 브라움이었다.

    그는 배도빈의 기사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거 재밌는데. 파이어버드는 성에 안 차고 캐논은 받았다고?”

    과거 몇 번이나 배도빈과 자웅을 겨루고 싶어 했던 찰스 브라움은 다 시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배도빈의 바이올린을 따라잡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노력하였는지 모른다.

    배도빈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배도빈에게서 관심조차 받지 못했고 이제는 그의 연인 파이어버드마저 무시당한 것 같았다.

    명장 스트라디바디가 최고 전성기에 만든 파이어버드는 누가 뭐라 해 도 최고의 바이올린임이 틀림없지만.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사용했고 현재는 베를린 필의 보물, 아니, 인류의 보물로 칭해지는 캐논 에 비해서는 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유치한 치기. 향상심. 자격지심.

    그리고 찰스 브라움 본인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인 정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찰스 브라움은 그의 연인과 함께 노래했다.

    “ 벌써요?”

    연말 연주회를 마치고 다음 날.

    카밀라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오디션이 한 달 뒤에 열린다고 알려 주었다.

    “벌써라니? 발그레이 씨가 은퇴하 고 지금껏 기다린 거야. 그 때문에 일정 짜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니?”

    오디션을 해봤자 내가 될 게 뻔하 니까 나로서는 돌아온 지 두 달 만 에 악장이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벌써라고 느꼈는데.

    생각해 보니 확실히 베를린 필하모닉으로서는 정말 오랜 기다림이었다.

    어쩌면 말하지는 않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정말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하는데요?”

    “기본적으로 공개로 진행해. 판정 은 빌헬름이 할 거지만 어디까지나 투명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카밀라가 사이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처음이다.

    카밀라는 인지하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데,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꽤 남에 도 좋은 감정 교류를 나누는 모양이다.

    “그럼 저도 참가할게요.”

    “신청서 양식에 맞춰 작성한 다음 에 메일로 보내.”

    “어차피 제가 될 텐데.”

    컴퓨터는 익숙해졌지만 신청서를 쓰라고 하니 귀찮아져 불평했더니 카밀라가 웃는다.

    “글쎄? 쉽지 않을걸?”

    나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카밀라 가 저런 말을 하니 뭔가 있나 싶다.

    “찰스 브라움이 신청했거든. 대단 한 바이올리니스트고 또 경력도 풍 부하지. 오케스트라 경험도 있고.”

    “그게 누구예요?”

    “어…… 정말 몰라?”

    카밀라가 되물어서 다시 한번 곰곰 이 생각해 보는데 언젠가 시덥지 않은 시비를 걸었던 놈이 있었던 것 같다.

    “파이어버드 주인이잖아.”

    “아, 불새.”

    예전에 사지 않았던 불새를 사곤 시비를 걸었던 놈이다.

    니나 케베히리에게 반주를 시켜 내게 그녀라는 보물을 찾게 해주기도 했고.

    “그런 쭉정이한테 밀릴 제가 아니죠.”

    “글쎄. 어쨌든 힘내렴.”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카밀 라도 나도 집을 챙겨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네. 그럼 세프랑 데이트 즐겁게 하세요.”

    “어? 어?”

    방을 나서는 배도빈을 멍하니 보던 카밀라가 외쳤다.

    “도빈아! 어떻게 안 거야? 노이어야? 노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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