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33화
31. 10살, 부러진 의자(5)
차명운과의 미팅을 마치고 할아버 지와 함께 저녁을 먹는 와중에 뜻밖 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학이요?”
“그래.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학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것도 없이 부모님이 계신 독일이다.
더군다나 베를린 필하모닉과 푸르트벵글러가 있으니까.
“간다면 독일이요. 그런데 갑자기 왜요?”
한국인으로서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받는 정도는 나와 부모님이 합의한 일이다.
처음에는 나도 한국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내다보니 여러 이유가 생겼다.
하나는 팬.
세계 여러 곳에 팬들이 있지만 우리나라만큼이나 내 음악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여주는 분들도 없었다.
매일매일 샛별 엔터테인먼트 사무 실에 도착하는 팬레터부터 방송 출 연을 할 때마다 찾아와주는 사람들 의 얼굴마저 기억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을 향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 입문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면 솔 직히 조금 뿌듯해지기도 했다.
그것은 어떤 평론가의 평보다 나를 기쁘게 했다.
둘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친구와 제자.
최지훈과 함께 있으면 녀석의 밝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만다.
과거, 내 주변 사람들은 소리를 잃는 과정에서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나를 두려워했다.
당시에는 보다 완벽한 음악을 만들 기 위해 윽박지르는 것을 당연히 생 각했지만, 따지고 생각해 보면 그때 보다 지금이 음악을 함에 있어서 수 월하다.
여태 함께 일한 사카모토 료이치나 푸르트벵글러, 토마스 필스가 위대 한 음악가인 탓도 있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유를 가 질 수 있었던 내 태도 역시 과거와 달라졌다.
그러면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 도 충분히, 아니, 더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최지훈을 통해 자각할 수 있었다.
녀석은 충분히 나를 미워할 수 있었다. 녀석의 나이와 환경을 생각하 면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마음을 나눈 친구.
녀석이 내게 주었던 믿음과 사랑이.
평생 돈만 노리고 어떻게 속일까 다가왔던 놈들을 상대했던 내게 희 망을 준 것이다.
내가 히무라를 좋아하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채은이는.’
채은이는 첫 번째 제자인데, 사실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어리다 보니 칭얼대기도, 내 뜻대로 행동하지도 않지만 애초에 난 채은 이를 구속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 찬란한 재능을 마음껏 펼 치길 바랄 뿐.
‘사실 이것도 욕심인가.’
굳이 말하자면 손녀랑 노는 기분인 데 또 그 시간이 나를 편안케 한다.
‘할아버지도 마음에 걸리고.’
할아버지도 나이가 적지 않다. 과 거의 오해와 갈등을 풀고 이제야 자 기 가족을 찾은 분을 혼자 두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 가장 사이가 안 좋은 주변인 이자, 내게 억지로 사명감을 주려고 하지만 그래도 내 피아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홍승일.
그와 매일매일 싸우면서도 피아노 부 활동을 2년 가까이 한 것은 그 와 다투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흐음.”
할아버지는 깊게 고민하셨던 듯 어 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네 피아노 선생님이 많이 아 프단다.”
홍승일에 대한 이야기다.
예상하고 있었기에 잠자코 들었다.
“너라면 알겠지만 승일이는 정말 훌륭한 피아니스트란다. 할아버지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젊었을 때는 정 말 대단했지. 너를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친구가 있었기에 널 입학시킨 건데……
아마 어린 손자에게 죽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망설이시는 듯했다.
“이제 승일 선생님이 너와 함께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좋은 선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게야.”
친구의 죽음을 안 할아버지는 너무 나 괴로워 보였다.
직원들이 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지금 보니 표정이 말이 아니다.
“우선 승일 할아버지는 선생님이 아니에요.”
“……그건 무슨 말이냐?”
“피아노를 함께 탐구하는 동료이자 친구예요. 그래서 승일 할아버지가 아픈 건 무척 슬퍼요.”
“그래서 곧 함께할 연주회는 정말 잘 준비할 거예요.”
“고맙구나.”
할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학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한 국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지금 당장 독일에 간다 해도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어요.”
“그러냐.”
“네. 학원이나 학교는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견학도 해봤는데 솔 직히 저를 가르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아요.”
어렸을 적 다닌 학원이든 최지훈에 게 들은 음악의 전당 아카데미든 니 나 케베히리가 가끔 편지를 보내 알 게 된 그녀가 다니는 음대 피아노과 의 실기 과정이든.
솔직히 어떤 교육시설이든 음악에 있어 나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내게 학교는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곳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인인 내게 한국에서 다니는 게 좋을 거라 생각 했고, 그게 어머니, 아버지와 합의한 내용이다.
“그래.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혹시나 생각이 바뀌 거나 할 때는 언제든 말하려무나. 항상 말하지만 할아버지.”
“못 하는 일 없으시다고요?”
“껄껄. 그래. 사람이 살고 죽는 일만 아니면 우리 도빈이를 위해 뭐든 해주마.”
“그럼 식사부터 좀 하세요. 요즘 통 잘 안 드시는 거 같아 걱정하고 있어요. 승일 할아버지 때문이에요?”
할아버지의 카레 그릇을 보며 걱정 스레 물었다.
“크흠. 큼. 그, 그래. 먹자꾸나.”
식사를 마치고 도빈이를 방으로 올 려보낸 뒤 생각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저 아이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었건만, 베를린의 작은 공원에서의 대화로 내 손자가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라 생각했다.
이 손으로 이룩한 WH 그룹.
되도록 진희가 이어주길 바랐지만 그게 어렵다면 배 서방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도 안 된다면 도빈이라도 이어주 길 바랐지만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해 대 책 없이 시간이 또 몇 년 흘렀고.
나는 이제 유일했던 친구마저 잃을 것 같다.
WH그룹 회장으로서 있기까지 나를 친구로서 대했던 유일한 벗이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쉽지만.
그룹은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넘겨 야 할 것 같다. 그것이 WH그룹을 위한, 진희와 도빈이를 위한 길인 것 같다.
그저 내 욕심과 아쉬움만 달래면 될 뿐이다.
하지만.
도빈이에게만큼은 뭐라도 하나 남 겨주고 싶다. 많이 사랑해 주고 싶다.
‘재단을 만들까.’
도빈이 앞으로 재단을 만들어 녀석 이 앞으로 음악을 하는 데 경제적으로든 법, 행적적으로든 편히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가 죽기 전에.
‘꿈이 큰 아이니까.’
분명 도빈이는 단순히 곡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할 아이가 아니다.
자신이 만든 곡을 직접 연주하고 다니는 거나 최근에 재능 있는 사람을 직접 투자해 양성하는 것을 보더 라도 뭔가 생각하고 있다.
사업가로서의 내가 했던 모습과 닮았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을 직접 연 구, 개발해냈고.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세계 곳곳을 직접 다니며 인재를 찾아 키워내 WH그룹의 직원으로 데려왔다.
그래. 준비하자.
내 손자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 금은 알 수 없지만, 녀석이 꿈을 펼 칠 때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더 늦기 전에 준비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대한국립 교향악단과의 협 연과 10 월에 있을 홍승일과의 연주회 연습으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최지훈이나 채은이와도 뜸하게 볼 정도로 말이다.
오늘도 피곤함을 느끼며 귀가했는데, 이승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나,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아주, 나?”
“ 누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진희 언니 아들한테 내가 누나 소리 들어서 뭐 하겠어.
그렇게 잠시간 농담을 나누고 이승희가 본론을 꺼냈다.
-추석에 음악의 전당에서 연주한 다며?
“네.”
-나랑 내 동생도 나가게 됐어. 협회장님이 얼마나 떼를 쓰던지. 너한 테도 그랬지? 안 봐도 비디오야.
“비디오가 뭐예요?”
-……세상에. 너 정말 어리긴 어리 구나? 비디오 몰라?
어리다니.
“몰라요.”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나도 나가 게 되었는데 사실 독주를 하려고 했는데 솔로는 오랜만이라서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반주가 있는 편이 좋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싫어요. 저 지금 바빠요.”
-야, 누나 서운하다? 아직 말도 안 꺼냈어.
“협연하자는 거 아니에요?”
- 맞아.
“싫어요.”
-도빈아아. 누나 좀 도와주라.
“동생도 나온다면서요. 그 형하고 같이하면 되잖아요.”
-걘 남궁예건하고 같이한대.
여기저기서 버림받다니.
대한민국 최고, 아니, 세계에서 가 장 힘 있는 첼로라는 이름이 불쌍해 진다.
“……짧은 거로.”
-정말? 정말이지?
“진짜 짧은 걸로요.”
-그래, 그래. 나 내일 들어가니까 맞춰보자. 샛별 사무실로 가면 되 지?
“ 네.”
다음 날.
사무실로 찾아온 이승희는 여전히 기운이 넘쳤고 시끄럽고 나를 당황 하게 했다.
“이걸 하자고요?”
“응. 짧잖아?”
처음 듣는 곡인데 뭔가 내가 듣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묘하게 끌리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조금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대한민국하면 이거지. 추석 무대 에 이보다 좋은 선곡은 없을걸? 그쵸, 히무라 씨?”
“하하. 전 노코멘트할게요.”
히무라마저 의견을 내길 거부하자 이승희가 박선영을 보았다.
“전 좋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이 벤트성 연주회잖아요. 반응 좋을 것 같은데.”
“봐. 역시 젊은 사람들끼리 통한다 니까. 가끔씩 이렇게 뽕을 받아야 해. 어차피 다들 즐기러 오는 거니 까 이런 것도 필요하지.”
뭔가 미심쩍지만 어려운 곡은 아니다.
“코드는 단순하네요.”
첼로로 연주하기에도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는다.
“응!”
피아노로 그럴듯하게, 아니, 그럴듯 한 수준의 연주를 들려줄 순 없지.
편곡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이 빚은 꼭 받아낼 거예요.”
“그럼! 카레 사 줄까?”
“카레는 훌륭하지만 비싼 음식이 아니에요.”
“어……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정말 바빠졌으니 확실히 챙길 생각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