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49화 (14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149화

31.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8)

심사위원석에 앉아 배도빈의 연주를 들은 가우왕은 엄지를 꽉 깨물었다.

‘미친놈.’

평소의 배도빈이 아니었다.

자신의 곡을 연주할 때의 그 난폭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네가 쇼팽과 나눈 대화란 말이냐.’

일전에 배도빈과의 경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가우왕은 배도빈이 준비한 쇼팽을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쇼팽 콩쿠르에 나선 배도빈은 세상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쇼팽을 잘 표현했다.

‘이별의 곡’이라고 불리는 에튀드 op. 10. n.3 E장조는 쇼팽의 다른 곡에 비해 쉽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깊게 파고들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곡이 가진 아름다운 멜로디를 효과 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티큘레 이션1)을 특히 신경 써야 했다.

1) Articulation' 연속되는 선율을 보다 작은 단위로 구분하여 각각의 단위에 형과 의미를 부여하는 연주 기법 출처 두산백과

아주 작은 차이지만 같은 멜로디라도 달리 들릴 수밖에 없는 요소.

피아니스트라면 가장 두려워할 ‘해석’의 영역이다.

E장조가 쇼팽의 다른 곡보다 기교 적으로 쉬운 편이라고는 하나 완벽하게 연주하기 어려운 이유일진대.

배도빈은 마치 답을 내리듯 연주하였다.

가우왕의 감상은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디미트리 알렉스, 미카엘 블레하츠 등 세계적인 거장으로 이름을 떨친 심사위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려운 곡을 잘 연주하는 것보다.

쉬운 곡을 잘 연주하는 게 더욱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

슬픔(Tristesse)을 마치고.

배도빈의 두 번째 곡은 쇼팽의 에 튀드 0P. 10 NO. 6. E플랫 단조.

왼손으로 반주를 하는 와중에 두 개의 선율을 연주해야 하는 곡인데 이 역시 앞선 곡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지향했다.

피아노를 얼마나 잘 연주하는가를 겨루는 콩쿠르에서는 선뜻 고르기 힘든 선택지를 두 곡 연속 연주하면서 배도빈은 이 자리를 마치 본인의 개인 리사이틀 연주회장처럼 만들어 버렸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미카엘 블레하츠는 몇 년 전, 그래 미 시상식을 앞두고 만난 천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만 여섯 살.

벌써 4년 가까이 흘렀지만 미카엘 블레하츠는 그때의 배도빈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음악은 발화. 연주는 대화.’

설마 여섯 살짜리 꼬맹이에게 그렇게나 감명받을 줄이야.

더욱 놀라운 일은 배도빈이 자신이 한 말을 작곡과 연주로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대화라.’

마치 평생을 음악에 바친 사람처럼.

단순히 어린아이가 누구를 따라 말 한 것이 아니라 깊은 사색 끝에 결 론지은 멋들어진 표현이라는 것을 블레하츠는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모르는 팬들도 배도빈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ㄴ 콩쿠르가 아니라 콘서트인 줄

ㄴ 감탄밖에 안 나온다.

ㄴ 배도빈은 콩쿠르를 대하는 자세가 다른 참가자들과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보통은 선곡할 때 기교를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런 것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네요. 훌륭합니다. 명석해요.

ㄴ 도빈이 너무 멋있다.

두 번째 곡 연주를 마친 배도빈은 건반에서 손을 떼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준비가 된 듯 건반에 손을 올렸고 천천히 전조를 알렸다.

쇼팽 녹턴 NO. 20 C플랫 단조.

‘Reminiscence’.

회상 또는 추억담.

ㄴ 나 이거 알아. 로만 폴만스키 감독 영화에서 나왔음.

ㄴ 제목을 말해야 알지 멍청아.

ㄴ 와 무슨ㅋㅋㅋㅋ 진짜 할 말 없게 잘하넼ㅋㅋ

ㄴ 저작권 때문에 안 됨.

ㄴ 하…… 진짜 미친다. 내가 젤 좋아하는 곡인데 도빈이 연주 들으니까 진짜 너무 좋아.

배도빈이 마침내 마지막 발라드 한 곡을 연주한 뒤 일어섰다.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을 찾았던 청 중들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을 생각 도 못 한 채 감동을 전해준 피아니스트에게 경애의 박수를 보냈다.

심사위원들은 ‘1-25’ 스케일에 맞춰 배도빈의 이름 옆에 점수를 기입 했고 그 아래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YES’를 함께 적었다.

ㄴ 만점이겠지?

ㄴ 아닐지도 모름.

ㄴ 첫 주자라서 만점은 주기 어려울 듯. 배도빈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올 지도 모르니까.

ㄴ ㅋㅋㅋㅋㅋ 농담 잘하네.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차례를 마치고 나선 배도빈에게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1차 본선을 마친 소감 부탁드립니다!”

“첫 주자로 나섰음에도 많은 사람이 만점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본인 의 연주를 평한다면 어떻게 말씀하 시겠습니까?”

“이번 대회 우승을 자신하십니까?”

이제 기자들의 막무가내식 인터뷰도 익숙해진 듯 배도빈이 차례로 대답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쇼팽에 대해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요. 우승은 당연히 제가 해요.”

언제나 자신에 차 있는 대답에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배도빈만큼 우승에 가까운 사람도 없었다.

“오늘 같은 소속사인 니나 케베히리와 친구 최지훈이 출전합니다. 두 사람에게 전해주실 말 부탁드립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배도빈이 답했다.

“이 대회에서 주목할 사람은 니나 케베히리예요. 그녀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기대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도빈의 말이라 기자들은 조금 당황했다.

같은 소속사 피아니스트를 옹호하는 발언이라 하기에는 지금껏 배도빈의 태도와 부합하지 않았다.

할 말은 정확히 한다.

그간의 모든 인터뷰에서 조금의 가감도 없이 대답했기에 기자들은 정 보가 없어 관심 밖이었던 니나 케베 히리에 대해 인식을 고쳐먹었다.

“최지훈 군에 대해서는요?”

한 기자가 되묻자.

배도빈이 그와 눈을 마주하고 정확히 답했다.

“천재예요.”

***

9월 어느 날 이탈리아 피렌체.

“그게 아니라니까.”

“난 잘 모르겠어.”

도빈이가 쇼팽 콩쿠르 준비를 도와 주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4도에서 5도로 넘어가는 부분에선 살짝 공간을 둬야 한다는 말이야. 엄청 뜻밖의 전개잖아. 강조해야 한다고.”

도빈이가 날 바보 보듯이 본다.

나도 모르게 입이 조금 튀어나왔다.

“……자, 이거 조성이 뭐야.”

“ 파.”

“이건?”

“솔시 레.”

“음감이 그렇게나 좋으면서 왜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모른다구!”

한참을 씩씩대곤 도빈이가 숨을 길게 내쉰 뒤에 혼잣말을 했다.

“이걸 왜 모르지.”

또 울컥했다.

“바보 취급하지 마!”

“멍청아, 누가 바보라고 했어!”

“머, 멍청이?”

도빈이가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 만 이럴 때마다 조금은 속상하다.

재능 차이 때문이 아니다.

내가 도빈이의 음악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슬프다.

누구보다도 도빈이를 이해하고 싶은데 도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슬프다.

‘대체 왜 이해를 못하는 거지.’

채은이에게 설명할 때와 같이 방식으로 설명했는데 알아듣지 못한다.

설명하는 방식이 나쁜 걸까.

악보나 음계에 대해 모르는 채은이는 곡의 진행을 들려주면 그것을 기억해 연주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상대음감이 발달 된 부류였다.

음과 음 사이의 길을 너무나 잘 따라가는 능력을 지녔고 그러다 보 니 화성 진행에 대한 ‘분위기’를 잘 느끼는 것이었다.

작은 박자의 차이 역시 잘 듣고 기억하는데.

최지훈은 달랐다.

음의 진행에 집중하기보다는 한 음, 한 음에 대해 이해하는데 ‘연결’ 보다는 조성이나 화음에 집중했다.

말하자면 절대음감.

녀석의 정확한 연주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능력은 무척 희귀하여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크나큰 장 점이지만.

쇼팽의 곡처럼 해석의 여지가 다양 하여 음악성이 돋보이는 곡을 연주 할 때는 심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소 밋밋한 녀석의 연주에 도움을 줄 생각으로 화성 진행에 대 해 말했더니.

“무슨 말이야?”

못 알아듣는다.

여섯 개의 음을 한 번에 눌러도 계이름을 귀신같이 맞추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런 느낌에 대해서는 도통 모른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렇게 종일 직접 들려주기도 설명을 풀어내기도 하는 과정에서.

최지훈이 마침내 내 말을 이해했다.

다른 방법도 아니라.

그저 반복해 듣는 것으로.

“아! 아! 아!”

자신이 몰랐던 것을 깨달은 최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새로운 세계를 목도한 기쁨은 나도 잘 알고 있기에 녀석이 한 발 나아 갔다는 것에 기뻐했다.

“나 처음이야. 음악을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거 생각도 안 해봤어. 그 냥 쓸쓸할 땐 A단조, 활기찰 땐 C 장조 이런 식으로만 알고 있었어.”

“그렇게만 하면 단순해져.”

“응응! 이제 알 것 같아. 같은 조 성이라도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구 나. 이게 깊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과 입씨름을 하느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와 관련된 설명을 하고 진짜로 이해한 사람이 있었던가 싶다.

결론은 없었다.

‘하루 만에 이해했다고?’

신을 내며.

매우 어색하지만 방금 배운 것을 쇼팽의 녹턴에 적용하려고 피아노를 치는 최지훈을 보았다.

녀석은 박자를 일부러 늦추기도 건반을 누르는 힘에 강약을 조절하기도 하면서 음 진행을 다루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쇼팽의 곡을 이해해 나가기 시작한 것.

지금이야 너무나 서툴지만 분명 내가 말했던 것을 겉으로 이해하는 것 이 아니라 정말 받아들인 것이다.

상대음감과 절대음감을 모두 다루는 음악가는 나 이외에 정말 많이 못 보았는데.

이제 막 또 한 명의 천재가 탄생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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