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30화
31. 10살, 부러진 의자(2)
저 멀리 유럽.
음악이 가장 화려하게 꽃 피웠던 곳에서 펼쳐진 배도빈의 연주를 듣고는 주먹을 쥐었다.
‘녀석.’
직접 듣지 못한 것이 죽기 전 마지막 아쉬움이 될까.
신에게 받은 재능을 유감없이 펼친 녀석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부활.
녀석의 첫 번째 곡을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음악의 신이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랜 시간 억압되어 있던 듯, 4살 먹은 아기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던 피아노 3 중주.
그 이후 발표한 곡 역시 음악사에 길이 남아, 천 년 뒤에도 연주될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지금도 배도빈 의 베스트를 꼽자면 초기, 그중에서 도 부활이 최고라 장담한다.
그 곡은 이 시대에 클래식이란 무 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듯했다.
동시에 답을 주기도 했다.
21세기의 클래식 음악이 잃었던 모습에 대해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잘 알려주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폐막일에 맞춰 연주했던 녀석의 즉홍곡은.
바로 그때 느꼈던 감성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이것이다.
이것이 배도빈의 진짜 모습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그간 배도빈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친구의 손자는 본래 위대했던 자신의 재능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본래의 음악성을 잊은 게 아 니었다.
녀석이 음악을 경험할수록 점차 본 래 가지고 있었던 ‘클래식함’을 잃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거늘.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어이 녀석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통해 자신의 옛 모습, 그러나 전보다 더욱 뛰어난 표 현력을 갖춘 채 본연의 모습으로 돌 아왔으며.
빈 필하모닉과의 협연에서 마침내 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은 듯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제야 한 시대를 종결한 음악가가 자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인지했으니 음악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기 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이 그 어린, 아홉 살 아이의 손으로부터 시작했으니.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아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이 부질없는 신체가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찬란히 빛나는 미래를 함께하지 못 한다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서 너무 나 애석한 일이다.
어릴 적 나를 설레게 해주었던 모 차르트, 베토벤, 쇼팽 그리고 드뷔 시.
이제 다시 배도빈.
위대한 음악가와 한 시대를 함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의 음악을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 하니 이 찬 공기의 새벽마저.
천천히 밝아오는 저 동쪽의 태양마저 원망스럽다.
며칠 뒤.
“아버님, 이제 학교는......
“네, 아버지. 뭔가 하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같이해요.”
한 달 전 쓰러지는 바람에 내 몸 상태에 대해 알게 된 아들 부부가 출근길을 말렸다.
“그럼 주희 데리고 여행이나 가자 꾸나. 가까운 곳으로.”
“네. 그렇게 해요.”
석 달.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가족과 함께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성장한 배도빈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일까.
그렇게 아들 녀석이 모는 차를 타 고 피아노 부실로 향했더니, 기특한 녀석이 왔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여전히 틱틱대면서도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생님, 선생님.”
“음?”
한 아이가 부르기에 눈을 뜨니 녀 석이 울먹이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무슨 일이냐. 왜 울어?”
“의자가 부러졌어요.”
아이가 가리킨 곳을 보자 피아노 의자가 부러져 있었다.
낡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부러진 건지 알 길이 없다만 우선은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이런. 어디 좀 보자.”
아이를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데 갑자기 넘어진 바람에 놀란 듯했다.
“아픈 곳은 없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자.”
“네.”
노을이 질 무렵 정리를 하고 있는 데 배도빈이 다가왔다.
“10월 4일에 연주회 해요.”
“오, 그래? 구성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서 뽑으려고요.”
단순히 알려주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녀석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
“함께 녹음했던 가우왕이랑 못 하 게 되었어요.”
그건 애석하게 되었다.
배도빈과의 경연 이후 가우왕의 연주는 무척 질감이 좋아졌는데, 그것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에서도 잘 드러났으니까.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한 명이 빠진다니 배도빈도 아깝게 생각하는 것 같다.
“히무라는 할아버지가 가장 잘해주 실거라 했어요.”
히무라 쇼우라면 일본의 유명 프로 듀서. 이 아이가 소속된 기획사의 대표인데, 확실히 보는 눈은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요?”
솔직하지 못하긴.
“끌끌. 그렇게 이 스승하고 함께 연주하고 싶었냐?”
웃으며 말하니 녀석이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냈다.
“그건 아닌데.”
배도빈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래서. 해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해주세요.”
이렇게 기쁠 수 있을까.
앞으로 음악을 새롭게 이끌 천재와의 협연이라니.
생에 마지막.
이 늙은 내가 그와 함께할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없는 최고의 선물 이다.
“좋다. 제자가 이렇게나 바라니 도와줘야겠지. 그래, 내일부터 당장 맞춰보자.”
도빈이를 돌려보낸 뒤 마지막으로 부실을 점검하고 돌아가려 할 때.
부러진 의자가 눈에 띄었다.
‘저기에 두면 애들이 다치지.’
그것을 들어다 한쪽에 옮겨 놓으려 하는데, 무슨 기분일까.
다리 하나만 바꿔 끼우면 다시 제 몫을 할 수 있을 텐데.
어떤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겉보 기에는 멀쩡한 이 의자가 안쓰러웠다.
‘주책이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자주 감상적이게 되는 것 같다.
다음 날 곧장 홍승일과 연주회 준 비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 반복해 들었던 것을 증명 이라도 하듯, 그만의 독특한 음색은 ‘태풍’과 ‘소나기’를 잘 표현했다.
가우왕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무슨 일 있나?’
그러나 그의 피아노가 묵직하게 가 슴을 울림에도 평소의 힘 있는 연주 가 아니다.
협주를 마치고 그에게 물었다.
“어디 아파요?”
내 말에 홍승일이 버럭 소리쳤다.
“아프긴! 자, 빨리 다시 한번 가자. 시간이 아까워.”
또. 걱정되어 물었더니 도리어 화를 내는데, 분명 뭔가 있을 거라 생 각했다.
“그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연주를 시 작한 홍승일은 한 음, 한 음을 너무 도 힘겹게 누르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평소보다 힘이 없다니.
그가 너무나 처절해 보여 연습을 그만하고 오늘은 쉬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저녁.
할아버지와 함께 외식을 하는데,
오랜만에 입맛이 도시는지 평소보다 식사를 잘하신다. 건강한 모습을 보 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나도 연근 조림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러고 보니 반찬 투정을 안 하는 구나.”
“맛있으니까요.”
“하하. 할아버지랑 입맛이 맞아 다 행이야. 종종 오자꾸나.”
나물을 된장에 무친 것도, 우엉조 림도 무말랭이도, 냉이라는 걸 넣어 끓인 된장찌개도 모두 훌륭하다.
속이 편안해지는 게 우리나라의 음 식은 몸에 친근한 느낌이다.
할아버지가 한식을 좋아하는 걸 보 면 이런 걸 드셔서 건강하신가 싶기 도 하다.
밥값이 엄청 비싸다는 것이 문제지 만 말이다.
“ 아.”
“음? 왜 그러느냐.”
“홍승일 할아버지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래? 평생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데. 늙더니 골골대는 모양이구 나.”
늙으면 몸 이곳저곳이 망가지기는
하지만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힘들어하더 라고요. 오늘 연주회 연습했는데 평 소랑 좀 달랐어요. 땀도 너무 많이 흘리고.”
“흐음. 젊을 때 몸을 그리 막 굴리 더니. 쯧쯧. 할아버지가 좋은 약 지 어서 보내주마.”
그렇게 답한 할아버지는 실장이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보약이란 것을 짓도록 말했고, 조만간 홍승일에 게 갈 테니 시간을 잡아 두라 일렀다.
집에 돌아온 뒤.
나는 모처럼 얻은 커피 머신과 커 피를 요리사에게 빼앗겨 우울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이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소팽의 야상곡을 틀어놓곤 바이올린으로 적당히 어울렸다.
‘추석에는 뭘 연주하지.’
10월 연주회만 생각하고 있어서 한지석 협회장과 약속한 추석 공연에는 무엇을 연주할까 고민해 본 적 이 없다.
피아노도 좋고 바이올린도 좋은데 뭔가 기왕이면 좀 더 그 자리에 어울리는 곡을 선정하고 싶기도 하다.
드르르르— 드르르르—
그렇게 고민하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확인 해 보니 최지훈이다.
전화를 받았다.
“왜?”
-완전! 완전 큰일이야!
최지훈이 호들갑을 떨면 보통 큰일 이 아니다. 뭔가 또 별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할 게 뻔해서 침대에 누운 채 녀석의 말을 기다렸다.
-지, 지, 지, 진정하고 들어야 해?
“너야말로 진정 좀 해.”
-에드가 드 체르민이 죽었대.
“……그게 누군데.”
-에드가 드 체르민을 몰라? 엄청! 어어엄청 유명한 영화감독이잖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다.
-아, 아무튼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에 재단을 하나 만드셨는데 모차르 트의 어렸을 적을 그린 영화의 대본을 완성하셨대. 엄청난 대작인가 봐.
“근데?”
-그 영화 오디션을 보는데 실제 어린 음악가를 뽑는다는 거야!
최지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으니까 드디어 본론을 꺼낸다.
-도빈이 네가 나가면 딱이잖아! 아니,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어. 이건 네 일이라구! 천재면서 독일어 도 잘하잖아! 아, 영어로 하려나. 여, 영어도 어떻게 하면 금방 될 거 야!
어떻게 하면 금방 될 거라니.
“난 음악가지 배우가 아니야.”
...응.
“그리고 모차르트도 아니야.”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지 꽤 되었건만 그 천재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모차르트 가 다시 태어난 거 아냐?’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보면서도 느꼈지 만, 어릴 때도. 지금의 어릴 때도 항상 내 곁에 따라붙는 이름.
그런 것을 나 스스로 뒤집어쓸 생 각은 추호도 없다.
-미안. 다들 네가 배역이 되면 좋을 거라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말해버렸어.
“신경 꺼. 요즘엔 뭐 해? 음악의
전당 아카데미는 재밌어?”
-히힛. 사실 선생님들한테 매일 칭 찬받아. 오늘은 드뷔시를 처음 배웠 는데 엄청 어렵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