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37화 (13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37화

    31. 10살, 부러진 의자(9)

    한지석 협회장은 히무라 쇼우 대표 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배도빈이 한국에서 처음 피아노 콘서트를 한다는 데 지원을 아낄 수 없었다.

    음악의 전당을 대관하는 일부터 홍 보까지, 영세하지는 않으나 한국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었던 히무라 쇼 우는 한지석 협회장 덕분에 한국에 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된 ‘배도빈 피아노 콘서트’는 예매 시작 즉시 2,500석에 달하는 표가 매진되었다.

    NBC가 실황 독점 중계를 맡고.

    WH그룹 및 7개 유명 기업이 후원 하는 ‘배도빈 피아노 콘서트’는 앞선 추석 특집 공연의 영향으로 더욱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한국의 반응만큼이나 해외의 관심도 뜨거웠다.

    배도빈이 두 번째 앨범을 낸 뒤 처음 가지는 연주회였기에 전 세계의 언론이 서울을 방문하였고.

    동시에.

    잊혔던 피아니스트 홍승일이 협주 자로 나온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는데 40대 이상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NBC 보도국의 김준용 기자는 음악의 전당을 찾은 최명운 지휘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오늘 연주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도빈 군의 피아노는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죠. 저도 팬으로서 즐길 생각이에요.”

    “홍승일 피아니스트가 31년 만에 공식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도빈 군과 추석 공연을 준비하면서 들었습니다. 저도 무척 기대됩니다. 홍승일 선배의 연주가 얼마나 잘 어울릴지 이제 들어가서 기다리 고 싶네요.”

    최명운이 인터뷰를 정중히 끊어내자 김준용 기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했다.

    다른 유명 인사들에게도 홍승일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는 듯했다.

    “이거 안 되겠는데.”

    “그럼요. 누가 말하고 싶겠어요. 지 금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때는 엄청 충격이었다고요.”

    김준용 기자의 한탄에 촬영 담당자 가 카메라를 내리고 말했다.

    “그걸 캐묻는 게 아니잖아. 나도 남의 아픈 기억 들추긴 싫다고.”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하시지. 무 턱대고 묻고 다니니까 이럴 때 사람 들이 묻지도 않는데 조심하는 거잖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했냐! 위에서 시키니까 했지! 잔말 말고 일반인 인터뷰나 하나 더 따고 들어가자.”

    * * *

    홍승일은 31년 만의 연주회를 기다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과 상처로 뒤덮인 그의 두 손은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았지만 사고 당시의 기억은 너무도 생생했다.

    78년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뒤로 홍승일은 국위선양을 한 피아니스트로서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당시만 해도 피아니스트에 대한 인 식은 좋지 않았는데.

    홍승일은 음악가에 대한 인식을 바 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었는데, 그 이후 그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은난새, 최명운, 박건호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 타나면서 음악가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첫 해외 개인 콘서트.

    국내파였던 홍승일에게는 너무나 간절했던 기회였고 당시 그의 아내 와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탑승.

    모든 것이 그가 바라는 대로 천천 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기대했던 날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숙소로 묵고 있던 호텔에 큰 화재 가 나면서 두 손을 잃은 것이었다.

    뒤늦게 깬 부부는 연기가 차올라 호흡마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피해 내려간 비상계 단 문이 열리지 않았던 탓이었다.

    다시 올라가려 해도 이미 화마가 위에서 내려오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홍승일이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아내가 홍승일을 밀치고 뜨겁게 달궈진 손잡이를 쥐었다.

    피아니스트의 손을 망가뜨릴 순 없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연기를 들이마신 영향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아내를 보곤 홍승일은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러지 마!’

    ‘손! 손! 그러지 말라고!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당신 손 망가지면 나 당 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자꾸만 차오르는 연기 속.

    이대로 죽을 수 없었던, 아내와 함께 살기 위해 홍승일은 무리하게 달 궈진 손잡이를 잡다 그만 큰 화상을 입고 말았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구출되었으나 당일 콘서트는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에 현지 반응 은 냉담할 뿐이었고, 홍승일은 자신 의 꿈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귀국 후.

    다행히 친구 유장혁의 경제적 지원으로 아내와 함께 치료받을 수 있었지만 재활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길었다.

    마음의 병이었을까.

    예전의 연주를 할 수 있기도 전에 시름시름 앓던 아내가 떠나고.

    홍승일은 연주를 포기했었다.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어 도, 무대 위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다시 피아노를 함께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부활.

    그래, 부활이다.

    그는 지금 그에게 희망을 주었던 사람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배도빈과 홍승일이 무대 위에 올랐다.

    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두 사람이 피아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는 행동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배도빈과 홍승일이 시선을 나누었고 배도빈이 두 번째 앨범의 첫 번 째 곡, ‘가을비’의 첫 음을 눌렀다.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에 청중들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마치 뙤약 볕 아래 있는 것처럼 듣는 순간 어 지러움을 느꼈다.

    그때.

    청명히 퍼지는 세컨드 피아노.

    퍼스트 피아노가 낸 낮은 음을 이어받은 홍승일은 마치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바람처럼 순식간에 연주 회장을 감쌌다.

    또다시 퍼스트 피아노가 뒤이어 낮은 음계를 묵직하게 내며 주제를 확 장시키고 변주된 세컨드 피아노의 역할이 반복한 뒤 정적.

    대체 얼마나 간격을 둘 생각일까.

    청중들은 숨 죽여 다음 음을 기다렸다. 간절하게 바랐다.

    똑. 똑.

    배도빈의 퍼스트 피아노가 한 음, 한 음 떨어져 내리고.

    뚜둑. 뚜두둑.

    홍승일의 세컨드 피아노가 그것을 고조시키며 마침내 더위를 몰아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배도빈의 속주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떨어져 내린 음표가 모여.

    청중들의 가슴에 닿을 때마다 빗방 울이 튀기듯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어울렸다.

    때때로 난입하는 세컨드 피아노의 느린 연주가 배도빈의 연주와 어울 려 비가 쏟아지고 가늘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듯했다.

    때로는 바람을 표현했고.

    때로는 세컨드 피아노의 B플랫 음 들이 무너지듯 내리쳐, 천둥을 표현 하듯 묵직한 소리를 더하며.

    두 대의 피아노는 마침내 가을이 왔음을 전해주었다.

    두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마치고 손을 차분히 건반에서 떼었을 때.

    그 잔잔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허허.’

    객석에 앉아 있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또다시 발전한 배도빈의 연주에 이제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계절이나 날씨를 표현한 음악은 정 말 많이 들었지만 이토록 실감이 난 적은 없었다.

    가우왕과 함께 녹음한 앨범 역시 훌륭했지만 직접 듣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뛰어난 피아니스트와 함께해서일까.

    배도빈이 작곡한 ‘가을비’의 진가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분석과 공감 그리고 깊은 사색이 있어야만, 그리고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 수 있고 연주할 수 있어야만 가능했다.

    ‘Rain’이란 명곡을 만든 사카모토 료이치라 알 수 있었다.

    방금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된 ‘가 을비’을 완성하기 위해 배도빈이 얼 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그것을 완벽히 연주하기 위해 저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말이다.

    배도빈이 고개를 들고 다시 피아노 에 손을 얹었다.

    두 번째 곡은 ‘태풍’.

    앨범 녹음을 할 때는 비바람 속에 서 대부분 즉홍하여 연주했다는 문 제의 그 곡.

    정형화할 수 없었던 ‘태풍’의 시작은 실로 고요했다.

    한 음 그리고 한참 뒤에 한 음.

    그러나 그 공백 뒤에 무엇이 나타 날지 상상할 수 없었기에 더욱 두려 운 분위기가 생겨났다.

    그 와중에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세컨드 피아노.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 나온다.’

    누구라도 예상할 시점에.

    배도빈이 태풍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단조로 시작된 묵직한 화음이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그 속에서 휘몰아치는 세컨드 피아노.

    분위기를 잡는 퍼스트 사이마다 삽 입된 음표들은 날카롭게, 날카롭게 칼바람처럼 온몸을 훑었다.

    그 급격한 연주에 엉망이 된 청중 들은 묵직하게 퍼지던 퍼스트 피아노의 소리가 일순간 사라지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쿠구궁.

    벼락.

    배도빈이 건반을 강렬히 내려쳤다.

    G단조의 딸림화음이 벼락과 같이 울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관중들은 이어지는 강풍을 맞이했다.

    듣는 사람을 압도하는 상상력.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떠올릴 수밖 에 없는 태풍의 기억.

    두 번째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는 것조차 잊 은 채 어안이 벙벙하여 무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지막 곡을 남겨두고 손목이 뻐근함을 느낀다.

    늙은 몸이 드디어 무리라며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손가락은 마디마다 욱신거리는데, 저 어린아이는 얼마나 아플까.

    언제부턴가.

    관중들이 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박수마저 환호마저.

    고도로 집중했을 때 들을 수 있는 객석의 숨소리마저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다들 조심하는 거다.

    집중하는 거다.

    저 아이와 내 연주를.

    그래. 이것이다.

    나는 이런 연주를 하고 싶었다.

    갈 때조차 내 손을 쥐고 있었던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피아노.

    대한민국의 음악을 세계 앞에 보이 고 싶었던 그날의 피아노.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그래. 한 곡이 남아 있었지.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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