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44화 (144/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144화

33.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3)

최지훈은 예선 첫날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다.

“엄청 들떠 있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콩쿠르 니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폴란드 의 천재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의 곡만을 연주하여 경쟁하는 대회라 고.

아는 게 많은 최지훈이 알려주었다.

4월 13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지는 예선이 시작되었고.

관중석에서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들은 최지훈은 무척 진지해졌다.

특히 니나 케베히리의 예선  두 번째 날 연주를 들은 최지훈은 더 이상 예선을 보러 가지도 않은 채 자신을 좀 더 예리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니나의 연주가 녀석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나 또한 ‘얀 에키에르의 악보(The National Edition of the Works of Fryderyk Chopin)’1)를 보며 어떻게 연주할지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할

Djan Ekier(1913~2014):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학 자, 독립운동가, 위대한 교육자. 쇼 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명예 심사위 원. 일평생 쇼팽 연구에 힘썼다.

쇼팽 협회에서는 콩쿠르 참가자에 게 얀 에키에르의 악보를 사용하길 권장한다.

정도였으니 다른 참가자들은 구태여 알아볼 필요가 없었는데.

요구하는 바가 많긴 했다.

‘여섯 곡이라니.’

쇼팽 콩쿠르는 주최자인 쇼팽 협회 가 곡이나 장르를 선정해 주는데, 그 중에서 참가자가 선택하여 연주하는 방식이었다.

예선에서는 선정된 두 곡의 연습곡을 비롯하여.

야상곡과 연습곡 중 택 1.

발라드, 뱃노래, 스케르초, 환상곡 중 택 1.

마지막으로 마주르카 중에서 한 곡을 더 골라 총 여섯 곡을 암기하여 연주해야 했다.

처음 쇼팽 콩쿠르의 예선 과제곡을 접했을 때는 홍승일을 떠올릴 수밖 에 없었다.

최근 2년.

피아노 부에서 홍승일과 다투는 내 내 쇼팽을 연주했었다.

때로는 내 곡이나 슈베르트, 슈만, 리스트를 다루기도 했지만 홍승일이 가장 사랑했던 작곡가는 쇼팽이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쇼팽을 탐구하는 일은

썩 즐거운 일이었고 치열했다.

해석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악보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나는 홍승 일과 매일 논쟁을 벌였고 결국에는 누가 옳은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그를 가슴에 묻은 지금에야.

그가 내게 얼마나 귀중한 경험을 주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이 콩쿠르를 따로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괜찮으려나.’

곡이 길지는 않지만 여러 곡을 준 비해야 했기에.

배움이 더딘 최지훈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정이었을 테고.

그것은 비단 녀석만의 문제는 아니 라 생각했다.

예선부터 크리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것이 요구되었기에 그리 생각했는데.

과연.

20여 개 나라에서 모인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수준은 확실히 크리크 참가자들과는 달랐다.

쇼팽 콩쿠르는 기껏해야 30〜40명 정도를 뽑는 다른 콩쿠르와 달리 160명이나 선발하는데.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선발인 원 사이에 실력 차이가 클 거라 생 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다.

“5년에 한 번 열리니까 그만큼 많이 뽑고,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준비 하거든.”

히무라의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고 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야 이 콩쿠르에 참가한 이유가 니나 케베히리, 최지훈과 함께하기 위해서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말 많이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도련님 이만 주무셔야지요. 내일 제 컨디션으로 연주하려면 휴식도 필요합니다.”

“네, 집사님. 조금만 더 하고 잘게요. 먼저 주무세요.”

집사님께서 걱정스럽게 말씀하시곤 문을 닫으셨다. 아마 이렇게 말해도 내가 자기 전까지 기다리실 게 뻔해 죄송하지만.

연습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지훈이가 쇼팽 콩쿠르에? 정말 나 간대?’

‘응. 좋은 경험이 되겠지.’

‘배도빈이라면 모를까. 예선이나 통과할 수 있을까?’

‘연습은 열심히 하고 또 정말 잘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힘들지. 그래도 다음을 위해 예선만이라도 참가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음악의 전당 아카데미 선생님들은 쇼팽 콩쿠르만큼은 힘들 거라 말했다.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비슷한 말을 했다.

예선을 통과하기 힘들 거라고.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도빈이의 우승을 기대하면서 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상처 받지는 않았다.

쇼팽 콩쿠르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 부분 이미 대단한 국제 콩쿠르에서 1, 2등을 했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보다 10년 이상 노력한 천재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단 두 사람만은 달랐다.

‘본선에는 발라드 G단조가 나올 거야. 홍승일 선생님이 말해줬어.’

도빈이랑.

‘다녀와라. 본선이 10월부터라고 하니 영화 촬영하는 와중에도 쉴 시 간은 없을 거다.’

아버지.

두 사람만은 내가 예선에서 떨어지는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 있어.

나조차 예선에서 떨어질 거라 생각 하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이 날 믿어줌에.

부담스럽기도.

또 동시에 해낼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까.

하늘에 계신 엄마도 응원하실 테니까.

피아노가 좋으니까.

*

예선 5일 차.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에 21세기 클래식 음악계를 뒤흔든 최고의 음악가가 들어섰다.

‘드디어 꼬맹이 차례인가.’

‘과연 어떤 쇼팽을 들려줄지.’

‘작년 서울 뒤 처음인가? 오늘은 또 얼마나 놀라게 해줄지 기대되네, 도빈 군.’

이미 여러 번 그의 연주가 세계를 울렸기에 심사위원단은 배도빈이 무

대 위에 오르자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피아노를 들은 사람들은 극상 의 연주를 들었음에 황홀해하거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을 느꼈다.

악마인가 신인가.

배도빈을 표현하는 말 중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문장이 있을까.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 심사위원단이었지만, 그것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 은 배도빈의 연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 명단 디미트리 알렉스(DA) 마르가타 아르헤리치(MA) 미카엘 블레하츠(MB) 카쿠라자카 아키호(KA) 가우왕 (G) 필립 엔트(PA) 너드 닐슨(NN) 아담게리 비셰츠(AV) 금윤디 (K)

그 외.

총 17인의 심사위원은 모두 세계 적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그 깊이에 있어서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심사위원진들조차 배도빈이 공연을 한다면 반드시 찾아 들을 정도였다.

음악가 사이의 음악가.

과연 오늘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심사위원은 배도빈이 건반 위에 손을 얹자 귀와 마음을 열었다.

과연.

배도빈의 쇼팽은 정갈했다.

♪♫♬

♪♫♬

쇼팽의 피아노는 비슷한 시기에 활 동했던 또 다른 천재 프란츠 리스트 와 달랐다.

프란츠 리스트가 웅장하거나 화려 하면서도 가득 찬 음표로 귀를 즐겁 게 한다면.

쇼팽의 피아노는 공백이 많다.

생각할 여지가 많으며 해석할 방향 이 다양하다.

리스트의 음악이 매우 고난위도의 기교를 요구한다지만 비교적 명확한 반면, 쇼팽의 곡이 연주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해석과 표현.

쇼팽이 남긴 유산은 단순히 악보를 따라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나 깊이 있는 해석이 있을 수 있는가.’

‘괴물이라니까.’

심사위원들은 배도빈의 연주에 푹 빠져 버렸다.

특히 마지막.

마주르카 A단조의 구슬픈 멜로디를 표현하는 데 있어 배도빈은 박자를 최대한 길게 이어갔다.

애절한 음색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모든 심사위원이 배도빈의 이름에

1-25 스케일(최하 1점 최고 25점) 에 맞춰 25점과 다음 라운드에 진 출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YES’를 적어 넣었다.

“역시 배도빈인가.”

“D플랫 장조 왈츠도 잘하잖아. 원 래 연주하던 곡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던데.”

“저 정도 되면 장르나 분위기는 안 탄다는 거겠지.”

“콩쿠르라 준비했겠지만 얼마나 많은 곡을 칠 수 있는지 진짜 신기하 다니까. 저 어린 나이에.”

“달리 천재겠어?”

대기실에서 배도빈의 연주를 들은 참가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각자 최선을 다해, 우승하기 위해 참가했지만 배도빈의 피아노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도빈이야.’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최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하고 싶지만 배도빈은 저 멀리,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우승은 배도빈.

대부분, 아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최지훈은 그런 친구가 자랑스러웠 고 동시에 자신의 위치도 너무나 잘 알았다.

크리크 콩쿠르까지는 어떻게든 함께했지만.

더 이상 따라갈 수는 없다고.

그러나 그것이 걸음을 멈춰야 할 이유는 못 되었다.

피아노를 그만둘 이유는 더더욱 아 니었다.

모두가 예선에서 떨어질 거라 말하 고 좋은 경험을 쌓으라고 할 뿐이었지만 최지훈은 그러기 위해 쇼팽 콩쿠르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매일 지친 아버지를 웃게 해드리고 싶어서.

고독하게 나아갈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늘에 계실 어머니를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해 듣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착한 마음.

이 대회에 참가한 순간만큼은 그 순수한 마음도 이유가 되지 않았다.

나아가기 위해.

온전히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 해 참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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