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10화
25. 9살, 지역 예선 종료(2)
“박건호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셨구나.” 인상적인 남자를 보고 있자니 최지훈이 화면을 보고 입을 열었다.
“박건호?”
“응. 지금은 한국에 계시지만 예전 엔 유럽에서 활동하셨어. 엄청 유명해. 정말 멋진 연주를 하셔서 나도 좋아하고.”
최지훈이 저런 말을 한다면 이미 세계적인 음악가일 터.
줄곧 일본이나 유럽, 미국에서 활 동한 탓에 한국의 음악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는데 이럴 때마다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이 좁은 땅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천재들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이승희는 내가 아는 첼리스트 중 가장 특출하며 홍 승일의 경우에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카엘 블레하츠보다도 연주에 깊이가 있다.
남궁예건과 최성신이란 젊은 사람 도 노력하고 있으니 홍승일의 말처 럼,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계가 그 리 암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차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지훈의 차례가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여 응원을 해주니 각오를 다지곤 무대 위로 향했다.
“최지훈이 네?”
그때 예상대로 뒷담화가 나왔다.
“9살? 10살? 어린데 용케 본선에 올라왔네.”
“쟤 아빠가 EI전자 사장이잖아. 뭔가 있겠지.”
멍청한 놈들.
저런 말을 해봐야 이 콩쿠르의 격을 낮출 뿐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대회에 나온 본인에게도 침을 뱉는 행위라는 걸 왜 모르는지 멍청한 놈들의 머리는 이해할 수 없다.
잠시 뒤.
모니터로 최지훈을 볼 수 있었다.
숙연히 인사를 올린 뒤 피아노 앞 에 앉은 녀석은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연주를 시작했다.
‘이건.’
피아노 소나타 F올림장조 1악장.
테레제에게 헌정했던 곡이다.
‘좋은 선택이야.’
이 곡을 만들 때는 이미 내 독자 적인 작곡법이 확립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도입부 아다지오 칸타빌레의 경우에는 T)#음을 강조하기 위 해 반감7화음을 사용했는데, 당시까 지는 화성을 그렇게 활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나.
경과부에서 감 화음과 스포르잔도(sforzando: 특히 세게)를 함께 쓴 것도 내가 즐겨 쓰던 방법인 점 등 여러모로 내게 솔직했던 곡이다.
모든 곡이 그러하지만 특히 이 곡은 ‘나다움’을 가감 없이 담은 곡이 라 애정이 깊은데, 화려함보다는 진 실 된 감정을 녹이는 데 힘썼던 기 억이 떠오른다.
사랑하던 사람을 떠올리며 쓴 곡이니 말이다.
♪♫♬
♪♫♬
F올림장조를 듣고 있자니 테레제 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요세피네와 테레제.
브룬스비크 가문과는 참 여러 일이 있었다. 그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이제 과거일 뿐.
깊게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잘하는데?”
“그러게……. 테레제가 이렇게 좋았나?”
멍청한 놈들이 작게 감탄한 덕분에 사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귀마저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
예전 빈에서도 지금도 사람들은 C 올림단조(월광)에 열광하는데 그 때문에 다른 소나타가 조명을 못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C올림단조든 F올림장조든 모두 한 때 사랑했던 이에게 헌정한 곡인만큼 내 감정을 최대한 진실되고 아름 답게 전하려 했는데 이 곡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최지훈의 연주는 악보에 충실했다.
미묘하게 박자를 놓친 부분이 두 곳 있었지만 본선에서 들은 연주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 있었다.
최지훈이 아마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좀 더 자신의 것으로 연주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지금은 저만큼이나 연주했다는 것 에 칭찬을 해줘야 할 듯하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왜 같은 걸 선택한 거야.’
F올림장조를 연주한 뒤 잠시 끊었다가 쇼팽의 에튀드 흑건을 연주하 기 시작한 최지훈을 보며 입을 다셨다.
세계적 규모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음악 콩쿠르가 열린다고 하기 에 한지석 협회장의 부탁으로 심사 위원을 맡았는데.
정말 엄격한 기준으로 예선을 통과 한 아이들이 맞는지 의심되었다.
‘ 엉망이구만.’
무슨 생각으로 저런 연주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데 가관인 것은 심 사위원들도 마찬가지.
미스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어이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괜찮은 아이가 올라왔다.
최지훈이라고 했던가.
‘ 과연.’
작년 초등학교 저학년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라 하기에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연주를 했다.
베토벤의 F올림장조를 선택했다는 마음가짐도 훌륭하다.
인기가 없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한국에서는 연주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 곡의 진가를 몰라 아쉬울 뿐이다.
악보에 충실하여 박자가 미묘하게 틀린 부분이 ‘한 곳’이 있는 걸 제외하면 미스가 없다.
슬쩍 옆을 보니 다들 올 클리어라 적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심사위원이 라니, 한심할 지경이다.
최지훈이라는 아이에게 아쉬운 점 이 있다면 음계와 음표에는 충실하 지만 이 곡을 훌륭히 연주할 때 필 요한 ‘경험’이 적다는 것.
베토벤의 F올림장조는 해석의 여 지가 많다.
복잡한 악보를 정확히 연주하는 것 도 저 나이 때에는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심사 기준으로 따졌을 때는 미묘하게 박자가 늦어진 ‘한 부분’ 에서만 감점.
99점을 주었다.
‘ 다음은.’
드디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낸 배도빈이다.
사실 심사위원직을 맡은 가장 큰 이유는 배도빈이 참가할 거라 생각 했기 때문인데 역시나.
내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나온 모양이다.
‘참가곡은…… 이런. 똑같군.’
베토벤 소나타 F올림장조와 슈베르 트의 즉홍곡 D.899 no. 1부터 no. 3까지.
‘네 곡이라.’
다른 참가자였다면 욕심이 아닐까 생각할 테지만 이미 그의 연주는 여 러 번 반복해 들었기에 눈을 감고 귀를 열었다.
♪♫♬
♪♫♬
‘ 아아.’
이 무슨 울림이란 말인가.
분명 특별한 시도는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악보에 충실한 연주이건만, 다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전곡을 모두 연주하여 앨범으로 냈던 만큼 내게 있어서 베토벤은 특별하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음악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래서 베토벤의 소나타에 대한 이 해만큼은 세계 그 누구를 상대로도 자신이 있었건만.
배도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F 올림장조는 가장 베토벤스러운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했다.
빠른 연주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 움과 복잡함 속에 드러나는 솔직함.
이것이다.
이것이 베토벤이다.
최지훈은 자기 뒤에 곧장 무대로 올라간 친구를 보며 침을 삼켰다.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본인처럼 최선을 다할까.
지난 시간을 모두 저 자리에서 최고의 연주를 하기 위해 바쳤다. 밥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피아노만을 붙들고 있었다.
완벽한 연주를 하기 위해서.
배도빈과 친구로 남기 위해서 말이다.
‘뒤처져서는 친구조차 못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냔 말이다!’
아버지 최우철은 항상 무서운 말을 했지만 최지훈은 아버지의 말이라면 모두 따랐다. 믿었다.
그러나 그 말만큼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사력을 다해 연습했다.
자신을 이해하고 천재가 아니라는 비밀을 알고도 평범하게 대해주는 배도빈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배도빈에 증명하고 싶었다.
네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고.
그 어린 마음이 전해졌던 것일까.
친구 배도빈은 최지훈을 이미 어엿한 피아니스트라고 해주었다.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아버지 앞 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도빈은 최지훈에게 친구이자 선 생이자 영웅이었다.
‘잘해야 해!’
연주를 마치고 내려가자 최지훈이 달려들었다.
“최고야! 너무 멋졌어!”
“당연한 말을.”
“헤헤헤헤.”
녀석이 너무 밝게 웃어 나도 피식 웃었다.
같은 곡을 그것도 바로 뒤에 연주 했으면 신경 쓸 법도 한데 그런 기 색 하나 없이 순수하게 기뻐해 주는 걸 보면 어린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속이 깊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부디 이 맑은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너도 잘했어. 틀린 게 두 곳밖에 없더라.”
“어? 어떻게 알았어?”
“모를 리가.”
최지훈은 신기한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실은 한 곳은 틀렸는데 다른 곳은 조금 박자가 틀렸나? 싶었을 뿐이었거든.”
“응. 조금 늦었어.”
“나도 헷갈렸는데 대단하다. 심사 위원들이 알았을까?”
“모르면 안 되지.”
“히잉. 망했어.”
최지훈의 입꼬리가 잔뜩 내려갔다.
“나 말고는 네가 제일 잘했어. 걱정 마.”
“정말?”
“응. 다들 엉망이네. 너도 무대 위라고 긴장하지 마. 평소에는 실수 없었다며.”
“그건 어쩔 수 없잖아.”
“관객이 있잖아. 혼자 연습할 때보다 잘 쳐야지.”
“그런 마음 때문에 긴장되는 거라고.”
“그래서 더 신나는 게 아니고?”
“어? 그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도 응 원을 오신 부모님과 채은이를 만나 려 로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