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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47화 (14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47화

    33.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6)

    더럽게 재미없다.

    필요한 공부라 하고는 있지만 영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나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나마 음악 공부는 좀 재밌을까 싶었더니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음악 이야기는 조금도 재미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이런 걸 애들이 공부한다고?’

    요즘 아이들 참으로 불쌍하다.

    “그럼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다.”

    억지로 집중한 끝에 네 번째 강의가 끝났다.

    “피곤하신 것 같네요.”

    “연주회 준비도 했고 곡도 구상하고 있으니까요.”

    8월 도쿄 리사이틀 이후.

    연주회 일정을 모두 마친 채 현재는 학교와 집을 반복해 다닐 뿐이지 만 그간 쌓인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채은이와 피아노를 치는 게 유일한 정신적 휴식이었는데 그조차 몸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가정교사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아무래도 회장님께 말씀드려 며칠 간 쉬는 게 좋겠네요.”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19세기에도 가방끈이 짧았던 내가 현대 공부를 하자니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도련님은 아직 어려요.”

    “알고 있어요.”

    나야 그것을 너무나 절실히 깨닫고 있어 알아서 조절하고 있지만 그럼 에도 주변에서 걱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예전 미국에서 한번 쓰러진 적도 있으니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샛별 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할아버지께서 단단히 일러둔 가정 교사 역시 마찬가지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쉬고 싶어 그러 자고 말했다.

    “좋아요. 오늘 수업 뒤에 회장님께 말씀드릴게요. 남은 시간은 적당히 이야기나 하죠. 궁금한 거 없나요?”

    궁금한 거라.

    한국대를 졸업했다는 이 사람은 꽤 박식해 보였는데 딱히 물어볼 만한 일은 없었다.

    “ 없어요.”

    “그럼……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꽤 재밌을 거예요.”

    나야 대학을 가기 위해서지만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해 가만 히 가정교사의 말을 기다렸다.

    “사회 시간에 미나마타병에 대해 배운 거 기억나세요?”

    “네.”

    “수은이나 납의 유해성에 대해 몰랐던 과거 사람들의 무지, 또 그것을 알면서도 최소한의 도덕심조차 없었던 자본가들 때문에 생겨난 재 난이었죠.”

    재밌는 이야기라더니 역시 거짓말 쟁이다.

    “도련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베토벤도 납 중독으로 죽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네?”

    “이제 좀 흥미가 생기신 것 같네요.”

    흥미고 뭐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납 중독으로 죽었다니.

    “비교적 최근 일인데 베토벤의 시 신에서 머리카락을 채집, 분석한 결 과 납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 가장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전 납을 먹은 적 없는데.”

    “지금은 체내에 적겠지만 조금은 있을 거예요. 현대인들도 조금씩은 몸에 쌓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 은 베토벤 이야기를 하는 거니 집중 해 주세요.”

    할 말 없다.

    “베토벤은 와인을 즐겨 마셨다고 해요. 꽤 주당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에는 와인에 감미료를 쳐서 마셨어요.”

    참 맛이 좋았지.

    요한의 백 가지를 부정해도 와인을 좋아한 것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 감미료에 아세트산납. 즉 납이 들어 있었던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에게 뒤 통수를 세게 맞은 듯했다.

    “실은 당시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납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납이 들어 있는 와인을 자주 마시는 버릇 때문에 더 심해진 거 죠. 술을 많이 마셨던 베토벤은 황 달을 겪었다고도 하는데 그건 간이 나빠져서 생기는 증상 중에 하나고요.”

    “배에 복수가 찼다고도 하는데 아 마 간경화로 보는 사람도 많아요. 그 간경화 치료제에 또 납이 포함되 어 있었고요.”

    “모두 무지 때문에 생긴 안타까운 일이죠. 수은 같은 경우도 피부 미 용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결 국에는 스스로 몸에 독약을 바른 거 예요.”

    “어때요. 공부를 하는 게 그리 무 의미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진 않죠?”

    “납에 중독되면…… 어떤 증상이 있는데요?”

    “의사가 아니라 정확히는 몰라요. 같이 찾아볼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교사가 방에 있는 컴퓨터를 켜 인터넷에 납 중독의 증상에 대해 검색했다.

    그것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아차 싶었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했던 그 무지한 행동 이 나를 파멸로 이끌었다니.

    멍청한 게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보다 절실히 느낄 수 있을까.

    “지금은 이런 일 없겠죠?”

    “아니요.”

    그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

    “납 중독으로 죽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어도 납 중독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에요. 지금도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증상이 있거든요.”

    “게다가 개발도상국이나 전쟁 지역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우리 나라에도 빈곤층이 있고요.”

    찬란한 미래에 다시 태어났다고 생 각했건만.

    나는 정말로 운 좋게, 좋은 환경에 서 태어난 것이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많은 아이들이 굶고 있어요. 흙탕물을 마시며 지내고 있죠. 전 도련님이 고등학교 검 정고시에 합격하면 그쪽으로 가 구 호활동을 할 거예요. 원조를 받아주 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해서 그 들이 더 이상 희망조차 없이 살지 않도록. 그게 제 꿈이에요.”

    멋진 생각이다.

    나 또한 다시는 나처럼 무지하여 스스로 파멸로 이끄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누군가를 돕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컴퓨터를 끄려는 데,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최지훈의 이름이 올라왔다.

    뭔가 싶어 클릭했더니 기사가 쏟아졌다.

    【최지훈 실신! 티전자 최우철 사장 의 잘못된 자식 사랑]

    【최지훈의 일정은 아동학대나 다름 없었다】

    【천재가 떠안은 부담. 11살 아이가 쓰러질 때까지 일한 이유는?]

    빌어먹을.

    당장 할아버지께 부탁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녀석이 입원한 병실 문 앞에 도착 해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환자가 있는 방에 다짜고짜 들어갈 순 없으니까.

    ♩♪♫♬♩♪♫♬

    ‘ 민요잖아.’

    병실 안에서 멜로디언이 옛 독일 민요를 연주하는 소리가 났다.

    한국에서는 나비를 주제로 가사를 붙였던 것 같은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최지훈이 침대에 누워 멜로디언을 연주하고 있었고 중년 남자가 그것을 웃으며 보고 있다.

    “어? 뭐야?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놀랐잖아.”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도빈이구나. 지훈이에게 많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야.”

    병실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최지훈 의 아버지를 본다면 면상에 주먹을 꽂아줄 생각이었는데.

    부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런 마음도 깨끗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그간의 앙금을 어느 정도 씻어낸 것 이리라.

    “안녕하세요.”

    다가가자 최지훈이 침대에 앉으라 며 이불 위를 팡팡 두드렸다.

    “나 걱정해서 온 거야?”

    “그럼 안 하겠냐.”

    “히히 힛.”

    “둘이 얘기 나누고 있거라.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네.”

    최우철이라는 양반이 나가고 최지훈이 여전히 헤실거리며 물었다.

    “혼자 왔어?”

    “그럴 리가. 할아버지네 직원 분이 랑 왔어.”

    “얼마나 있을 수 있는데?”

    “몰라, 인마. 어떻게 된 거야?”

    “잘 기억은 없는데 피곤해서 그렇대. 이제 멀쩡해. 아! 밀라노 극장 놀러 갈래? 내일 퇴원하니까!”

    “그냥 쉬어. 그런데 갔다간 기자들 때문에 난리도 아닐걸.”

    “기자님들은 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니 최지훈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우리 아버지 이런 사람 아니야.”

    “그럼 푹 쉬고 일어나서 말해.”

    잔뜩 화가 난 녀석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실은…… 촬영도 나 때문에 일주일이나 연기되었어. 영화를 찍을 땐 기간이 늘어날수록 돈이 너무 많이 든대. 죄송해서 어쩌지……

    “꼬맹이는 그런 걱정 하는 거 아니야.”

    “너도 꼬맹이잖아. 나보다 한 살 어리면서.”

    “히히힛. 그래도 네가 와주니까 너 무 좋다. 실은 아버지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셔서 퇴원해도 집 에서만 있어야 했거든.”

    아들이 이 지경인데 돌아간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 그만하실 건가봐.”

    “어?”

    “그동안 너무 힘들어하셨는데 난 너무 잘된 것 같아. 이제 술도 안 드신대!”

    “이제 쭉 함께 있자고 하셨어. 나, 아버지 그런 모습 보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꿈만 같아.”

    역시나.

    애늙은이 흉내를 내는 녀석이라 해 도 부모의 역할이 너무나 소중할 때.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최지훈에게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은 며칠 놀았더니 너무 편하고 좋은 거 있지.”

    “그래. 나도 온 김에 좀 쉬어야겠다. 차라리 여기서 10월까지 있다가 바르샤바로 바로 가는 게 어때?”

    “그럴까?”

    “뭐 나쁠 거 있나. 이탈리아는 쉬기 좋다고.”

    “와본 적 있어?”

    “예전에 짧게.”

    그렇게.

    밤새도록 묵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티전자 최우철 사장 전격 사퇴! “보다 유능한 CEO가 티전자와 함께 할 것입니다.”]

    【최지훈. 최우철 사장의 자녀학대 논란을 일축. “저는 세상에서 아버지를 제일 사랑해요.”】

    【최지훈, 배도빈 10월까지 이탈이 라에서 휴가】

    【두 천재를 향한 엇갈린 시선, “여유부린다 vs 쉬어야 한다”]

    트로피아 비치 모래사장.

    두 소년이 모래성을 쌓으며 대화 중이다.

    “그나저나 너 이제 돈 아껴 써. 아까 음료수 반이나 남았는데 버렸잖아. 그러게 하나만 사서 나눠 먹자 니까.”

    “어? 왜?”

    “네 아버지 일 그만두셨잖아. 예전처럼 막 쓰면 안 될걸. 자고로 사람 이 저축을 하고 있을 때 조심해야 하는 거야.”

    “아버지는 일 그만두셔도 내 손자 까지 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이래서 부자들이란.”

    “네 외할아버지가 훨씬 더 부자시잖아.”

    그 말을 듣고.

    외할아버지를 조금 더 존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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