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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31화 (13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31화

    31. 10살, 부러진 의자(3)

    “자, 자네 왜 이렇게 될 지경까지 한마디 말도 없었나!”

    “킬킬. 뭐, 말하면 고쳐주기라도 했으려고?”

    유장혁 회장은 홍승일의 몸 상태에 대해 전해듣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둘 다 나이가 많았지만 평생 잔병치레 하나 없었던 친구가 이토 록 몸이 망가졌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많은 사람을 떠나보낸 유장혁에게 도 홍승일의 소식은 당황스러웠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크게 호통을 친 유장혁을 보며 홍 승일이 정말 환히 웃었다.

    “이미 해볼 일은 다 했어. 좀 더 일찍 말하지 않아 미안해. 거, 표정 좀 풀어.”

    유장혁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나 슬퍼해 주는 친구를 두어 홍승일은 담담한 와중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친구 앞에서 삶에 대한 미 련을 말할 수는 없었다.

    유장혁이 더욱 슬퍼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유장혁이 너한테는 정말 고마워.”

    유장혁은 고개를 저었다.

    “도빈이랑 같이 피아노를 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 줄 아나? 아니, 자네는 모를 거야. 그 녀석의 음악 은 정말. 정말 최고지.”

    “……얼마나 남았다고 하나.”

    “거 너는 말이야. 몸도 멀쩡하면서 손주 녀석 연주회에는 왜 안 간 거야? 어? 그 아까운 기회를 놓치다 니. 너무 돈, 돈 하다가 즐길 거 못 누리니 이제 적당히 좀 해.”

    “얼마나 남았냐고 묻잖나!”

    유장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

    슬퍼하는 친구를 보며 홍승일이 입을 열었다.

    “올해는 넘기기 어려울 것 같더군. 그런데 의사들 말을 믿을 수가 있어 야지. 킬킬.”

    말을 잃은 유장혁을 향해 홍승일이 평소의 경박한 말투가 아닌, 진실된 어조로 부탁했다.

    “도빈이에겐 부디 비밀로 해주게.”

    “그건 또 무슨.”

    “그 아이와 협연을 하는 게 내 마지막 꿈이야. 부디, 부디 허락해 주게.”

    “잘 알지 않나. 나 막무가내고 제 멋대로인 거. 가는 길에 마지막 억지 한번 부리겠네.”

    유장혁 회장은 차오르는 슬픔을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만으로 달랬다.

    전화로 난리부르스를 칠 때부터 설 마설마했는데 정말이었다.

    “나 멋있지!”

    “••••••그래.”

    최지훈이 또다시 18세기에나 썼던 가발을 뒤집어썼다.

    잘츠부르크에서 입었던 옷과는 달 리 의상도 제법 그 당시의 고급품과 다를 바 없었다.

    주말을 맞이해 최지훈이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는데, 외할아버지가 직접 데려다 주었다.

    최지훈의 아버지는 내 생각과는 조 금 달리 멀쩡해 보였고 내게도 무척 붙임성 있게 대했다.

    뭔가 최지훈을 압박하고 있어 매일 술에 찌든 모습을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단지 얼굴이 조금 누런 게 건강은 좋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그렇게 밥을 먹고 녀석에 방에 올라갔더니 최지훈이 그 광대 같은 복장을 굳이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꼭 나가래. 도움이 될 거라고.”

    “그리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왜? 멋있잖아.”

    “그래. 뭐, 네가 좋다면 좋은 거겠지.”

    에드가 드 체르민이라는 영화 감독 이자 작가의 유작, ‘모차르트의 산 책’은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을 그린 영화라고 한다.

    “연주 여행을 다닐 때 이야기래.”

    성장 드라마인가?

    모차르트의 어렸을 적 이야기는 꽤 유명한데,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그의 음악 세계관을 넓혀줄 중요한 경험이기도 했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목적지마다 귀족에게서 후원을 받아야 했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다 살아난 적도 있을 정도였다고 알고 있다.

    “오디션을 볼 거면 토하는 연기를 연습해.”

    “토? 왜?”

    “하루 종일 토했을걸?”

    “응?”

    당시를 어떻게 풀어낼지 조금 궁금 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꽤 여러 영화가 있다 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모차르트에 대해서도 나에 대 해서도 영화가 꽤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오늘은 이거 같이 보자.”

    최지훈이 영화 ‘아마데’의 DVD> 들곤 웃었다.

    1795년 빈. 여름이 다가올 때.

    “음. 괜찮군. 이걸 낼 때는 자네 이름 앞에 내 제자라는 걸 밝히는 게 더 좋겠어.”

    ‘이 영감탱이가 어젯밤에 뭘 잘못 먹었나.’

    악보도 대충 보는 인간이 내 첫 번째 피아노 3중주곡을 출판하기 전 노망난 소리를 해댔다.

    “싫습니다.”

    열을 받아 도저히 그 자리에 못 있을 것 같아 문을 박차고 나왔다.

    속을 달랠 겸 단골가게로 가 감미료가 든 와인을 마시는데 적잖이 취했을 때, 벗인 크라머가 내 앞에 앉았다.

    “오늘도 술인가, 루트비히?”

    “시끄럽고 잔이나 받게.”

    그의 잔을 채워주곤 잔을 들어올렸다. 한 모금 마신 뒤 크라머가 입을 열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들었네. 하이든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했다지?”

    “미친 소리지.”

    “큭큭큭큭. 자넨 그 험한 입이 문 제야. 거절하고 싶었다면 좋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나.”

    “좋게 말하긴. 이 내가 남의 이름을 빌릴 거라 생각했나? 그런 모욕을 듣고도 정중히 거절한 건 하이든 이기 때문이야. 다른 인간이었으면 당장에 주먹을 꽂아줬을걸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거장 중의 거장.

    안토니오 살리에리, 볼프강 모차르트와 함께 내 영혼을 충족시켰던 그 의 제자가 된 뒤로 나는 스승으로서 의 그에게 실망만 하게 되었다.

    악보조차 제대로 봐주지 않아 코멘트를 해준 적은 더욱 없었고, 기껏 한다는 말이 악보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 적으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더없이 존경하나 스승으로서의 그는 최악이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다가 내 곡을 비난하질 않나, 그런 주제에 내 연주를 듣곤 감탄을 하질 않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이든 선생의 그 고집스러운 트집과 이중적인 모 습이 뭔가 나를 위했던 것 같은 느 낌인데.

    갑작스레 떠오른 홍승일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반면 완벽한 스승이었다면 안토니오 살리에리.

    나뿐만이 아니라 당시 빈 음악가들 의 대부이자 은사였던 그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펼친 것은 물론.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교습비까 지 받지 않았었다.

    당시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자선 연주회를 열어 직장을 잃은 음악가 나 실력은 있되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들이 연주할 수 있게 돕는 것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인품을 가진.

    진정한 성인(聖人)이었다.

    그런데 최지훈과 함께 영화 ‘아마 데’를 볼수록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살리에리 선생 님에 대한 부정적 해석에 대해 몹시 불만을 가지고 그것을 삭이고 있는데 최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어땠어?”

    “안토니오 살리에리 선생님은 저런 사람이 아니야.”

    살리에리 선생님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탈리아식의 오페라나 교회 음악을 주로 다뤘다는 점.

    그가 만약 기악곡을 다뤘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위대함을 알았을 것이다.

    “응!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까. 최근에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대한 연구도 많이 되고 있대. 나도 따라 갈 수 없는 천재를 대하는 사람의 이야기라 생각해. 모차르트나 살리에리는 그냥 소재였을 뿐이고.”

    최지훈의 말에 조금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녀석이 ‘따라갈 수 없는 천재를 보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말하 자 기분이 묘했다.

    “근데 살리에리를 좋아했어?”

    “어?”

    “네가 예전 음악가 뒤에 선생님이라 부른 건 처음이잖아. 보통 그렇게 말하지도 않고.”

    눈치 빠른 녀석.

    “뭐.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이해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최지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실실 웃었다.

    나를 빤히 보면서 말이다.

    “왜?”

    “좋아서. 우리 이렇게 같이 노는 거 오랜만이잖아. 한국 와서는 처음 보는 거라구. 아, 다른 것도 볼래? 영원의 연인이란 영화도 있어 ”

    “영원의 연인?”

    뭔가 불안하다.

    “응.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에 대해 서 다룬 영화래. 엄청 유명해!”

    최지훈이 ‘영원의 연인’이란 타이 틀의 DVD를 들곤 말했다. 뭔가 엄청 오래된 듯한데 용케 가지고 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엄마가 가지고 있던 거야. 히힛.”

    환하게 웃는 최지훈을 보며, 녀석이 이 수집품을 보고 또 즐기는 행위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거라 생 각하니 가슴이 조금 먹먹해졌다.

    “무슨 생각해?”

    “ 별로.”

    “봐봐. 엄청 재밌겠지!”

    최지훈이 가리킨 곳에는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었는데, 내 장례식 뒤의 이야기란다.

    아니,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없다.

    또 무슨 해괴망측한 상상력으로 영화를 만들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와중에 표지에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이거 15세 이용가야. 보면 안 돼.”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애들은 이런 거 보면 안 돼. 봐.

    벌써 아홉 시야. 빨리 자자.”

    “치. 만날 곡 쓰면서 밤새우고 그러잖아. 보기 싫어?”

    남의 슬픈 이야기를 건드는 거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나는 대신 다른 영화를 찾았다.

    ‘안토니오 비발디’란 타이틀이다.

    사계를 작곡한 또 한 명의 천재.

    그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아는 것 이 많이 없었기에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실존한 인물을 다룬 영화라는 게 허구가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은 명심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건 어때?”

    “아, 응! 나도 이건 못 봤는데. 이건 2009년 영화야.”

    “그럼 이거 보자.”

    “그래.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팝콘도 가져올까?”

    "응."

    최지훈의 방에 혼자 남은 채 이번 추석 공연에는 살리에리 선생님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할까 생각했다.

    C장조는 정말 훌륭하니까.

    ‘하고 싶긴 한데 같이 연주할 사람들이 필요한데.’

    괜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아 독주를 하려 했으나 모처럼 선생님이 떠올랐으니 나 혼자만의 추 모식을 겸해,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위대함을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다.

    ‘히무라에게 부탁해야겠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지훈이 팝콘을 들곤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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