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38화 (13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38화

    31. 10살, 부러진 의자(10)

    [피아노의 한계를 넘어선 감동】

    -모리스 르블랑(르 피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멋대로 뻗어나간 전개였지만 돌이켜보면 그 보다 완성도 있는 연주는 없었다]

    ,빌리 브란트(슈피겔)

    【폭력적인 연주. 샛별이 마침내 온 전한 악마가 되어 강림했다】

    -이시하라 린(아사히 신문)

    【촘촘한 구성, 완벽한 완급 조절. 최고의 하모니]

    -마리 살티스(데이즈)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무대】

    •이필호 (관중석)

    【배도빈의 피아노가 사랑받는 이유]

    지난 4일. 나는 오늘 공연을 담당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음악의 전당 올 찾았다.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아찔하고 말았다.

    르 피가로, 슈피겔, 데이즈 등 세계 유명 잡지의 수석 기자들이 눈앞에 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뿐인가.

    세계의 거장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 고 있는 모습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평소에도 거장들이 찾는 장소였지 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한곳에 있으니, 내가 알던 장소가 맞나 싶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모두 배도빈과 故홍승일 피아니스트의 협연을 기대하는 듯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천재는 오늘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나와 청중들은 기대하며 무대 위에 오른 두 피아니스트를 맞이했다.

    그러나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연주를 분석한다?

    현장 반응을 체크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은 그날의 연주회를 듣고 집에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할 때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배도빈의 음악에는 왜 빠져들 수밖 에 없을까. 왜 그가 천재라 불리는가.

    격렬한 열정, 자유로움, 풍부한 상 상력을 자극하는 반음 활용.

    지면만 할애된다면 수십 개라도 적을 수 있지만 그날의 연주회를 듣고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대의 피아노가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을 전해주었다는 점 이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고 겨울을 경험했다. 숲 속을 거닐었다.

    배도빈과 故홍승일 피아니스트는 그날의 연주로 ‘감정은 절제할 때 더 크게 다가온다’라는 기존의 생각을 깨버린 것이다.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그러기 위한 사색과 기교로 전달된 그들의 감정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전해주었다.

    전달.

    그들의 연주는 이미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수준에 이르러 마치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 착각이 어쩌면 내 과도한 망상 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연주를 들은 2,500명 모두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혹누신한다.

    분명 그의 음악에는 빠져들어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다고.

    다시는.

    배도빈, 홍승일 피아니스트의 듀엣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분히 슬 퍼하며.

    앞으로 나는 배도빈 피아니스트와 같은 시기에 살아 있음을 축복으로 여길 것이며, 故홍승일 피아니스트를 추억할 것이다.

    •한이슬(2014년 11월호 음악기행)

    첫눈이 내리고 며칠 뒤.

    두 번째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그럼 다들 방학 잘 보내고. 숙제 있지 않고. 방학이라 너무 늦잠 자면 안 돼요.”

    “네!”

    포슬포슬 내리는 눈이 조금씩 운동장을 덮어갈 즈음에야 교실에서 나온 나는 피아노 부실로 향했다.

    내 자리로 가 피아노를 열었다.

    개인 연습실은 유독 공기가 찼다. 건반도 차게 식어 난로를 켠 뒤 방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발이 좀 더 굵어진 듯하다.

    적당히 공기가 달아올라 연주를 시작했다.

    “어머. 도빈아, 아직 집에 안 갔어?”

    한창 연주를 하고 있는 와중에 임시로 피아노 부를 맡은 교사가 부실 로 들어왔다.

    “기사님이 눈이 와서 조금 늦는대요.”

    “그렇구나. 눈이 너무 와서 큰일이 네. 다들 잘 돌아갔으려나.”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다시 연주를 이어나갔다. 관악기도 현악기도 가 수도 없지만 생각나는 대로 건반을 눌렀다.

    연주를 끝내자 교사가 다가왔다.

    “너무 좋다. 베토벤. 베토벤이지?”

    “네.”

    “으음. 9번 소나타?”

    “아니요. A플랫 장조였어요.”

    “A플랫…… 장조?”

    “12번이에요.”

    “아하하. 공부하고 있는데 어렵네. 다음 주부터는 좋은 선생님이 오실 거야.”

    “네.”

    기분이 들지 않아 적당히 대답하고 일어났다.

    “기사님 오셨대?”

    “아마 지금쯤 오셨을 거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들어가〜”

    “그래. 도빈이가 결정한 일이니 도와줘야지. ……걱정 마라. 그런 건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래. 모레 오면 함께 한적한 곳에서 하루나 이틀 정 도 쉬자꾸나. 그래. 그 아이들도 함께면 도빈이도 좋아하겠지. ……괜찮다. 언제까지고 슬퍼하고 있을 수 만은 없으니.”

    유진희와 통화를 마친 유장혁 회장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주회를 마치고 일주일 뒤 조용히 눈을 감은 벗을 생각할 때마다 목 아래가 묵직해졌다.

    평생을 함께했던 두 사람 중 남은 한 명마저 잃은 그는 간신히 버텨내 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먼저 보냈던 유장혁으로서도 그렇게 힘든데, 어린 배도빈 은 어떨까.

    유장혁은 손자가 큰 충격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홍승일의 장례식에도 담담히 그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듯 엄 숙히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어른스러운 녀석이니 티를 내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럴 리 없지.’

    유장혁이 고개를 저었다.

    매일 저녁을 함께할 때면 손자는 최지훈, 차채은, 니나 케베히리 등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친구 홍승일과 어떻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가장 열성적으로 말하곤 했다.

    틀린 것을 고쳐주었다든지.

    조금 귀찮지만 확실히 그 부분은 홍승일의 말이 맞았다든지.

    하지만 다음엔 그런 실수는 없을 거라든지.

    녀석이 스스로 말했던 대로 사제관 계라기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나 친구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사실에 유장혁은 감사했다.

    마땅히 음악을 배울 곳이 없다고 말하는 손자에게 좋은 동료가 되어 주었던 친구에게.

    희망을 잃고 무대 위로 다시 올라서지 못했던 친구에게 빛이 되어준 손자에게 더 없이 고마웠다.

    성탄절을 앞두고 독일에서 부모님이 오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꼭 끌어안으셨고 나도 반가운 마음에 두 분을 안아드렸다.

    할아버지의 제안으로 최지훈과 채은이네 가족과 함께 할아버지의 별 장으로 향했다.

    계곡이 있었는데 사유지라 그런지 다른 사람은 없었고 느긋하게 낮잠 이나 자려던 난 최지훈과 채은이에 게 이끌려 결국 물에 몸을 담그고 말았다.

    허브 솔트를 뿌린 소고기와 송이라는 향이 진한 버섯을 메인으로 한 바베큐를 먹은 뒤 다락방으로 올라 왔다.

    “오케스트라를 만들 거야.”

    “어?”

    놀란 최지훈과는 반대로 채은이는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가 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니까 당연 하지. 하지만 내 음악을 함께할 사람은 내가 정하고 싶어.”

    “그렇구나.”

    “당장은 어렵겠지.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만들고 운영하는지도 모르니 까. 그래서 16살이 되면 독일로 갈 거야. 그때부턴 독일 대학도 갈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대. 대학에서 관 련 공부 하면서 베를린 필에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 대단하다……

    “내 오케스트라엔 피아노도 넣을거야.”

    반응은 보이고 있었지만 와닿는 말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나?”

    “오빠, 나두. 나두.”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지.”

    “ 엑.”

    “그게 뭐야.”

    최지훈과 채은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있다면 고민 없이 그 사람을 데려오고 싶지만 최지훈과 채은이는 아직 한참 멀었다.

    현재로서는 니나 케베히리.

    십 년이란 시간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몰라도 그녀가 착실히 걷는다면 나는 그녀를 내가 구상한 오케스트라의 피아노로 데려오고 싶다.

    오보에 주자로 마르코를 데려오고 싶은 것처럼.

    ……여기까지가 내 예상이고.

    내 예상을 뛰어넘어, 나조차 어디 까지 발전할지 모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지만.

    “왜?”

    채은이를 보다가 눈을 돌렸다.

    “지훈이 넌 영화 찍는다며.”

    “응! 1차 오디션 합격했어!”

    “정말 하고 싶은 거야?”

    “나 모차르트 좋아하니까. 그리고 연기도 해보니까 재밌더라.”

    “뭘 하든 네가 좋아하는 걸 해야겠지만 두 개를 다 하는 건 힘들 거야.”

    "응."

    솔직한 심정으로는 말리고 싶다.

    하지만 내가 최지훈이 아닌 이상 녀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본인도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를 때가 많으니, 어릴 때 많은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말리지 않았다.

    “채은이 너도 아직 멀었어.”

    “오빠랑 오케스트라 하려면 피아노 얼마나 잘 쳐야 해? 오빠만큼?”

    "응."

    “그럼 안 할래. 난 듣는 게 더 좋아.”

    “왜? 너 피아노 잘 치잖아. 아까워. 도빈이가 네 칭찬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서 그래.”

    날 대신해서 최지훈이 물었다.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아무튼 당황한 탓에 말하지 못한 걸 잘 말해주었다.

    “듣는 게 더 좋으니까.”

    “하면서도 들을 수 있잖아. 너 도빈이랑 연주할 때 엄청 좋아했잖아.”

    “응. 도빈이 오빠랑 연주하면 재밌 어. 엄청 행복해. 근데 아빠한테 무슨 곡인지 설명해 주는 게 더 재밌 어.”

    뒤통수가 얼얼하다.

    이제 제법 말이 많아진 녀석이 말을 계속했다.

    “아빠가 그러는데 평론가 하면 좋겠다고 했어. 글도 잘 쓴다고. 나 일기 엄청 잘 써.”

    존중해야 한다.

    억압할 생각 따위.

    요한 같은 일을 할까 보냐.

    하지만. 하지만 재능이 너무나 아쉽다. 평론가라니.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되려 하다니.

    멋대로 남을 본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려 하는 것을.

    내가 봤던 그 어떤 재능보다 찬란한 것을 두고 그런 길을 가려 하다니.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풀어야 좋을 지 머릿속이 복잡했을 때 채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 곡이 얼마나 좋은지 아빠랑 엄마한테 말해주면 엄마랑 아빠도 막 오빠 곡 듣고 싶대.”

    "..."

    “유치원 친구들한테 베트호펜도 가 르쳐줬다?”

    “나 그거 할 거야.”

    “……피아노는 계속하자.”

    “그럴 거야. 재밌으니까.”

    채은이의 대답이 정말 취미로만 즐길 거라는 말 같아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느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평론가가 아니라 선교자.

    적어도 채은이는 좋은 걸 공유하고 싶은 거라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