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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32화 (13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32화

    31. 10살, 부러진 의자(4)

    홍승일과 연주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치열했다.

    그는 그 어떤 때보다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

    나도 그도 보다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녀석아! 악보에는 플랫으로 되 어 있잖아! 왜 또 이번에는 올리라는 거냐!”

    “똑같이 연주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매번 같은 음악을 들려줄 거면 연주회를 왜 하는데요!”

    “그건 그렇지.”

    그런 디테일한 작업까지 맞춰가면 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이 사람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구나.

    그간 몸이 아픈 것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여기 좀 더 부드럽게 넘겨야 한다니까요?”

    “아니야. 아니야. 음……. 이런 건 어떠냐?”

    “어. ……다시 쳐봐요.”

    그러나 마지막 불씨를 태우려는 피아니스트의 각오와 기개를 존중하며 나는 보다 더 그와 논쟁을 반복했다.

    대충할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최선에 최선을 거듭해 최고의 연주를 위해 다가가는 것만이 내가 그에 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오, 이 부분은 정말 좋구나. 이런 느낌인가?”

    연주를 한 번 반복한 뒤 음미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그래. 늦었구나.”

    아쉬운 듯했지만 홍승일은 더 하자는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를 아직 어린 애로 봐서 늦은 시간에는 어떻게든 안전하게 돌려보내고 싶은 모양이다.

    할아버지께서 운전기사를 보내주셔 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말이다.

    서로 짐을 챙기는 와중에 곧 추석 이야기를 꺼냈다.

    “주석에는 뭐 해요?”

    “나야 손녀랑 놀아야지. 얼마나 귀여운 줄 아냐? 사진 볼래?”

    인자하게 웃는 홍승일은 평소 음악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었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손녀를 정말 사랑하는 듯, 행복한 얼굴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귀엽다.

    “요기, 요 입 좀 봐라. 오물오물거 리는 게 귀엽지?”

    “귀엽네요.”

    홍승일이 낄낄거리며 내게 보여주 려고 꺼낸 핸드폰을 자기가 다시 보 다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는 넌 추석에 음악의 전당에 서 연주한다며?”

    “네.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C장조로 정했어요.”

    “C 장조? 피아노 콘체르토 말이냐?”

    홍승일이 의아한 듯 재차 확인했다.

    “네. 왜요?”

    “드문 일이니 그렇지. 살리에리의 콘체르토라. 카덴차가 있는 곡이구나. 페르마타도 신경 써야 할 테고.”

    역시 경력은 괜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곡 인데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선생님의 C장 조 콘체르토는 피아노 독주 부분(카

    덴차)만큼이나 페르마타 (Fermata: 박자의 운동을 늦추거나 멈추는 지 시)를 어떻게 주는지가 중요했다.

    페르마타에 따라 곡의 표정이 달라 지고 살리에리 선생님의 C장조 콘 체르토는 그런 효과에 따라 곡이 정 말 많이 바뀌니 말이다.

    “그래, 함께할 사람은 정했고?”

    “대한국립교향이 도와준대요. 히무라가 차명운이라는 사람이 흔쾌히 수락해 줬다고 하던데.”

    “차명운이라. 그래. 그 친구라면 너 와 어울리겠지.”

    히무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 휘자라고만 들었는데 아직 그가 어 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암. 잘 알지. 같은 대학을 다녔으니까. 내가 군대 다녀오고 그 친구 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는데 웬걸. 그런 천재도 드물지.”

    홍승일이 천재라고 할 정도면 확실 히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한번 들으러 가야겠네. 읏쟈.”

    홍승일이 부실 한쪽에 놓여 있던 부러진 의자를 들었다. 몸도 안 좋으면서 힘을 쓰는 게 불안하다.

    “그건 왜요?”

    “아, 다리만 하나 고치면 멀쩡하니 까. 고쳐주려고. 왜.”

    “그냥 버리고 새로 사요.”

    “응〜 쯧쯧쯧. 이래서 요즘 애들은 안 된다니까. 돈 많다고 물건을 막 낭비하면 안 되지. 기다려봐라. 내 새것처럼 고쳐 올 테니. 낄낄.”

    나도 고집이 세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이 인간은 정말 못 말리겠다.

    박선영과 함께 대한국립교향악단을 찾았다.

    “차명운 선생님을 직접 뵐 줄이야. 네 매니저하길 잘한 거 같아.”

    “그 전에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얘는. 너 요즘 자꾸 나 놀리는 거 같다?”

    “재밌으니까요.”

    전용 홀은 없지만 음악의 전당과 NBC 콘서트홀을 사용한다고 들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마침 연습을 하고 있는 걸 들으니 대한민국 최고의 교향악단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연주는 무척 섬세하여 무엇 하나 흘리는 음 없이 품위가 있었다.

    얼마나 반복해 훈련했는지 단 한 곡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만한 악단이 있는데 불모지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대한국립교향악단의 연주가 한차례 끝나고 솔직한 평을 남겼다.

    “좋은 악단이네요.”

    “그치? 우리나라에도 얼마나 좋은 곳이 많은데. NBC도 대구도 경기도 광주도 엄청 좋아.”

    가만두면 우리나라에 있는 악단을 모두 읊을 것 같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지휘자가 우리 에게 시선을 주었다.

    박선영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말 좋아하는 지휘자라며 히무라 대신 오고 싶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차명운이 두 팔을 활짝 벌렸고 단원들은 고개를 숙인 뒤 한 명씩 연 습실에서 나갔다.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배도빈이에요.”

    “반가워요. 정말 반가워요.”

    차명운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정과 매너가 듬뿍 담긴 인사였다.

    “아, 아, 안녕하세요.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박선영이라고 합니다. 도빈이의 매니저를 맡고 있어요.”

    “히무라 대표에게 들었어요. 유능한 분이라고 하던데요. 하하.”

    뭔가 신사다우면서도 친근한 느낌인데 방금 그가 지휘했던 그 섬세한 연주와 함께 첫인상이 좋다.

    그의 안내를 따라 대한국립교향의 상임 지휘자실에 들어갔다. 여기저 기에 악보가 있고 잉크 냄새가 나는 데 꽤 익숙한 환경이다.

    “정신없죠? 악보 정리를 못 할 거 면 컴퓨터로 작업하라 하는데 아무래도 직접 쓰는 게 익숙해서. 쉽게 바뀌지가 않아요.”

    “이해해요.”

    “하하. 젊은 사람은 기기에 익숙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네요.”

    차명운과 마주보고 앉았다.

    “홈. 살리에리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하고 싶다고요?”

    “네.”

    차명운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도빈 군과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수락했다만 연습할 시간이 짧긴 해요. 연주자들에게도 익숙하 지 않은 곡이니까. 더군다나 같은 날 다른 일정도 있고.”

    “ 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영화를 본 뒤 인터넷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아보니 내 생각보다 살리에리 선생님의 평이 정말 좋지 않았으니까.

    대부분은 ‘모차르트!’라고 아마데와 관련한 답을 했는데 그러한 느낌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건 대한민국 어딜 가나 마찬가질 테니, 걱정 말아요. 대한민 국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함께해 줄게요.”

    현재 상황에 대해 가감 없이 말하 면서도 당당히 자신감을 드러내는 솔직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히무라가 내게 말도 안 되는 사람을 소개해 줄 리 없고, 방금 그의 지휘를 듣고선 그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이 사람이라면 잘 어울려 줄 거라고.

    “그럼 바로 악보부터 보도록 하죠. 여기 어디 있었는데……. 음?”

    “저, 저도 같이 찾아드릴게요.”

    뭔가 악보를 쌓아두고 찾지 못해 헤매는 모습마저도 익숙하다.

    결국 나도 합류해서 한참을 찾은 끝에 차명운이 일차적으로 감수를 본 악보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스타일이구나.’

    확실히 약간의 변형을 통해 곡의 분위기를 살리는 쪽보다는 악보에 충실한 지휘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음 표현을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한 박자를 다루는 수준은 대단해 보였다.

    분명 그가 감수한 이 악보에도 모 두 나타나지 않았지만 실제 지휘를 할 때는 이러한 섬세함이 보다 잘 전달될 거라 생각했다.

    스타일을 알았으니 서로 생각을 공 유할 차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옆에 있던 박선영이 몸을 꼬았다가 일어서서 주변을 구경하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정신 사나워요.”

    “벌써 네 시간째인데……

    “하하하. 이거 벌써 그렇게 됐나? 잠시 머리 좀 식히고 하죠.”

    차명운이 일어서서 사무실 구석으로 향했다. 쌀 과자와 녹차를 가져 다주었는데 둥글고 납작한 쌀 과자는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 요즘에는 추석 공연과 개인 연주회를 준비하느라 바쁘겠네요?”

    “ 네.”

    “꼭 들려야겠네. 하하.”

    “그래주면 좋을 것 같아요. 협연자 가 아저씨를 안 대요.”

    “ 나를?”

    “홍승일 피아니스트.”

    내 말에 차명운이 눈을 크게 떴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상체를 들이 밀며 묻는데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기에 나도 조금 놀랐다.

    “홍 선배가, 홍 선배가 연주회에 나온다고요? 내가 아는 그 성질 더 러운 한국대 63학번 그 홍승일 선 배가?”

    “성질은 더러운데 한국대 63학번 인 건 모르겠어요.”

    차명운이 다시 털썩 앉았다.

    “허. 허허. 허허허헛. 세상에 내가 그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을 줄이 야. 은퇴하곤 다신 못 들을 줄 알았거늘. 그래,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피아노부 선생님이에요.”

    차명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를 놓진 않으셨구나. 다행이야. 그럼 지금 손은 다 나으셨겠네요.”

    “손이요?”

    “곁에 있던 도빈 군이 손이 안 좋은 걸 몰랐다면 괜찮은 모양이네요. 다행이야. 천만 다행이야.”

    차명운은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기 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대단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만으로 도 고맙지만, 홍 선배를 다시 무대 위에 끌고 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정말로.”

    “무슨 일 있었어요?”

    홍승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차명운이 그를 이렇게까지 추억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일은 본인에게 듣는 게 좋겠네요.”

    사정이 있긴 한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너랑 만나면 부 탁할 게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어줄 수 있겠죠?”

    “그럼요.”

    한 달도 안 남은 급박한 일정을 수락해 주었으니 나도 주는 게 있어 야 할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은 청소년 바이올린 교실을 운 영하고 있는데.”

    “네.”

    “거기에 한번 나와줄 수 있을까요?”

    “페이는요?”

    “도, 도빈아.”

    박선영이 당황했지만 나도 차명운 도 진지하다.

    “하하. 당연한 이야기니까 그리 당 황하지 말아요, 선영 씨. 프로가 페이 없이 움직이는 게 도리어 말이 안 되니까.”

    옳은 말이다.

    “실은 계약서를 아예 만들어 왔죠. 언제 또 인기 스타 배도빈과 만나겠어요. 하하하.”

    차명운이 내게 내민 계약서는 정말 간단했다.

    청소년 바이올린 교실에 하루(두 시간) 나가서 함께 바이올린도 켜고 가르쳐 주기도 하는 내용이고.

    금액에는 500만 원이라 적혀 있었다.

    “요즘 애들이 다 도빈 군을 따라해서 말이죠. 도빈 군과 안 친하냐 고 계속 물어보는 통에 면이 안 섰 는데, 도빈 군이 와주면 학생들도 좋아할 거예요. 모두 도빈 군의 팬 이니까.”

    내 몸값에는 맞지 않지만, 햇병아리들을 위한 교습비라 생각하면 적 당한 가격이다.

    박선영이 한번 훑어보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상의 문 제는 없다는 뜻과 페이도 강습료로는 적당하다고 판단한 모양.

    나도 기분 좋게 펜을 들어 숫자를 고쳤다.

    “도빈아?”

    “ 음?”

    “제 팬이라면서요. 강습료라면 받겠지만 팬들이 만나달라는 거라면 돈 받고 갈 순 없잖아요. 대신 남은 돈으로는 같이 밥이나 먹어요.”

    “아니, 이럴 순 없어요. 5만 원이 라니.”

    “그건 선영 누나 몫으로 받아야 해요”

    차명운과 박선영이 뭐라 그러기 전 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차명운에게 넘기니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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