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13화
26. 9살, 라이벌(2)
다시 찾은 빈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30년을 넘게 살았던 터라 조금은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 혀 그러지 못했다.
“도빈아, 이쪽으로.”
“호텔까지는 택시로 가요?”
“리무진이 있지. 돈 좀 썼다고.”
크리크에 참가하기 위해 히무라와 함께 빈을 방문했다.
빈 국제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동 안 창밖으로 현대의 빈을 잠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간 다녔던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정돈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착했으려나.’
칸토에서 준우승을 한 최지훈이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졌다.
‘정말 축하해!’
‘하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거야.’
‘꼭 같이 크리크 결선에 오르자!’
시상식장에서 웃으며 축하하고 다 음 무대에서도 함께하자고 했던 최지훈.
시상식이 모두 끝나고 나비넥타이를 가지러 대기실로 돌아갔을 때 녀 석은 집사 할아버지의 품에서 오열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내 우승을 축하한 마음도.
지난 몇 달간의 노력으로도 우승하 지 못했다는 분함도 모두 진심일 것 이다.
내가 생각해도 최지훈은 고등학생 사이에서도 가장 빛날 정도로 훌륭 한 연주를 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몰아붙였을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녀석의 목표가 될수록 녀석이 나를 언제까지 친구로 대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씁쓸함을 느낀다.
그렇게 쉬운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소중했던 관계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던 탓이다.
“도착했다.”
그렇게 사색에 잠겨 있을 때 리무진이 호텔 앞에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자 직원이 다가와 히무라에게서 짐을 받아들었다.
은색 외벽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정돈된 타일과 상아색 내부가 눈앞 에 펼쳐졌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 조가 로비를 채우고 있는데 꽤나 고 풍스러운 취향이다.
“돈 좀 썼나 봐요.”
“그러게. 여기서 보름 정도는 지낼 만하겠는데?”
ICMCOC에서 참가자들에게 제공 한 숙소는 꽤 괜찮은 호텔이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크리크 참가자입니다. 배도빈이라고.”
“어머.”
프론트 데스크에 있던 여성이 감탄 사를 뱉더니 살짝 상체를 숙여 나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눈을 마주쳐 인사를 했더니 밝게 웃는다.
“빈에 오신 걸 환영해오, 마에스트로”
“고마워요.”
그녀가 히무라에게 카드키를 건네 주었다.
“1108호입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 시기 바랍니다.”
기분 좋게 방에 들어섰다.
역시나 만족스럽다. 푹신한 카펫과 은은한 방 분위기가 휴식을 취하기 에는 더할 나위 없다.
“개회식은 7시니까 여유가 좀 있어. 피곤할 텐데 씻고 쉬자.”
“네.”
대충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적당히 TV를 틀고 침대에 누운 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셨다는 듯 금방 전화를 받으셨다.
-잘 도착했니?
“네. 숙소에 있어요. 엄마도 잘 도 착하셨어요?”
-응. 짐 정리하고 우리 아들 연락 기다리고 있었지?
올해 가을부터 루턴 대학에서 교수 가 되실 아버지는 적응을 위해 하루 먼저 영국으로 향하셨다.
외할아버지와 같이 살기로 하고 두 분과 잠시 떨어져 있기로 결정했는 데 그 날이 다가온 것이다.
조금 아쉽지만 이게 옳은 일이라 생각한다.
-양치는 했어? 잇몸이랑 해서 훑 어내듯 해야 해.
“그럼요.”
-손도 씻었고? 세수할 땐 귀 뒤도 잘 씻어야 해. 로션도 꼭 바르고.
어머니께서는 내게 이는 잘 닦았는 지, 손은 잘 씻었는지 사소한 일을 물어보셨다.
너무 어리게 보시는 것 같지만 어 린 아들과 떨어져 있다는 데에 걱정 하고 계시기에 웃으며 그렇게 했다 고 대답했다.
-예선은 모레라고 했지?
“네.”
-응원하러 갈게. 아빠는 조금 바쁘 셔서 못 갈 것 같지만 빨리 정리하 고 도빈이 응원하고 싶대.
“우승할 테니 그때까지 시간 많아요. 천천히 오셔도 돼요.”
-으이구. 그래. 우리 아들이 우승 안 하면 누가 하겠어? 파이팅!
“파이팅.”
지금은 영국에 계실 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최지훈에게 메시지를 보 냈다.
[도착했어?]
[응! 너는?]
‘왜 항상 답장이 빠른 거야?’
신기한 녀석이다.
[나도. 1108호야.]
[같은 층이네? 놀러 갈게!]
[졸려. 이따 저녁에 개최식도 있잖아. 그때 봐.]
[힝 -rr-rr 비행기에서 안 잤어?]
[비행기 안에서 어떻게 잠을 자.]
[그냥 자게 되던데. 왜 못 자?]
[떨어지면 죽잖아.]
한동안 답장이 없다가 ‘그럼 저녁 에 봐’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할 말이 딱히 없었나 보다.
자고 일어나자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사교복을 입고 히무라와 함께 크리 크 개최식이 예정된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너무 많은데.’
예상은 했지만 사람이 가득했다.
히무라가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크리크’를 주최한 ICMCOC에 가 입한 나라는 총 17곳.
17개 나라에서 진행한 피아노 부 문 지역 예선에서만 두 명씩 올라왔으니 34명의 참가자가 있을 테고.
현악 4부 역시 같은지라 크리크 국제 음악 콩쿠르의 참가자들만 170명이다.
거기에 ICMCOC 소속의 진행위원 들과 기자 그리고 초청된 유명 인사 들까지 족히 300명은 넘어 보였다.
“도빈아!”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최지훈이 반갑게 달려왔다. 그와 그의 집사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사람 엄청 많다.”
“그러게.”
충분히 자고 왔음에도 벌써부터 피 로해지기 시작했다.
“도빈아, 저 자리인가 보다.”
히무라가 가리킨 곳을 보자 작은 태극기와 내 이름이 적혀 있는 테이 블이 있었다. 최지훈의 이름도 적혀 있다.
출전자 좌석은 따로 배정한 모양인 지라 히무라와 집사 할아버지는 내 빈석으로 향했다.
나와 최지훈만 덩그러니 지정된 좌 석에 앉았다.
“엄청 떨린다.”
“개최식일 뿐이잖아.”
“그래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랑 콩쿠르에서 계속 볼 사람들이잖아.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굳이 그래야 해?”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좋잖아?”
“그건 그러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사 회자가 정면에 마련된 무대 위에 모 습을 드러냈다.
상투적인 인사말 뒤에 제1회 크리 크 세계 음악 콩쿠르의 취지와 목적 그리고 참가자들에 대한 응원을 남 기곤 식순을 진행하는 모양이다.
실은 영어로 말해서 최지훈이 중간 중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많고 정신없고 말은 이해할 수 없어 매우 지루하다.
“아, 축하 연주를 시작한대.”
“다행이다.”
그나마 이 지루함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피아노의 황태자라 불리죠. 박수 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우왕 입니다.”
사회자와 함께 무대로 오른 사람은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가우왕, 가우왕이야.”
호들갑을 떠는 최지훈과 마찬가지 로 어린 참가자들은 가우왕을 보곤 잠시 웅성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라는 게 사실인가 보다.
‘더 늘었네.’
경연 이후 두 번째 앨범 녹음을 했을 때보다 조금 더 다듬어진 느낌 이다.
본인의 단점을 인식한 순간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니, 그 역시 천재임은 분명하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거장의 반열에 들어 나와 비교를 해도 누가 더 우 위에 있는지는 그저 듣는 사람의 취 향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가 대표곡 페트루슈카의 연주를 마쳤고 라운지에 박수 소리가 가득 했다.
카메라 셔터도 요란히 들린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치!”
“응. 좋은 연주였어.”
가우왕이 연주를 하기 전보다 더욱 호들갑을 떠는 최지훈에게 맞장구를 쳐주는데 가우왕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툭툭대는 말투로 ‘어떠냐, 꼬맹 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제법이네, 젊은이’라고 되받아쳐주고 싶어졌다.
“다음은 바이올린의 귀공자, 찰스 브라움의 축하 연주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참가자들을 위해 파 이어버드로 연주를 하시겠다고 하네요.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래?”
“찰스 브라움이 파이어버드로 연주를 해준대.”
“ 아.”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
예전에 나를 도발했던 놈이다.
이윽고 무대 위에 느끼하게 생긴 남자가 올라왔다. 버터를 뒤집어쓴 것처럼 생긴 밥맛이다.
“저 사람 너한테 욕했었지?”
“욕은 아니지만.”
그가 파이어버드를 어깨에 받쳤다.
반주를 해줄 피아니스트와 시선을 교환한 뒤 연주를 시작했는데, 찰스 브라움과 바이어버드의 조화는 놀라 운 수준이었다.
브람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천재 음악가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스케르초.
그 대담한 전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묘한 조화를 균형을 이루면서 연주되었는데.
내 이목을 끈 것은 건방진 후배 음악가가 아니라 반주자였다.
‘누구지?’
젊다기보다는 어린 여성 피아니스트는 나를 홀리고 말았다. 저만한 실력이라면 미카엘 블레하츠나 가우왕만큼 유명할 텐데.
저렇게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었다니, 역시 세계는 넓다.
‘……멋진데.’
반주를 해주면서 이렇게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백조 가 나는 광경을 보는 듯하다. 우아 하며 품격이 있는 음색의 연주다.
축하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와중에 최지훈에게 물었다.
“피아노 누구야?”
“글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최지훈도 모르는 사람인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찰스 브라움보 다 먼저 무대에서 내려간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ICMCOC로부터 어린애들 장난을 축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땐 거절하려 했건만.
배도빈이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이렇게 무대 위에 서게 되었다.
내가 연주하는 파이어버드를 들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이만하면 너도 내게 관심이 생기겠지.’
가우왕과의 경연이 그런 식이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배도빈이 내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배도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연주를 마치고 녀석을 뚫어져라 보았지만 단 한순간도 나를 보지 않았다.
‘정말 열받게 하는 꼬마라니까.’
가우왕은 적수고 나는 관심도 없다는 뜻이냐.
‘두고 보자.’
그럴수록 녀석의 관심을 더욱 끌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