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08화
24. 9살, 첫 콩쿠르(4)
크리크 지역 예선의 피아노 부문, 그러니까 6월 전국 학생 피아노 콩쿠르(칸토)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고 하자 최지훈은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한 번 김이 새긴 했지만 각오를 다진 녀석을 보며 나도 최선을 다하
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할 수 있었다.
“이 녀석아, 변주는 대체 왜 넣는 거야!”
“이게 더 듣기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
전국 학생 피아노 콩쿠르의 1차 예선은 3월 22일(토)과 23일(일)에 나눠서 치러지는데 과제 곡은 하나였다.
쇼팽의 에튀드 C단조 Op. 10 No. 1.
화음의 폭이 넓어 몸을 잘 움직여 야 하는데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지 만 조금은 성장한 몸과 기술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데.
8세부터 19세까지의 학생들이 완 벽히 연주하기에는 제법 난이도가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변주를 하면 감점 요인이라 그러네! 말 좀 들어라!”
“……알겠어요.”
거참 재미없는 연주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훌륭한 연주겠지만 그래서는 어느 지점을 뛰어넘은 피아니스트들 이 모두 같은 연주를 하게 된다.
컴퓨터처럼 말이다.
물론 변주를 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제약이 있으니 무척 재미없는 일이 되었다.
심사위원을 했다면 똑같은 곡을 하 루 종일, 그것도 이틀이나 들었어야 했을 테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게 연습을 마치고.
3월 22일, 홍승일, 박선영과 함께 서울 지역 1차 예선장으로 향했다.
물론 어머니 아버지와 채은이네 가 족까지 함께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일 때문에 오지 못하셨는데 무척 아 쉬워하셨다.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무슨 소리니. 우리 아들이 대회에 나갔는데 열심히 응원해야지. 그렇지, 채은아?”
“네!”
“재미없을 텐데.”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기계처럼 똑 같이 반복되는 걸 수십 번이나 들으면 질릴 것이다.
다행히 오전 순서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보다 앞서 연주하는 사람 만 스무 명이 넘으니 가족들에게는 고역일 것이다.
더군다나.
“배도빈. 배도빈이다!”
“쟤도 참가하는 거였어?”
“왜 하필 서울인데?”
이런 식의 뻔한 반응을 들려주기 싫기도 했고.
“도빈 군, 이쪽 한번 봐주세요!”
“콩쿠르에는 첫 참가인데 내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목적으로 한 준비인가요?”
“오늘은 죄송합니다! 콩쿠르에 집중할 수 있게 인터뷰 나중에 부탁드 릴게요!”
이렇게 기자들이 몰려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거나 마이크를 가져다 대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채은이는 갑자기 사람들이 주변에 서 소리를 치거나 환호를 한다든지, 내 흉을 보거나 혹은 질문을 해대는 바람에 겁에 질렸다.
내 손을 꼭 쥐고 뒤에 숨는다.
나도 아직 이러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으니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간신히 상황이 정리되었고 함께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대기실로 향했다.
참가자 연령 제한은 8세부터 19세까지일 텐데 초등학교 저학년은 거의 없었다.
“……저기 봐, 배도빈이야.”
“진짜 왔네.”
“대체 이런 데는 왜 와가지고.”
“그러니까. 예선 통과하면 뭐 해. 어차피 우승은 쟤가 할 텐데.”
벌써부터 의지를 잃은 놈들에게는 관심 없다.
눈을 감고 오늘 연주할 쇼팽의 에 튀드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자니 대 기실에 마련된 모니터에서 첫 번째 참가자의 연주가 들렸다.
미스. 미스. 미스.
건반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면서 박 자조차 엉망이었다.
다음 참가자도. 그다음 참가자도 개중에 조금 나은 아이는 있어도 모든 참가자가 기본적인 것도 갖추지 못했다.
‘내 생각보다 최지훈의 수준이 높은 것 같은데.’
그간 내가 상상한 ‘저 나이대 아이의 실력’에 비췄을 때 평범한 수준 이라 생각했던 최지훈이 대단한 수 재로 느껴질 정도.
보석처럼 여기는 채은이의 재능이 더욱 빛나는 듯했다.
“27번 참가자. 배도빈 군. 단상으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혼잣말 혹은 속닥이는 소리가 정확히 들려왔다.
“흥.”
“쟤 차례야.”
“얼마나 잘할까?”
최지훈도 내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주를 할까. 녀석이라면 예선이야 우습게 통과하겠지만 이런 시기와 질투를 어떻게 넘길지 잠시 걱정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마음도 잊었다.
녀석의 가정환경은 대충 안다.
그런 집에서도 밝고 올곧게 자란 녀석이 이런 일로 흔들릴 거라곤 생 각할 수 없다.
무대 위로 올라선 뒤 나를 응원하 러 와준 가족과 채은이네 가족 그리 고 홍성일에게 인사를 한 뒤 앉았다.
‘ 역시나.’
‘이만한 난이도의 곡을 이렇게 완 벽하게 연주하다니.’
'으음...'
심사위원을 참석한 이들은 오전 내 내 인상을 쓰고 있다가 배도빈이 나 타나자 반가울 정도였다.
이미 ‘거장’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는 천재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었기에 기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평소 그의 연주에 비교했을 때는 심심하지만 과제 곡을 정확히 소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아마 콩쿠르를 위해 개성을 많이 배제한 듯했는데 그 점이 심사위원 들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했다.
배도빈이 본연의 연주를 했다면 난 감했기 때문.
심사위원들과 구경을 온 관중들의 귀야 즐겁겠지만 심사 기준에 따라 야만 했다.
악보를 정확히 연주하는 능력.
이번 지역 예선 1, 2차에서의 유일한 심사 기준이었으며 100점 만점 에서 시작, 미스가 날수록 상황에 따라 1점, 5점, 10점씩 감점.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탈락시켜야 하는데, 연주자의 편곡이 허용되기 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배도빈이 특별하다 해서 그에게만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도 없었기에 심사위원들은 기준에 맞춰 연주해 준 배도빈에게 모두 만점을 주었다.
당연하게도 완벽한 연주였다.
“잘했다. 그런 식으로 가면 되는 거야.”
“굳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요.”
연주를 마치고 일행과 합류했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와중에 홍승일 은 내게 콩쿠르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었는데 무척 의욕적이었다.
“수고했어.”
“잘 들었다.”
박선영과 아버지도 축하한다.
어머니는 나를 꼭 안고 대견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는데 이런 일로 좋은 말을 들으니 난감하다.
‘곡 발표했을 때보다 반응이 좋잖아.’
그렇게 어색하게 있는데 채은이의 표정만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재미없었어. 오빠 피아노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역시 채은이만은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그럼 밥 먹으러 갈까? 채은 엄마, 근처에 한정식집 있는데 같이 가 자.”
“좋네. 채은아, 손.”
그렇게 대규모 이동을 하려는데 멀리서 오래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야호!”
“어.”
뒤돌아보니 내려온 아사히 신문의 연예부 기자, 이시하라 린이 머리카 락을 휘날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전에는 단발이었는데 지금은 어깨 까지 내려왔다.
“어머. 이시하라 씨잖아?”
“이 시하라?”
어머니도 알아보셨는지 반가운 표 정이셨고 그녀를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는 어머니께 이시하라 린에 대 해 물었다.
“일본에서 도빈이 기사 내주시던 분이에요. 웬일이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와 허겁지 겁 달려온 이시하라 린은 숨도 제대 로 못 쉬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 도빈, 아. 오랜만, 이지?”
“숨부터 골라요.”
“응. 잠깐만.”
안쓰러울 정도다.
잠시 뒤 숨을 고른 이시하라 린이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이분은 아버 님이신가요? 아사히 신문의 이시하 라 린이라고 해요. 도빈이도 안녕?”
드물게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시하라 린의 말을 부모님께 전달 했다.
“안녕하세요, 이시하라 씨. 한국에는 어쩐 일이세요?”
“도빈이가 콩쿠르에 출전했다고 해 서 왔죠. 이런 걸 제가 놓칠 수 있나요?”
그런 것치고는 최근 날 찾아오지 않았다.
“요즘은 안 왔잖아요.”
“그동안 전담했던 사람이 있었거 든. 뭐, 괜찮은 사람이지만 너만 하겠니? 너한테 취재 못 나가게 하면 사표 쓴다고 한바탕 했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사정 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라어라. 누나 보고 싶었던 거야? 서운했어?”
“전혀요.”
“2년 전부터 일본에서 피아노로 유명한 애가 나타났거든. 난리도 아니 라서 어쩔 수가 없었…… 잠깐. 일 본어는 언제부터 할 수 있게 된 거야?”
“사카모토랑 히무라한테 배웠어요.”
“와. 음악하는 사람들은 귀랑 기억 력이 좋아서 언어도 금방 배운다더 니 정말인가 보네? 억양도 발음도 너무 좋잖아.”
그런가?
“안녕하세요, 이시하라 기자님. 샛 별 엔터테인먼트의 박선영 대리입니다.”
이시하라 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박선영이 나섰다. 돌아보니 채 은이네 가족과 홍승일이 조금 떨어 진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어머. 안녕하세요.”
“혹시 인터뷰하시려고 오신 건가요?”
“아, 네. 하하. 조금…… 뜬금없었죠? 하지만 조금이면 되니까.”
“죄송하지만 지금은 어려울 것 같아요. 조금 전에도 기자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왔거든요. 혹시 꼭 필요하시다면 2시간 뒤에 괜찮으실 까요?”
“2시간……
이시하라 린이 나를 애틋한 눈으로 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배도 고프 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히무라가 사무실에 있어요. 거기 서 기다려 주면 밥 먹고 갈게요.”
“아.”
“여기까지 왔으니까 히무라한테 밥 사 달라고 해요.”
“그럴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본에서 처음 활동했을 때는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이 정도라도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선영도 그 정도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사무실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럼 이따 봐!”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이시하라 린 과 헤어지고 밥을 먹으러 갔다.
“도빈이가 유명한 건 알고 있었지 만 오늘 사람들이 환호하는 거 하며 기자들이 오는 거 보니 실감하게 되 네.”
“말도 마. 도빈이 입학식 날에 어 땠는지 말하지 않았나?”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다시금 수다를 시작하셨고 나는 손을 잡으려는 채은이와 함께 그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