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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17화 (11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17화

    27. 9살, 크리크 국제 음악 콩쿠르(2)

    크리크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의 A, B조 예선이 끝나고 곧장 각 참가자들의 총 점수가 발표되었다.

    총 18명의 심사위원들이 한 선수 에게 줄 수 있는 점수는 0점에서 10점.

    이를 모두 합산하여 가장 큰 숫자를 얻은 참가자부터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심사표를 본 사카모토 료이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이야.’

    TL이란 이니셜과 Mr Do-bean Bae란 이름이 만나는 지점에는 숫 자 1이 적혀 있었다.

    “아, 사카모토.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군요.”

    누군가 심사위원실에 남은 사카모토 료이치를 불렀다.

    “오. 고생했네, 윈스턴.”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세계 최고 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유명한 미국 출신의 남자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뒤에 한잔하는 게.”

    “하하. 좋은 일이네만 늙어서 그런 지 술을 마시면 잠을 잘 못 자서 말이야.”

    “그거 아쉽군요. 그런데 왜 아 직……. 사카모토도 보셨군요.”

    "흠."

    보리스 윈스턴이 사카모토가 들고 있는 심사표를 보곤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해할 수 없는 판정입니다. 도요 토미 씨의 채점은.”

    “나도 같은 생각일세.”

    음악평론가로 유명한 도요토미 류 토는 음악계에서 꽤 잘 알려진 사람 이었다.

    비록 의혹을 남기고 교수직을 내려 놓았으나 한때는 산타마르크 대학 음대 피아노과 교수로도 역임한 전 력도 있었다.

    31개 나라의 클래식 음악 협회가 모여 창설된 ICMCOC에서도 심사

    위원 직을 의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다분히 비상식 적이었다.

    “지미도 황당해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사람이 심사위원으로 들어왔다 고. 혹시 일본 협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뻔하지. 자국인 밀어주기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하면 도리어 문제가 생길 텐데요.”

    “상임 이사국이니 아마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테지. 미련한 인간들.”

    ICMCOC에는 경제적, 환경적 인프라를 투자해 국제 클래식 음악 경 연 조직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한 나라가 있었다.

    독일, 프랑스, 일본, 중국.

    이 네 나라는 상임 이사국의 자격을 가지게 되고 ICMCOC의 여러 행사에 지원을 하는 대신 여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제1회는 역사적 상징으로 오스트리 아 빈에서 개최했지만 2년에 한 번 개최하는 ‘크리크’를 상임 이사국에 서 여는 권리가 그 첫 번째였으며.

    두 번째는 해당 조직위원회에 어떠 한 안건이 생겼을 때 상임 이사국

    모두의 찬성해야만 진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상식 밖의 인간이군요. 그런 와중에 총점 1위를 한 배도빈도 대 단하지만.”

    “껄껄껄.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야. 도빈 군이 가장 먼저 연주 했더라면 차이가 더 벌어졌을 걸세. 안 그런가?”

    보리스 윈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테죠. 보통 이 정도 클래스면 첫 연주자를 기준으로 상대 평 가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카모토 료이치와 보리스 윈스턴의 대화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국제 규모의 콩쿠르의 경우에도 채 점 기준이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정 확성에 있어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는 이상 대부분 비슷하다.

    50분 가까이 되는 프로그램을 연주하면서 미스는 날 수밖에 없지만 그래봐야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며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음악성을 지닌 연주를 하는가에 주목해야 했다.

    곡 해석을 기반으로 한 표현력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교 모두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스레 상대 평가처 럼 될 수밖에 없는데 그 기준이 첫 번째 연주자였다.

    크리크 피아노 부문 A조 첫 연주 자는 러시아 예선 우승자인 엘리자 베타 툭타미셰바.

    17세의 피아니스트로 벨로시티 (velocity: 건반을 누르는 속도)가 빠른 재녀였다.

    그녀가 18명의 심사위원들에게서 받은 총 점수는 144점. 평균 8.0.

    첫 주자에게는 점수를 인색하게 줌에도 엄청난 고득점이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에게 너무 점수를 많이 줘버렸어. 너무나 훌륭 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야.”

    “그러니 배도빈에게 만점을 줄 수 밖에 없었죠.”

    “후후.”

    사카모토 료이치가 심사표를 내려 다보았다.

    18명의 심사위원 이니셜 아래 배도빈의 점수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10점.

    총점 1기점이었다.

    “본선에서는 좀 더 심사기준을 강 화해야겠습니다. 내일 오전 회의 때 안건으로 내보죠.”

    “그래야겠지.”

    기준이 배도빈에게 맞춰진다면 아 마 다른 참가자들은 점수를 받기 더 욱 어려워질 것이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인터넷에서 소 수 네티즌이 배도빈을 향해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하는 것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참. 아직 심사표 발표는 안 된 모 양이더군요. 점수만 공개되고.”

    보리스 윈스턴이 심사표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아마 발표도 하지 않으려고 할 수 도 있겠지.”

    “예? 하지만 그건 이 콩쿠르의 가 치를 스스로 버리는 일입니다. 아무 리 상임 이사국이라 해도 그런 일을 한다면 전 더 이상 심사위원으로 남 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 네?”

    햇볕을 즐기며 엎드려 있던 호랑 이, 사카모토 료이치가 움직이기 시 작했다.

    “도빈아! 네가 예선 1등이야!”

    최지훈이 와다닥 뛰어들어서 나를 끌어안았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체격이 나보다 큰 녀석이 이러니 중심을 잃고 넘어 지고 말았다.

    “떠, 떨어져.”

    “안 기뻐? 엄청 대단하잖아!”

    “당연한 일이잖아. 뭐가 기쁜데.”

    내가 1등이 아니면 누가 1등이란 말인가.

    별일 아닌 걸로 호들갑이다.

    “얘들아 그러다 다쳐.”

    어머니께서 놀라 다가온 뒤 나와 최지훈의 옷을 털어주셨다.

    “어머니, 도빈이 진짜 대단해요!

    1기점이나 받았어요. 1기점!”

    “어머니?”

    왜 내 어머니를 그리 부르는지 묻 자 최지훈이 조금 당황했다.

    “아.”

    “그래? 우리 아들 대단하네? 어디, 이쪽 아들은?”

    어머니께서는 그런 최지훈의 얼굴을 어루만지시며 상냥하게 물으셨다.

    “네, 네! 저도 예선 통과했어요!”

    “어이구, 우리 아들 장하다.”

    어머니께서 최지훈을 꼭 끌어안고 내게 해주시듯이 등을 토닥이셨다.

    ‘떨어져, 인마.’

    쑥스러워하면서도 배시시 웃는 최지훈이 밉지는 않지만 뭔가 묘한 감 정이 들었다.

    ‘그나저나 왜 1기점이야?’

    당연히 180점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점수가 짜다.

    “도빈아, 고생했어. 오늘은 카레 먹을까?”

    최지훈을 달래주신 뒤 내 손을 꼭 쥐신 어머니의 눈은 기특함으로 가 득했다.

    굳이 표현은 하지 않으셔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 것 같아서 최지훈을 용서해 줄 수 있었다.

    “치킨이랑 프랑크푸르터도 얹어서요.”

    잠시 고민하시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축하해 줄 날이니까. 대신 오늘만이야?”

    카레에 치킨과 프랑크푸르터(Frank furter: 프랑크푸르트소시지)를 함께 먹을 수 있다니.

    최근 한 달 중에 가장 기쁜 날이다.

    어머니와 함께 히무라, 최지훈 그 리고 그의 집사를 대동하고 근처 카레집을 찾았다.

    “우와.”

    “많이들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도빈아, 나 이런 음식 처음이야.”

    “나도 이렇게 호화로운 카레는 처 음이야.”

    “으음! 이 소시지 너무 맛있다. 집 사님, 집사님도 드셔보세요.”

    “허허. 도련님도 많이 드세요.”

    한국과 일본 카레도 맛있지만 유럽 에서 먹는 인도식 커리도 풍미가 상 당히 깊은 것이 흡족스럽다.

    음식을 먹는데 히무라가 반가운 이 야기를 들려주었다.

    “니나 케베리히랑 계약하기로 했어.”

    “정말요?”

    “니나라면……. 도빈아, 저번에 봤던 그 사람이니?”

    “ 네.”

    “진희 씨도 보셨군요. 도빈이가 추 천해서 만나봤는데 정말 훌륭한 재 원이더라고요. 샛별 엔터테인먼트에 서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피아노 솜씨가 정말 좋던데 좋은 일이네요.”

    “네. 계약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어머니도 함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게 좋을 테니 이따 방으로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최지훈과 집사 할아버지 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 히무라가 어머니께 내가 한 말을 전해드렸다.

    내가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투자자 로서 니나 케베리히를 육성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도빈아, 정말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거야?”

    “네.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개성 있는 피아니스트였어요.”

    “그렇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잖니. 좀 더 알아본 뒤에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확실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다행히 히무라가 요 며칠간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뒤였다.

    생각해 보니 히무라가 상대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계약을 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선 직업은 없고 간간이 아르바 이트를 하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18살이고 중등과정까지는 마쳤더라고요.”

    “그럼 의무교육은 마친 거네요?”

    “네. 15살부터 학교에 다니진 않았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어 생계 수단이 없었거든요.”

    “아……

    어머니께서 안타깝게 탄식하셨다.

    “피아노는요?”

    “피아노는 독학으로 배운 모양이 야. 본인이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라 알려주더라고.”

    스승이 없다니.

    납득이 되면서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독특한 개성을 생각하면 누 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에 가능 했던 일이란 생각이 들지만.

    또 이끌어 주는 사람 없이 홀로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데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은 산타마르크 대학에서 청강을 했대.”

    “청강?”

    오랜만에 모르는 단어가 나와 되묻자 어머니께서 설명해 주셨다.

    “정식 학생은 아니고 강의를 듣는 학생을 청강생이라 해.”

    아•. Gasthörer.

    나도 본 대학에서 여러 인문학 강의를 청강했었다.

    내가 이해한 듯 보였는지 히무라가 계속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음대에서는 뭘 배우나 너무 궁금 했대. 돈이 없어서 당시 산타마르크 피아노과 교수에게 부탁해서 한 학 기 청강을 했다고 하네.”

    고작 한 학기로 도움이 되었을 리 가 없다.

    “왜 한 학기만 있었대요?”

    “그건 말해주지 않더라고. 아마 생 계가 어려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 기가 원하던 환경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뭐, 한 학기 듣고 만족했을 수도 있고.”

    “찰스 브라움이랑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그건 좀 황당하더라고. 찰스 브라움 소속사에 아는 사람이 있어 물었는데 정말 현지에서 피아노 반주할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우연 히 그 건물 주인이 소개를 해준 모 양이야. 아, 찰스 브라움도 그녀에게 반주자 역할을 할지 물어봤었대.”

    확실히 그만한 실력이라면 어떤 바이올리니스트라도 탐이 날 것이다. 특히나 솔로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반주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고민하고 있대요?”

    “아니. 거절했대. 사람이 별로라서 같이 다니면 불편할 것 같다고.”

    “하하하하!”

    정말 통쾌한 말이라 웃고 말았다.

    그녀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으니 나는 더욱 니나 케베리히를 돕고 싶어 졌다.

    내 후손이기도 하지만 이대로 묻히 기엔 그녀의 재능이 너무나 아까웠 기 때문이었다.

    “엄마, 이 사람 정말 훌륭한 음악 가가 될 거예요.”

    “그래. 들어보니 열심히 사는 사람 같네. 히무라 씨가 잘 좀 봐주세요.”

    “그럼요. 도빈이 돈인데 허투루 쓸 순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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