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51화 (15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51화

    32. 세계를 거머쥔 손(1)

    【배도빈 또다시 최고점 기록! 쇼팽 콩쿠르 우승 사실상 확정?]

    【디미트리 알렉스, “배도빈의 연주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세련되었다. 기품 있고 매력적이다.”]

    【최지훈 2차 본선 진출! 예상을 또 한 번 뒤집다!]

    【미카엘 블레하츠. “최지훈은 그 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필립 엔트. “니나 케베히리는 피아노를 사랑한다. 그녀의 연주는 너무 나 달콤해 자꾸만 찾게 된다.”】

    “도빈아, 도빈아. 이거 봐봐.”

    “도빈! 지훈! 이거 좋은 말일까?”

    본선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쇼팽 콩쿠르에 관한 기사를 전 세계에서 시시각각 올라오는 중이었다.

    내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위험할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최지훈과 신 이 난 니나 케베히리가 자기들과 나에 대한 기사를 보여주었는데.

    몹시 언짢다.

    니나 케베히리의 점수가 내 생각보 다 훨씬 낮았기 때문.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지만 아마 필립 엔트란 남자의 비유가 적 절할 듯.

    너무나 달콤하다.

    그 맛에 중독되어 찾을 수밖에 없지만 과하면 좋지 않다는 뜻.

    심사위원들이 니나 케베히리의 연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좋은 말일 거예요! 누나의 피아노 정말 너무 좋으니까요!”

    “그치?”

    같은 생각이다.

    음악이 더욱 아름답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다.

    몸에 좋지 않은 음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적어도 내가 아는 블레하츠나 가우왕이라면 결코 이런 말을 뱉을 리 없다.

    요즘 애들이 더 꽉 막혀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

    “그나저나 너 다음 라운드 준비는 어떻게 됐어?”

    2차 본선의 경우에는 조건이 있었는데 연주 시간이 30분에서 40분 사이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

    쇼팽 협회에서 선정한 발라드, 스 케르초, 판타지 중에서 한 곡.

    마찬가지로 선정된 일부 왈츠 중에 한 곡.

    마지막으로 네 4곡의 폴로네즈에서 한 곡을 연주하고 만일 연주 시간이 채워지지 않을 경우 쇼팽의 곡 중 하나를 더 연주해야 하는데.

    1차 본선만을 목표로 연습한 최지훈이 당장 내일 어떻게 연주를 할지 걱정되었다.

    “히히 힛

    웃는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다행이다.

    “망했어.”

    이 자식이.

    “하지만 1차 본선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야. 통과한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그래서 어쩔 건데.”

    “사단조 발라드랑 내림가장조는 연 습했으니까 최선을 다해야지.”

    틀렸다.

    본인마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1 차 본선을 통과하자 정말 나이와 경험 그리고 시간의 벽에 막힌 것.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만족하니 할 말이 없다만.

    ‘내가 콩쿠르에 나설 이유가 되어 준다던 약속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최지훈을 노려보는데 녀석이 계속 행복하게 웃고 있어서 김이 새버렸다.

    “왜?”

    “됐어.”

    “혹시 서운해? 나 떨어져도 열심히 응원할게!”

    “필요 없어.”

    다음 날.

    2차 본선이 시작되었고 더욱 많은 관중이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을 찾았다.

    대기실에 있는데 이시하라 린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야호!”

    “반가워요.”

    “정말 너무 유명해졌잖아. 인터뷰 한 번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거니?”

    “그래서 이렇게 대기실로 초대했잖아요.”

    “후후. 이럴 땐 의리 있다니까?”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시하라 린이 메모장과 녹음기를 세팅하고 질 문을 시작했다.

    “이틀 동안 했던 도쿄 리사이틀 모두 매진했어. 그때의 소감부터 말해 줄래?”

    “즐거웠어요. 앙코르 때 녹음된 음악을 반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팬들이 반가워하는 게 느껴졌거든요.”

    “일본 팬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은 의미가 깊으니까. 나도 잘 들었어.”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다.

    “하나 더. 도쿄 비올라 콩쿠르에서 나카무라 료코가 우승을 했어. 아는 사이지?”

    “네. 나카무라 병문안을 갔을 때 만난 적 있어요.”

    “너랑 같은 아홉 살인데 비올라를 배운 지 3년밖에 안 되었다나 봐.”

    나카무라와는 인연이 깊지만.

    이시하라 린이 그의 딸 료코를 언급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두 번 만났지만 이렇다 할 관계는 없으니까.

    “왜 이야기를 꺼냈냐는 얼굴인데?”

    귀신이다.

    “그 아이가 시상식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꺼냈거든. 자, 이거 기사.”

    이시하라 린이 내게 신문을 보여주었다.

    “글은 못 읽어요.”

    “……대단하네.”

    이시하라 린이 신문을 가져가 대신 읽어주었다.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신세계로부터를 지휘한 걸 들었어요. 언젠가 저도 그가 지휘하는 악단에 함께하고 싶어요. 라는데?”

    이시하라가 씩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어때? 관심 있어?”

    “실력 있는 음악가라면 그렇죠. 나 중에 연주하는 걸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료코가 어떤 연주를 할지 모르겠지 만 직접 들어봐야 할 일이다.

    특히나 비올라의 경우에는 잘 연주 하기 힘든 악기 중 하나니까.

    “여기저기 유망주를 찾고 있는 걸로 아는데. 오스트리아의 마르코나 오늘 출전하는 니나 케베히리나.”

    ……히무라가 말해준 모양이다.

    “다음 행선지는 베를린 필하모닉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굳이 감출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16살이 되면 곧장 베를린으로 갈 예정이예요.”

    “정말? 그럼 개인 리사이틀은? 콩쿠르는?”

    “연주회는 가끔 하겠지만 콩쿠르는 원래 별 관심 없었어요.”

    “왜? 그렇게 잘하잖아.”

    “그러니까 문제예요.”

    “응?”

    “저도 다른 사람들도 제가 우승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 천재의 고뇌라는 거구나?”

    고뇌라고 할 것 없다.

    당연한 일이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이것저것 즐기고 있다만 다른 콩쿠르에 손을 뻗칠 이유는 없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외의 악기를 익혀 출전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마저도 내게는 시간 낭비라 느껴진다.

    “천재 배도빈, 우승 확신하다. 라는 제목도 괜찮겠네.”

    “그보다.”

    필기 중인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응?”

    “니나 케베히리에 대해 집중해 주 세요. 만에 하나 제가 우승하지 못 한다면 우승자는 그녀일 테니까.”

    “..어?”

    “농담이 아니에요. 1차 본선을 본 사람은 이미 느끼고 있을 거예요. 니나의 피아노가 얼마나 멋진지.”

    “나도 잘 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나?”

    클래식 음악 전문 기자이자.

    이 분야에 대해서는 나름 전문가라 인정받고 있는 이시하라 린마저 이런 상황인 것이 안타까웠다.

    스스로 음악은 쉬워야 한다고 생각 하지만, 이것은 별개의 영역.

    전문가들의 발언이 쌓이지 않으면 작곡가든 연주자든 ‘대단하다’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는다.

    나처럼 음악 자체만으로도 인정받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니나의 경우는 내 생각보다 그런 게 덜한 편이 라 애석하다.

    “콩쿠르가 끝나면 블레하츠나 가우왕하고도 인터뷰해 보세요. 그녀에 대해 물어보면 분명 좋은 말을 할 거예요.”

    “그래. 나도 오늘은 집중하고 들어 봐야겠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대기실 모니터로 니나 케베히리가 입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걸음은 당당했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조금의 부담도 느끼지 않는지 아니 면 도리어 저 무대를 즐기는 건지.

    ‘들려줘.’

    이 세계의 그 찬란한 빛을 보여주길 바랐다.

    * * *

    후우.

    역시나 조금 긴장된다.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독주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들떴는데 아무래도 잘하는 사람이 많아 조금은 걱정이다.

    내 연주가 별로면 어쩌지?

    나만 즐거우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 게 손이 떨린다.

    ‘빚 갚아야 하는데.’

    피아노만 칠 줄 알고 당장 내일 먹을 것조차 걱정해야 했던 내게 손을 뻗어준 도빈.

    그 착한 아이에게 실망을 안겨주면 안 될 텐데.

    아, 위험하다.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계 속해서 꼬리를 문다.

    ‘네 연주는 참 즐거워. 심사위원들 은 안 좋아할지 몰라도 분명 관객들은 좋아할 거야.’

    새로 만난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자.

    도요토미라는 변태 새끼에게 질려 버려 턱을 날려주고 나왔던 음대.

    도빈이 덕분에 다시금 용기를 내 찾을 수 있었던 그곳에서는, 아니, 적어도 살리에니 교수님만큼은 내 피아노를 인정해 주셨다.

    찰스 브라움도.

    무엇보다 그렇게 멋진 음악을 하는 배도빈이 나를 응원하니까.

    조금씩 나도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작은 일로 위축될 때가 아니다.

    나를 인정해 준 사람들을 믿고 내 피아노를 들려줄 시간이다.

    폴로네즈 환상곡 A내림장조 0P. 61.

    환상.

    폴로네즈라고는 하지만 그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던 쇼팽의 말년 작품.

    그의 다른 곡처럼 대담하고 즐거운 전개는 없지만, 곡 이곳저곳에 갑작 스러운 변화로 그의 고뇌가 잘 드러 나 있다.

    연인과의 이별과 건강상의 문제로 피폐했던 말년의 쇼팽이 남긴.

    저돌적인 표현.

    가장 쇼팽다우면서도 가장 쇼팽답 지 않은 곡이라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건반에 무게를 실어 연주할수록 그 감정이 더욱 잘 전달된다.

    ‘시작이야.’

    곡의 후반에 이르러.

    조금씩 속도를 더해 그의 고뇌가 가득 차 마침내 표출되기 시작하는 데 이르고.

    마침내 억눌렀던 내 가슴도 풀어헤 쳤다.

    명확하게. 명확하게.

    빠르게.

    타건은 무겁게. 음은 날아가듯이.

    단 한 순간 표출했던 모든 감정을 다시금 추슬러 여리게. 여리게.

    티딩-

    마지막 음을 연주하자.

    지금까지 걱정했던 모든 것을 떨쳐내고 다음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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