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36화 (136/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136화

31. 10살, 부러진 의자(8)

추석 특집 클래식 in 코리아가 열 렬한 환호 속에 마무리되고 이틀 뒤.

최명운 지휘자는 단원들을 모아 10월 24일에 있을 UN의 날 콘서트에 배도빈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유는 두 가지.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뜻에서 배도빈을 합류시켜 연주의 질을 높이 자는 것과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인 배도빈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최명운이 자신의 생각을 어필한 뒤 단원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전 좋아요. 하지만 도빈 군이 연 습에는 잘 참가해 줬으면 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 번 같이해 보니 왜 그렇게 유명한지 알겠더라고요. 하지만 10월 초에 연주회 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잘 준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실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롭게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명운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을 지목했다.

“정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저는.”

잠시 말을 고르던 비올라 주자 박 정호가 마음을 다진 듯, 생각을 털 어놓았다.

“저는 이번 일이 대한국립교향에게 무척 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몇 년간 준비했던 우리가 인정받은 거 라고요.”

박정호의 말에 단원 모두 최명운도 공감하는 듯했다.

“그래서 저는 저희끼리 나가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빈 군을 싫어해서가 아니에요. 어린데도 너무나 훌륭한 음악가죠. 하지만. 하 지만 도빈 군이 함께한다면 우리의 명예가……

박정호가 차마 말을 못 끝마쳤다.

그러나 다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뛰어난 후배, 그것도 이제 열 살도 안 된 후배라 치졸한 것 같아 말은 못하지만 너무나 솔직한 생각이었다.

사실, 배도빈이 참가한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그에게 쏠릴 것이 당연했다.

그는 이미 100만 장에 가까운 음 반을 판 작곡가이자 그래미 위너였으며 세계적인 거장들과 어깨를 나 란히 하는 아홉 살 천재였으니까.

클래식 음악 불모지라는 대한민국 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다 갈고닦으며 자리를 지켰던 그들은 인정받고 싶은 것이었다.

대한국립교향의 수준이 다른 유명 오케스트라에 전혀 밀리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최명운이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몇몇 단원이 박정호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최명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00명 중 단 한 명이라도 이런 생 각을 가지면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이번 미팅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음 먹었다.

그 무대는 대한국립교향의 무대니까.

배도빈이 참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아쉽지만, 정말 아쉽지만 지휘자라 해서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UN의 날 콘서트?”

“응.”

추석 공연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이승희, 이승훈과 뒤풀이를 하는데 생 소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일 곧장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이승훈의 말에 이승희는 가족과 며 칠 함께 있자고 했는데.

이승훈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10월 말에 UN의 날을 기념하는 콘서트에 참가하게 되어 바쁘다고 말 한 것이었다.

“그게 뭐예요?”

“세계 평화와 화합을 기리는 행사 라고 해야 하나?”

좋은 취지의 일이다.

과거 유럽은 현대와 비교하면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신성 로마 제국 아래 통일되지 못 했던 독일은 긴 전쟁을 겪었으며.

프랑스의 빌어먹을 독재자라든지 (그 독재자 놈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 한 그리스의 투쟁이라든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전쟁이 있었다.

그 끔찍한 시대가 언젠가 종식되고 찬란한 미래가 다가올 거라 믿었던 나는 비록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다시 태어났으니 내 바람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것이다.

“좋은 일이네요.”

“응. 큰 영광이지.”

“가보고 싶어요.”

“음. 그건 힘들걸?”

“왜요?”

내 질문을 이승훈 대신 히무라가 대신 답해주었다.

“UN의 날 콘서트는 유엔공보과 (UNDPI)에서 주관하는데, 그 사람 들에게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거든. 비공개 행사야.”

세계 평화와 화합을 위하는 행사라 면 공개를 해야지.

이상한 인간들이다.

“ 치사하네요.”

“하하. 뭐, 어쩔 수 없지.”

“도빈아, 빨리 베를린으로 돌아오면 참가할 수 있어. 매년 초청받거든.”

“그럼 이번에도 나가요?”

“아니.”

눈을 좁혀 뜨곤 이승희를 보니 ‘명 예로운 자리는 맞지만 꽤 제약이 많아 거의 나가진 못해’라고 설명했다.

‘속인 거잖아.’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다니.

내색하고 있진 않지만 인력 부족이 정말 심각한 모양이다.

그 문제는 10월 공연 뒤에 유학 또는 이민 문제를 고민할 때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평화라는 단어에 이끌린 나는 이 UN이란 단체에 대해 관심이 갔다.

“UN은 그럼 세계 평화를 바라는 곳이에요?”

이승희, 이승훈은 잘 모르는 듯했고 역시나 뭐든 잘 아는 히무라가 설명을 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 단체라고 생각하면 돼.”

“제2차 세계대전?”

“나중에 학교에서 배우게 될 거야.

음…… 큰 전쟁이 있었는데 그런 일 이 반복되지 않도록 분쟁을 조율하는 거지.”

히무라가 핸드폰으로 무엇인가를 찾더니 내 앞에 보여주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UN본부야. It's your world. 바로 당신의 세계 라는 모토로 운영되고 있지.”

영어로 설명되어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히무라가 홈페이지를 보며 간 단히 UN이란 곳에 대해 알려주었다.

“근데 LA 필에서는 뭐 연주해?”

“D 단조.”

“베토벤?”

히무라에게 설명을 듣는 사이 내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응. 뭐, UN의 날 콘서트에는 거의 단골이니까.”

“하긴. 합창만큼 잘 표현한 것도 없지.”

그런 제목을 짓진 않았지만 한국이 나 일본에서는 꽤 ‘합창’으로 불리 는, 내 아홉 번째 교향곡에 대한 이 야기다.

“무슨 얘기예요?”

알 것 같으면서도 확인차 물었다.

이승희가 답해주었다.

“베토벤의 D단조가 뭐랄까. 조금 진부한 표현이긴 한데 인류애와 평 화를 상징하잖아. 그래서 UN의 날 콘서트에는 꽤 많이 연주되었어.”

“아마 여섯 번이었지? 제일 많이 연주되었을걸?”

그렇다곤 생각했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고독과 좌절과 고뇌 그리고 절망적인 세계에서도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랐던 나이기에.

그런 나를 비추는 것으로 D단조를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길 바랐건만.

과거 나는 듣지 못했어도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잘 받아들여준 모양 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고개를 돌렸는 데, UN 홈페이지에 접속한 히무라 의 핸드폰에 이상한 구조물이 띄어 져 있었다.

“이건 뭐예요?”

“아. 평화의 상징이랄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핸드폰에 서 시선을 떼 히무라를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지뢰라는 것 때문에 사람이 정말 많이 죽었거든. 그렇게 희생당한 분들을 기리고 경 각심을 가지기 위해 이렇게 한쪽 다 리가 부러진 의자를 기념물로 삼은 거야. 제네바에 갔을 때 한 번 본 적 있는데 엄청 크더라.”

히무라의 설명을 듣고 다시 사진을 보았다.

추석 공연 이후.

3주간 홍승일과 치열하게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공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내일은 연주회장에서 봐요.”

“그래. 고생했다.”

다행히 홍승일은 잘 버텨주었다.

경쟁심리라고 해야 할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보다 더 철저 히 한 기억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내 일이 기대되었다.

동시에 나와 함께해 준 홍승일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그가 어떤 각오로 임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인사를 건넬 수는 없었지만 최고의 연주를 함으로써.

내 마음이 전달되길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며 홍승일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사카모토다.

“사카모토.”

-하하. 잘 지냈는가.

“그럼요. 사카모토도 잘 지내죠?”

-음. 잘 지내고 있지. 연주회가 내 일이라고 들었네만.

“네. 혹시 오는 거예요?”

-다행히 시간이 되어서 말이지. 할 말도 있고 해서 잘되었네.

“할 말이요?”

-간단히 말하자면 섭외지. 일루전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중인 극장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 일세. 이번에 음악 감독으로 들어가 게 되었는데 작품이 정말 좋더군. 노란 꼬맹이들이 얼마나 귀엽던지. 껄껄.

“재밌을 것 같아요.”

-음. 분명 그럴 걸세. 그래서 자네 와 함께하고 싶네.

사카모토 료이치와의 작업은 언제나 즐거웠고 항상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분명 이번에도 그러할 텐데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먹은 일이 있었기 에 아쉬움이 생겼다.

“미안해요, 사카모토. 저 계획이 생 겼거든요.”

-허허. 내가 늦었구만. 그래, 이번 에는 또 어떻게 놀라게 해줄 건가?

“교향곡을 만들 거예요.”

-음? 어디 영화 OST라도 만드는 겐가.

“아니요. 다른 이야기와는 관련 없이 제 이야기로 만들 거예요.”

-허허. 이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구만. 자네가 교향곡이라 할 정도면 전통적인 뜻이겠지?

“네. 구상은 계속 하고 있었는데 사실 잘 감이 안 잡혀서요. 몇 년이 걸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나?

아홉 번째 교향곡 D단조.

열 번째 교향곡을 만들기 위한 시험작이자 당시 내 전력을 쏟아부은 D단조는 솔직히 그 이상의 곡을 만 들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죽기 직전까지 열 번째 교향곡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고민하였고.

결국 다시 태어난 뒤에도 머릿속으로 구상만 계속했을 뿐 시도할 엄두 가 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D단조를 만드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렸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간 여러 곡을 만들었지만 영화나 게임 등 기존의 스토리에 맞춘 작업 이었고.

첫 번째 앨범 같은 경우엔 내가 죽기 전에 구상했던, 그리고 태어난 직후의 감상들을 작업했던 것이다.

첫 앨범이 그간 못 했던 것을 쏟 아낸 거라면, 두 번째 앨범은 다시 금 나로 돌아가는 과정.

이제.

다시 내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이다.

“네.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자네처럼 곡을 빨리 짓는 사람도 드문데. 얼마나 대작을 구상하는지 솔직히 감이 잘 안 잡히는구만.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을 듣곤 슬쩍 웃고 말았다.

예전에 나를 상대했던 출판사 직원이 사카모토의 말을 들으면 펄쩍 뛰었을 것이다.

나처럼 곡을 늦게 만드는 사람도 드무니까.

태어난 직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머릿속으로 구상만 하고 정리만 해댔고, 나카무라와 히무라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제 음악을 할 수 있었으니.

사카모토는 그 쏟아냈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다.

“네. 긴 작업이 될 것 같아요. 또 배우기도 해야 하고.”

-오늘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구만. 내일 공연 이후 천천히 들려주길 바라네.

“그렇게 해요.”

전화를 마친 뒤 창 너머 시선을 두었다.

얼마나 걸릴까.

또 그것을 연주할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또 그들을 내가 잘 이끌고 지휘할 수 있을까.

여러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지만 답은 없다. 문제는 넘쳐난다.

다만 의지만 있을 뿐.

그러나 걱정은 없다.

내게 새로운 도전이 찾아온 것에 의지를 불태울 뿐이다.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 sen Ku ß der ganzen Welt!

-서로 껴안아라! 만인이여,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베토벤 교향곡 9번 D단조 4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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