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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26화 (12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26화

    29. 9살, 빈 필하모닉과 오보에(3)

    다음 날.

    연습이 10시부터라 거리 연주를 즐기기 위해 조금 일찍 나왔다.

    광장에는 음료를 마실 장소가 마련 되어 있어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거리의 악사 들이 내는 소리가 한데 어울렸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활기차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주변을 구경 하니 나도 저곳에 합류하고 싶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연주회 일정 좀 잡아주세요.”

    “그래야지. 앨범 내고 활동을 안 했으니까. 협연자가 구하는 게 좀 어렵겠지만.”

    “가우왕은요?”

    “연락해 봐야겠지만 그쪽도 일정은 바쁘니까. 아마 모든 연주회에 함께 하진 못할 거야.”

    가우왕이라면 툴툴대면서 와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면 대안을 고려해 봐야겠다.

    “남궁예건이나 최성신 같은 사람도 잘하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때?”

    “흐응.”

    최성신은 연주를 듣지 못해 알 수 없지만 남궁예건이라면 조금 아쉽다.

    그를 낮게 보는 건 아니지만 두 번째 앨범의 난이도는 단순히 기교의 문제가 아니니까.

    ♪♫♬♪♫♬

    ‘좋네.’

    가우왕의 대체자를 고민하는 와중 에 들린 오보에 소리. 구슬픈 소리가 귀에 꽂혔다.

    ‘누구지?’

    반주도 없이 오보에만을 연주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인데 실력이 썩 좋은 사람이라 집중하게 되었다.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시간을 두고 좀 더 고민해도 괜찮다고 봐.”

    히무라가 상념을 깼다.

    무심코 오보에 소리에 정신이 팔렸던 나도 본래 주제로 돌아와 히무라 에게 물었다.

    “최성신이란 사람은 어떤데요?”

    “남궁예건보다 조금 어려. 아직 발 전하고 있는 단계지만 스타성은 있어. 연주도 감각적으로 잘하고. 아무 래도 저번 쇼팽 콩쿠르 우승자니 까.”

    돌려서 말하지만 결국엔 내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시 가우왕이 와줬으면 하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오보에 연주가 너 무도 좋아 자꾸만 그쪽에 집중하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봤는데 보이지 않는다.

    “실은.”

    “아, 네.”

    “박건호 피아니스트가 좋다고 생각 해. 한국의 피아니스트라면 그분만 큼 훌륭한 사람도 드무니까.”

    히무라가 이어폰과 핸드폰을 꺼내 내게 넘겨주었다.

    내 피아노 소나타 7번 D장조다.

    현대 사람들은 잘 연주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의외였다. 연주도 깊이와 힘이 있다.

    “좋은데요?”

    “응. 베토벤 소나타하면 박건호 피아니스트니까. 뭐, 연락해 봐야 알겠지만 수락한다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거야. 네 곡을 연습해야 하니까.”

    확실히 다른 곡도 마찬가지지만 앨 범을 낸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장 연주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가우왕뿐이다.

    빨리 저들처럼 연주회를 열고 싶은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예전에 만들었던 소나타로 하는 것 도 즐겁겠지만 피아노 리사이틀은 처음이니 기왕이면 새로 만든 곡도 연주하고 싶다.

    “참, 홍 선생님은 어때?”

    싫다.

    “왜? 실력도 좋고 네 앨범 많이 들으시던 것 같은데.”

    이름을 들었을 때는 거부감이 들었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가우왕이 아 니라면 그만한 사람도 없었다.

    일정도 널널하고 실력도 뛰어나고 또 내 두 번째 앨범을 많이 들었으니 아무래도 연습할 기간이 많이 필 요하진 않을 거다.

    “가우왕이 안 된다고 하면 한번 물 어볼게요.”

    “그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데 맞은편 사람이 일어나면서 막혔던 시야가 트였는데, 청년이라 하기엔 아직 어린 남자가 오보에를 불고 있었다.

    마치 유령에 홀리듯 그 앞으로 향 했다.

    이 처연한 울림. 마치 대 자연의 품속에 남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곡과 그것을 훌륭히 표현하는 이 어린 오보이스트에게 푹 빠져 버렸다.

    ‘빈 오보에.’

    빈 필하모닉이 쓰는 것과 같은, 금속 키가 덜 부착되어 있는 빈 오보 에였는데, 손질을 정성 들여 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낡아 보였다.

    저 어린 나이에 저음역대도 훌륭히 소화하는, 게다가 상대적으로 불편 한 빈 오보에의 특징을 잘 살려내는 실력에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연주를 마쳤고 경의를 담아 박수를 보냈다.

    “멋진 연주였어요.”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목걸이형 지갑에서 10유로를 꺼내 동전이 담 긴 통 속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맙소사.”

    나를 본 거리의 오보이스트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더듬었다.

    “배, 배도빈. 배도빈이잖아! 말도 안 돼. 배도빈이 내 연주를 들었어!”

    그가 정신없이 폴짝폴짝 뛰다가 내 게 악수를 청했다.

    “마르코. 마르코 진이라 해요. 베를린 필에서 지휘한 신세계로부터 너 무 잘 들었어요.”

    열다섯? 어쩌면 그보다 어릴지도 모르는 마르코가 예전 일을 떠올리 게 했다.

    “찾아줘서 고마워요. 배도빈이라고 해요.”

    그가 청한 손을 기꺼이 쥐고 흔들었다.

    “아, 직접 가진 못했어요. 영상으로 들었거든요. 너무 아쉬웠지만.”

    나도 그도 씩 하고 웃었다.

    사실 그때 공연 티켓이 비싸기는 했다. 마르코 진의 오보에는 무척 고가의 것으로 보이지만 보통 여유 가 있지 않고서야 쉽게 찾을 수 없는 연주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무슨 곡이었어요?”

    “아, 미션이란 영화의 OST 예요. 가브리엘의 오보에라고.”

    기억해 둬야겠다.

    “도빈아, 미팅 시간이 다 되었는데.”

    이 사람의 연주를 좀 더 듣고 싶은데, 아쉽게 되었다.

    “매일 여기서 연주해요?”

    “네. 해가 질 때까지 해요.”

    “내일도 찾아올게요.”

    마르코는 힘차게 손을 흔들어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렇게 좋았어?”

    “네. 나이를 감안하지 않아도 능숙 했어요. 탐나는데.”

    쉬운 악기는 없다지만 어린 나이에 오보에를 저렇게 잘 다루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악기 관리도 무척이나 세밀한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오보에 연주자들은 무척 부지런해야 하는데, 용케 그걸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탐난다니 불안한데.”

    “뭐가요?”

    “또 투자한다고 할까 봐 그렇지. 미리 말하지만 네 수익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니나 양 학비만 해도 엄 청 들 거야.”

    “괜찮아요. 갚는다고 했어요.”

    “그녀가 뛰어난 건 알지만 수익을 내려면 적어도 음대를 졸업할 때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 내년 쇼팽 콩쿠르에 내보낼 생 각이었는데.”

    “쇼, 쇼팽? 벌써? 니나 양은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어. 레 퍼토리도 베토벤 소나타에 치우쳐져 있고.”

    “그러니까 음대에 보낸 거잖아요. 열심히 하라고 전해주세요.”

    내 말을 들은 히무라가 무척 황당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이 니나 케 베히리의 피아노에 감격할 거라 확 신한다.

    그녀는 분명 가까운 미래에 세계에 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다.

    “크리크 콩쿠르 때 타마 어쩌고가 제 라이벌이라고 떠들어댔잖아요.”

    “그랬지.”

    “전 그때 니나 케베히리가 제 라이 벌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뭐?”

    “그 정도는 되니까 투자했죠.”

    조금 황당해하는 히무라를 재촉해 빈 필하모닉이 기다리고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다음 날 좀 더 이른 시간에 광장으로 향하자 진 마르코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오렌지 스무 디를 대접했다.

    어제 한 차례 만난 덕분에 진 마 르코는 어제보다는 조금 차분해졌고 말도 편하게 했다.

    덕분에 꽤 개인적인 이야기도 화제 로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16살이라는 것과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에 들어가는 게 목표야.”

    “국립 오페라?”

    마르코가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덧붙였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 출신이시거든. 나도 꼭 그렇게 되어서 빈 필하모닉 수석 오보 에가 되는 게 꿈이야.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빈 필하모닉에 들어가려면 오스트 리아 국립 오페라에서 최소 3년 이 상 재직해야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꿈이 좋은데? 혹시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도 될까?”

    나를 대신해 히무라가 물었다.

    “지넨 마르코에요.”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 히무라를 보았는데,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아, 아니야. 훌륭한 오보이스트시 지.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구나.”

    히무라의 말에 진 마르코가 활짝 웃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진 마르코는 정말 오스트리아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과 빈 필하모닉의 광 팬이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가봤어?”

    고개를 저으니 마르코가 어제처럼 흥분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꼭 한 번 가봐야 해. 꼭! 한 번 가면 두 번 안 갈 수 없을걸? 그 웅장하고 멋진 건물만 봐도 너무 대 단해.”

    “그렇게나?”

    “응!”

    히무라가 웃으며 마르코의 말에 설 명을 더해주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극 장 중 하나지. 보통 빈과 파리,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 정도를 손꼽아서 유럽 3대 극장이라 해.”

    오페라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다.

    “진짜 멋있어. 천장에 도넛처럼 생 긴 샹들리에랑 층층이 있는 관중석. 그 앞에 있는 무대와 조명까지. 꼭 한 번 가봐. 엄청 싸.”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클래식 음악 은 여전히 꽤 많은 돈이 드는 문화 라고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앨범을 내기 전까지는 가 난해서 CD를 듣는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싸다고?”

    마르코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3유로!”

    “싸!”

    깜짝 놀라 소리쳤다.

    3유로라면 4,000원 정도다.

    그 돈으로는 일본에서 카레 한 그 릇도 못 사먹는데, 오페라 하나를 감상할 수 있다니.

    마르코가 싸다고 말할 만하다.

    “그치! 입석이긴 하지만.”

    “그게 어디야.”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마르코가 또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자랑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반주는 무려 빈 필이 직접 한다고. 꼭! 꼭 가야 해.”

    “……어?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이 아니고?”

    왜 빈 필이 오페라의 반주를 해주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하. 신기하지? 저번에 사카모토 선생님하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빈 필은 여러모로 독특한 곳이야.”

    “자세히 좀 말해봐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음……. 나도 외부자라 잘은 모르 지만 빈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면 빈 필에서 인턴처럼 연주를 배우게 돼.”

    인턴?

    “……쉽게요.”

    “견습? 연습생?”

    “ 아.”

    “응. 그렇게 빈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랑 빈 필은 밀접하게 연관되 어 있어. 빈 필이 매일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반주를 하지만, 그 연주자

    들은 빈 필의 연주자이기도,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소속이기도 해.”

    예전에 지니위즈 시리즈의 스토리를 설명해 줄 때도 느꼈지만 히무라는 뭔가를 설명하는 데 아주 재능이 없는 듯하다.

    하나도 모르겠다.

    “제일 중요한 건!”

    한국말로 대화하고 있던 나와 히무라 사이를 끼어든 마르코가 자랑스 레 말했다.

    “빈 필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라는 거야.”

    해맑게 웃는 녀석의 밝음은 마치

    최지훈을 보는 듯해서 무심코 웃고 말았다.

    “여기서 열심히 연주를 해서 모은 돈으로 대학도 가고 빈 필에 들 거야.”

    “응원할게.”

    그의 미래를 축복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연습 시간이 다 되어 마르코와 헤 어지고 연습실로 향하는 길에 히무라가 일본어로 ‘殊勝仁';b’라고 중얼 거렸다.

    “뭐가 기특해요?”

    “아, 마르코 말이야.”

    무슨 말인가 싶어 재촉했더니 히무라가 진 마르코의 낡은 오보에의 비 밀을 말해주었다.

    “진의 아버지 지넨 마르코라는 분 꽤 오래전에 돌아가셨거든. 빈 필하모닉의 부수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데 아들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

    “기특하네요.”

    부모를 잃었음에도 꿈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밝은 아이라니.

    정말 기특하다.

    “아, 안 돼. 더 이상의 투자는 안 된다고.”

    “누가 뭐래요?” 진 마르코.

    기억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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