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64화 (164/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164화

36. 악마가 돌아왔다(5)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의…….]

닥쳐.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튀어나 온 ‘이상한 놈’을 잠재우곤 니아 발그레이가 내게 넘겨준 캐논을 보았다.

니콜로 파가니니.

동시대의 인물이 남긴 바이올린을 지금의 내가 얻게 되다니 기분이 묘하다.

당시 파가니니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나와는 크게 접점이 없었는데.

그 명성만큼은 익히 들은 바 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말년에 그가 빈으로 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은 적은 없다.

그렇게 유명하다기에 그가 작곡했다는 곡의 악보를 구해다 본 적이 있긴 한데.

솔직히 그의 곡들은 썩 마음에 드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래서 나도 관심을 끊었는데.

19세기 당시 그의 인기는 열풍이었고 지금까지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대단한 연주자였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니아 발그레이가 내게 준 이 바이올린인데.

이탈리아의 또 다른 명장.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과르네리가 만든 캐논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의 물건이었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야?’

단언하건대 수백억 원을 들여도 이 런 바이올린은 구할 수 없다.

예전의 파이어버드와 마찬가지로 운 좋게 경매에 나오면 모를까.

구하고 싶어도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물건이었기에 니아 발그레이에 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어디.”

무엇을 연주해 볼까 생각하다 적당히 켜보는데 연주를 이을 수 없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자극했다.

니아 발그레이가 연주하는 것은 여러 번 들었지만, 그가 이 악기를 얼마나 억제하며 연주했는지 알 수 있었다.

파이어버드를 연주했을 때는 악기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과르네리 델 제수 캐논은 내가 내고자 하는 소리를 강렬하게 뻗어내는 지지자 같았다.

둘도 없는 파트너를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내가 내고 싶은 소리를 그 어떤 바이올린보다 청명하고 활기차게 뻗 어낸다.

즐겁다.

캐논과 함께하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2월 28일.

눈이 내리는 베를린은 가족과 연인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찾은 사람들은 부푼 가슴을 진정하며 연주회장으로 들어섰다.

2021 베를린 필하모닉 연말 연주 회를 듣기 위함이다.

“와. 미치겠네. 이래서는 배도빈 머 리카락도 못 찍겠는데?”

“키가 작으니까요.”

“멍청아, 헛소리하지 말고 어떻게든 길 좀 만들어 봐. 인터뷰는 고사 하고 사진 한 장은 건져야 할 거 아니야.”

전 세계 61개 나라에서 중계를 하 기 위해 찾아든 언론인들은 카라얀 거리가 마비될 정도로 모인 인파에 질려 버렸다.

“왁. 아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아니면 누가 도빈이 인터 뷰를 하는데?”

“이시하라 씨, 포기하죠. 이거 사람 이 너무 많아서 못 갈 것 같아요. 게다가 도빈 군 어차피 대기실에서 단원들이랑 함께 있을 텐데 인터뷰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럼 여기까지 왜 왔는데!”

“……미리미리 좀 오지.”

“뭐?”

“아, 아니에요.”

“헉. 쟤 최지훈이잖아. 빨리. 빨리!”

어떻게든 인파를 뚫고 나가려던 이 시하라 린의 시야에 최지훈이 들어 왔고 그녀는 곧장 방향을 바꾸었다.

제18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에서 우승한 최지훈은 이미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어엿한 피아니스트였다.

큰 키와 잘생긴 외모 가슴이 따뜻 해지는 연주로 일본 내에서도 작지만 인지도가 있었기에 이시하라 린 은 그에게 인터뷰를 시도하고자 했다.

“지훈 군, 지훈 군 잠깐!”

이시하라 린의 어색한 한국어 발음을 들은 최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 감탄했다.

“이시하라 기자님이시죠? 아사히 신문의.”

“기억하는구나? 하아. 하아. 다행 이다.”

“도빈이 보러 오신 거예요?”

숨을 돌린 이시하라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뭐 보다시피 이러니까. 만 나도 내일 해야 할 것 같아.”

“고생이시네요. 그럼 만나서 반가 웠어요. 다음에 봬요.”

“잠깐!”

최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고 이시하라 린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10분만. 인터뷰 좀 해주라.”

“저를요?”

의아하게 생각한 최지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멀리 두 남 자를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집사님! 먼저 들어가세 요! 곧 따라갈게요!”

이시하라 린이 멀리 고개를 끄덕이는 두 남자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 한 뒤 최지훈에게 물었다.

“얼마 전 런던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소감은?”

“즐거웠어요. 런던 팬들은 음악을 즐기시는 것 같아요. 표정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신을 냈거든요.”

“나도 행복하단 평을 본 기억이 나. 일본에도 그 좋은 연주를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혹시 계획은 없니?”

“네. 아직은 없네요. 하하.”

이시하라 린이 아쉽다는 듯 울상을 지었지만 이내 다음 질문을 꺼냈다.

“일정이 바쁠 텐데 오늘 베를린 필하모닉을 찾은 이유는?”

그 질문에 최지훈이 웃으며 답했다.

“도빈이 때문이죠. 뭔가 싶었는데 이걸 물어보고 싶으셨던 거네요.”

“하하, 미안.”

“폴란드로 유학을 간 뒤엔 도빈이 랑 자주 못 만났어요. 서로 바빠지니 앞으로는 더 그렇게 될 것 같은 데 연주회라도 시간 내서 들으려 해요.”

“정말 사이좋은 친구네.”

“오늘은 팬으로서 온 거예요.”

공연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기에 이 시하라 린도 더 이상 최지훈을 잡아 둘 수 없었다.

“이시하라 씨, 도빈 군은......

“걱정 마. 내일 어떻게든 도빈이 인터뷰는 딸 거니까. 그리고 너. 나랑 같이 다녔으면 이제 안목 좀 기를 때도 되지 않았어?”

“뭐가요?”

“최지훈 말이야. 두고 봐. 쟤도 분 명 엄청난 일을 저지를 거니까. 내가 관심 가졌던 사람은 전부 성공했다고.”

“저, 최에 대해서는 얘기한 적 없는데요.”

연말은 휴식과 희망을 느끼고 싶은 시기다.

1년간 충분히 걸어온 이들이 가족과 함께 또는 스스로 안락을 느낄 수 있도록 베를린 필하모닉은 오늘 두 곡을 준비했다.

단원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마누엘 노이어가 내는 음을 기준으로 각자의 악기를 조율하였고 곧 폭 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장 케르바 슈타인이 일어났고 그 의 손짓으로 모든 단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푸르트벵글러를 맞이했다.

악장과 악수를 나눈 지휘자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독특한 콘서트홀의 관중석을 돌아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게 충분히.

그런 뒤에는 오케스트라를 둘러본다.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와 강한 유대감을 나눈다.

완벽을 기했던 연습과 그럼으로써 얻은 자부심.

나와 너는 최고다.

함께 최고의 연주를 하자.

다짐하듯, 최면을 거는 듯, 약속하 듯 시선을 나눈 베를린 필하모닉이 첫 번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오케스트라

가 연주하도록 수정해 확대 편성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악 4중주.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C샵 단 조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

1악장 천천히. 너무 느리진 않고 충분히 감정을 살려서 (Adagio ma non troppo e molto espressivo).

푸르트벵글러의 손이 제 1 바이올린을 향한 채 움직였고 케르바 슈타인과 제1바이올린은 곧 그 손짓을 따 라 서글픈 멜로디를 자아냈다.

이어서 단계적으로 차오르는 현악.

중분히 감정을 살려 연주하라는 베토벤의 말처럼 점차 고조되는 분위 기 속에서.

콘트라베이스마저 장중히 찾아들자 관객들은 이내 심연으로 빨려 들어 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었다.

빠른 박자가 아님에도 어찌 이토록 격정적일 수 있는가.

마지막.

콘트라베이스와 제1바이올린이 B 井-D 의 스포르찬도(sf) 화음은 가슴이 시리도록 슬픔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차분히 가라앉는데.

이내 힘찬 멜로디가 시작된다.

2악장 빠르고 매우 힘차게 (Allegro molto vivace).

작곡가 베토벤의 의도대로 악장 사 이에 간격을 두지 않고 곧장 2악장이 이어졌다.

반음계의 상승과 함께 1악장에서의 슬픔은 어느새 흩어져간다.

힘찬 연주 속에서 나타나는 비올라.

악기를 이동하면서 연주되는 주 화음은 점차 생기를 얻는다.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멜로디를 주고받으며 점차 곡은 다시금 위기 감을 고조하는데.

그 와증에 비상하는 음표들.

음률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잔뜩 헤집어진다.

정식 단원으로서는 첫 무대.

현재 3명의 악장 중 한 명인 케르 바 슈타인이 단원들을 어떻게 통솔 하는지 눈에 담았다.

그는 정중하고 단호했으며 지휘자 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야 당연히 푸르트벵글러니까.

이 곡을 그보다 멋지게 지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감정적인 표현이 중요한 현악 4중주 C샵 단조의 경우에는 구조적인 해석을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지식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놓치고 마는데 푸르트벵글러만은 이 곡이 가진 감정선을 너무도 잘 표현하였다.

제2바이올린에 위치해 그의 지휘에 집중하며 연주하는 나는 영혼이 충족되는 것만 같았다.

제2바이올린이 내는 소리가 이 연주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피부로 느끼는데 정말 색다른 감각이었다.

함께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이런 느 낌인가 하고.

어렸을 적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추 억이 떠오르며 역시 잘 돌아왔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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