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25화 (12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25화

    29. 9살, 빈 필하모닉과 오보에(2)

    ‘지휘자가 중요한 악단이 아니야.’

    이곳은 전통으로 움직인다.

    상임 지휘자가 없는 것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모든 연주자가 버릇 하나까지 통일 해 버렸으니 어떤 지휘자가 오든 이들의 특징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 했다.

    “다음은 모차르트. 5분 쉬고 시작 하겠네.”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한 빈 필이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호른 주자 등 몇몇이 자신의 연습이 끝나자 악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익숙한 느낌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사카모토가 물었다.

    정말 그런 느낌이긴 해서 어떻게 알았는지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 봤을 때는 고전 쪽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 시대를 좋아하니 그 랬을 거라 생각했지.”

    좋아하는 건 맞지만 사카모토를 처 음 만났을 때는 아직 후대 음악에 대해서 많이 접하지 못했던 시기다.

    ‘지금도 브루크너와 같은 훌륭한 음악가에 대해서 모르지만.’

    사카모토가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데에서 조금 기쁘기도 하면 서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좋은 것만 은 아니다.

    “자, 다들 준비하게. 도빈 군도 함께하지.”

    칼 에케르트의 인도를 받아 피아노 앞에 앉았다.

    4일 뒤 빈 필하모닉 공연에 앞서 나는 두 곡을 연주한다.

    하나는 크리크 결선 진출자의 자격으로 연주하게 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

    또 하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공연 마지막에 연주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모차르트의 고향이 아니랄까 봐 마 지막 날 공연은 모두 모차르트의 곡으로 도배가 된 모양이다.

    “우선 독주는 자유롭게 해보는 게 어떤가?”

    칼 에케르트가 물었다.

    그도 빈 필하모닉도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그들의 실력을 가늠했던 것처 럼 말이다.

    다들 나를 조금은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D 단조라니.

    너무나 즐겁지 않은가.

    “그렇게 할게요.”

    거부할 이유가 없다.

    ♪♫♬

    ♪♫♬

    빈 필하모닉이 연주를 시작했다.

    조용히 시작하는 도입부.

    조금씩 단계별로 고조되다가 관악 기의 강렬한 등장과 함께 곡이 시작 된다.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는 아름다운 선율이 사이사이에 배치된 현 악기의 돌줄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렇게 점차 잦아들다가 또다시 타 악기의 참여로 인해 고조되는 분위 기.

    모차르트의 곡 중에서도 가장 사랑 하는 D단조를 이렇게 훌륭한 연주 로 다시 듣다니.

    정말이지 기쁜 일이다.

    예전에 만들었던 곡을 그대로 연주 하는 것도 괜찮지만.

    실력을 보여줘야겠지.

    첫 독주 파트는 은은하고 간절하게.

    바이올린의 음이 흐드러질 때 건반을 눌렀다.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고 있던 히무라 쇼우는 조금 걱정되었다.

    자긍심이 강한, 나쁘게 말한다면 자신들을 제외하면 배척하는 빈 필 과 배도빈이 잘 어울릴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였다.

    배도빈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는 배도빈을 발굴한 장본인인 만큼 히무라는 그런 것을 걱정하진 않았다.

    다만 방금 빈 필의 지휘자 칼 에 케르트의 제안은 성급한 면이 있었다.

    저들도 배도빈이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뻔히 알고 있다.

    크리크 결선을 치르고 오늘까지 4 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D단 조, 독주 파트를 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카덴차 (cadenza).

    협주곡에 들어가는 독주 파트로 다른 악기가 연주를 멈추고 독주자의 역량을 과시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모차르트 본인이 즉흥 연주 의 대가였기에 이 독주 파트에 대해 서는 악보를 만들지 않고 그때마다 조금씩 연주가 달랐다는 점.

    물론 악보로도 D단조 협주곡의 독 주 파트가 있긴 하지만 매우 단순하 게 적힌, 그야말로 ‘공산품’된 버전 일 뿐이었다.

    현대 전문가들이 ‘즉흥 연주의 대 가 모차르트가 이렇게 단순하게 연주를 했다고? 말도 안 된다’라고 평 할 정도니까.

    아마 모차르트의 즉홍 연주를 악보 로 받아 적는 과정에서 단순화되었다는 게 중론인데.

    관중은 둘째 치고 배도빈이나 빈 필하모닉이 그런 악보를 연주함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히무라는 빈 필이 독주 파 트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던 배도빈을 골려주기 위해 저런 제안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걱정스레 한숨을 길게 내쉬니 사카모토 료이치가 웃 으며 히무라의 등을 툭툭 위로해 주었다.

    한편 사카모토 료이치는 히무라와 달리 배도빈이 이번에는 또 어떻게 자신을 놀라게 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빈 필하모닉의 의도는 뻔했다.

    배도빈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 피아니스트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뜸 독주 파트를 곧장 요구할 리가 없으니까.

    사실 이만한 위치의 음악가들이 협 연할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일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문제는 빈 필하모닉과 배도빈이 서로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어서 놀라게 해주게나.’

    그러나 사카모토 료이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빈 고전파라 불리는 세 명의 천재를 위시한 당시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에 관련해서.

    사카모토 료이치는 배도빈보다 나 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베토벤의 음악에 관련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깊이 가 남달랐는데, 모차르트 피아노 협 주곡 D단조는 베토벤이 가장 사랑 했던 곡 중 하나.

    특히 카덴차는 베토벤이 따로 작곡 해 놓았을 정도로 좋아했다.

    ♪♫♬

    ♪♫♬

    배도빈이 건반을 누르는 순간 연습 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 흐음.’

    피아노 독주를 위해 잠시 연주를 멈추었던 빈 필하모닉은 너무도 아 련하게 시작한 피아노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빈 필에서 배도빈의 음악을 들어보 지 않은 사람은 없다.

    뛰어난 작곡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연주는 다르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연주를 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연주를 자연스럽 게 흐름을 이어받아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프로의 세계에 서도 흔치 않다.

    비록 그가 제1회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당당히 만점을 받 아내며 우승했다고는 하지만.

    일대일 경연에서 가우왕을 꺾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흡입력 있는 연주를 할 줄은 몰랐다.

    오랜 시간 준비한 것도 아닌, 즉흥 연주로 말이다.

    ‘ 신기하군.’

    ‘어떻게 이런 연주가 가능한 거지?’ 천재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빈 필의 단원들 중 천재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고 불린 사람 이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에서 최 소 3년 이상 훈련을 거쳐야 빈 필하모닉 입단 심사를 받을 자격을 얻는다.

    그 심사를 통과해 다시 빈 필하모닉의 연주자로서의 훈련을 거친 것 이 이들이다.

    평균 연령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 인데 이들은 전통을 지키려는 정신으로 빈 고전파의 음악을 그 어떤 관현악단보다 완벽히 연주해 왔다.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최고 의 필하모닉이라 불리는 이유는 빈 필의 오래된 역사와 그 정신 그리고 평생을 다한 단원들 덕분이다.

    그런 그들이 배도빈의 연주에 감탄 한 것은, 단순히 뛰어난 연주자라서 가 아니었다.

    가우왕, 막심 에바로트 등 30대의 젊고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있지만 빈 필이 추구하는 ‘고전에 충실한 연주’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만) 여덟 살의 아이가 자신들이 바라던 스타일로 너무나 뛰어난 연주를 해내니,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그들로서는 너무나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배도빈의 첫 번째 독주 파트가 끝 나고 빈 필은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다.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다시 독주를 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빈 필은 자신 들이 원하던 피아니스트를 만난 듯 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빈 필하모닉이 추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빈 고전파의 음악을 이어 나가는 것.

    연주자들은 배도빈의 연주에서 그 어떠한 협연자들에게서도 느끼지 못 했던 빈 고전파의 향수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연주 자체의 솜씨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자신들이 지키려고 해왔던 전통의 가치를 알고 있는 저 어린 천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연주를 끝내자 칼 에케르트가 허탈 하게 웃었다.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대단한 연주였네.”

    그가 악수를 청해서 일단은 받았는데 그 뒤에 나이 지긋한 남자가 기 다렸다는 듯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고 하네. 빈 필 의 악장이지.”

    “반가워요.”

    “정말 훌륭한 연주였네.”

    은은한 미소를 보니 진심인 듯한데 사실 베를린 필에서 느꼈던 충족감 은 느끼지 못했다.

    현대의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했다는 기분이 아니라 마치 예전으로 돌 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던 탓인데.

    변화와 발전.

    빈 필은 변화도 발전도 없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분명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는 데 이견을 낼 수는 없지만, 나는 항상 좀 더 변화하고 더 나아가는 것을 추구한다.

    만일 내가 변하지 않았더라면 아직 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하 고 있었을 테니까.

    전통과 변화의 가치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빈 필과의 첫 번째 만남이 마무리되었다.

    연습실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최지훈이 펄쩍펄쩍 뛰며 호 들갑을 떨었다.

    “대단해! 엄청났어. 독주 파트 베토벤의 카덴차였지? 조금 달랐지 만!”

    “으”

    흐-

    “최고였어. 조금 걱정했는데 빈 필 도 놀란 모양이야. 도빈이 네 연주 듣고 놀란 걸 봤어야 했는데.”

    히무라도 최지훈도 빈 필도 만족하는 듯하다.

    “뭔가 흡족하지 않은 눈치로구만.”

    “어? 그랬어?”

    그러나 사카모토 료이치만은 내 기 분을 이해한 모양. 히무라가 내게 물었다.

    최지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 해 갸웃거리며 나와 사카모토와 히무라를 번갈아 보았다.

    “네. 조금.”

    “궁금하구만. 들려주겠나?”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빈 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악 단이에요. 다만 경직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조금 아쉬워요.”

    “하핫하! 이거 빈 필이 들었으면 큰일 날 말이었구만.”

    사카모토가 웃었다.

    “모든 악기가 같은 소리를 내니 뭐 랄까. 훌륭하면서도 작위적인 느낌 이 들었어요. 나쁜 건 아닌데 분명.”

    오케스트라는 여러 악기가 모인 하 나의 또 다른 악기.

    한 파트가 동일한 연주를 하는 건 분명 대단한 장점이다. 그런 것은 베를린이나 암스테르담도 못할 일이다.

    몇 년이나 똑같은 연주를 하기 위 해 노력한 사람들이 모인 빈 필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는 그것이 싫었다.

    사카모토 료이치가 씩 하고 웃었다. 빈 필에서 악장을 했던 그라서 내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 나쁜 것은 아니지. 도리어 대단한 일인데 취향이 갈릴 뿐이야. 하지만 나도 악기마다 조금씩 차이 가 나는 것도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 이라 생각하네.”

    나와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어떤 의미

    를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내 취향 은 아니었어. 그래서 나왔네.”

    사카모토가 빈 필을 떠났을 때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협연을 할 때는 다르지. 주인공은 자네일세. 어떤가. 4일 뒤 협연만큼은 빈 필을 잘 활용해 보는 것이.”

    “그럴 생각이에요.”

    사카모토와 마주보며 씩 웃었다.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나도 알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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