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05화 (105/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105화

24. 9살, 첫 콩쿠르(1)

리사이틀을 마친 가우왕이 머무는 베이징 호텔로 향했다. 그의 방으로 향하자 샤워 가운을 두른 그가 문을 열었다.

“들어와.”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라더니 확실히 돈은 잘 버는 듯하다.

근사한 방이다.

“하하. 한 달 만이네요, 가우왕 씨. 오늘은.”

히무라가 상황 설명을 하려는데 가우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배도빈에게 직접 듣고 싶습니다.”

“……네. 도빈아, 가우왕 씨가 네게 직접 듣고 싶다고 하는데.”

중국어나 영어는 할 줄 모르니 그냥 내가 말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모양이다.

“앨범 연주자를 구하고 있어요. 가우왕이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요.”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열자 그것을 히무라가 통역해 주었다.

가우왕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왜지?”

여러 의미가 담겨 있겠지만 솔직하 게 답했다.

“잘 연주해 줄 것 같으니까요.”

“우습군. 이긴 것도 모자라 이제 날 놀리는 건가? 세 달 전만 해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나?”

결과를 깔끔히 받아들인 것 같더니 실은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맞아요. 그땐 형편없었어요.”

“왜요?”

히무라를 보자 내 말을 제대로 전 달해야 하나 걱정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니 히무라가 입을 열었고.

“하하하하하!”

가우왕이 웃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혼자서 뭐라 중얼거렸는데 히무라는 그 말은 내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래. 나도 너와의 경연으로 이것 저것 배웠으니까. 당시 내 연주가 무엇인가 빠져 있었다는 것은 인정 한다. 하지만 내가 그 작업에 동참 해야 하는 이유는 아닌 것 같군.”

“거짓말.”

“뭐?”

“같이 작업하고 싶잖아요.”

“내가? 왜? 굳이 그런 이유라도 있나?”

“내 곡이니까.”

“직접 연주해 봐서 알잖아요. 이 곡의 연주자로 함께하는 거예요. 당 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히무라로부터 내 말을 들은 가우왕 은 아침부터 위스키를 벌컥 들이켰다. 담배를 꺼내려다 나를 보곤 인 상을 썼다.

“대체 내 자존심을 어디까지 밟으려는 거냐. 부탁하는 주제에……

말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굳이 통역해 주지 않는 히무라를 다그쳤더니 그런 말을 했던 것이었다.

‘자존심이라.’

가우왕은 아직 자기가 지켜야 할 자존심이 무엇인지, 버려야 할 아집 이 무엇인지 잘 구분할 수 없는 모 양이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와 함께해 주세요.”

“도빈아?”

히무라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가우왕이 뭐라 하기 시 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고개를 들었다.

“체면을 세워드리는 걸로 함께해 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숙일 수 있어요.”

히무라는 망설이다 이내 포기했는 지 내 말을 전달했다.

가우왕은 히무라를 통해 내 말을 들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받 아들이며 그의 검은 눈을 바라보는 데 그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히무라를 보며 물었다.

“히무라 쇼우 씨, 배도빈 원래 이런 아이입니까?”

“이런 아이라 하시면?”

“이렇게나……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둘이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히무라가 싱긋 웃었다.

“저도 상대하기 가끔 벅차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자리에서 꺼낸 말 도 사실 전달하기 난감하고요.”

“맞아요. 상당히 거슬리는 말이었습니다.”

히무라는 가우왕의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윽고 그 기다림 끝에 피아니스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자존심 따위 아무 쓸 모없는 거라 말하듯 자기가 먼저 고 개를 숙여 버리네요. 그 행동이 참……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에 게 물어봐 주세요. 녹음은 언제부터 냐고.”

“그럼!”

“네. 함께하겠습니다.”

* * *

가우왕이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간 서로 직접 대화를 나누지 못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의사소통이 꽤나 편해졌다.

“이 망할 꼬맹이가!”

“집중해요!”

“이 상황에서 뭘 집중하라는 거야! 어제는 배 위에서 연주를 시키더니, 이번에는 태풍?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불평할 시간에 연주나 신 경 써요! 분명 좋은 연주가 될 테니까!”

“연주고 나발이고 죽을 수도 있다 고! 이거 녹음이나 제대로 되는 거 맞아?”

“안 죽어요! 저번에도 해봤단 말이 에요!”

“그거 세트장에서 한 거라며!”

“자꾸 어린애처럼 투정부릴 거예요? 빨리 나가서 연주하고 끝내자고요!”

“이이익! 매니저! 히무라 대표! 이 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계약서에 적혀 있었어요. 각 곡의 테마를 살리기 위해 적절한 환경에 서 녹음을 진행한다고.”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웃기지 마!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2013년 12월 클래식 음악계를 넘 어 세계를 흥분케 했던 대결을 펼친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경연 전까지만 해도 철천지원수로 보였던 두 사람이 선의의 경쟁 이후 서로를 인정해 피아노 연탄곡을 연주했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배도빈. 가우왕 선상에서 연주하다.]

[태풍 속에서 연주한 ‘Bae Dobean: 배도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中 ‘태풍’에 대하여.]

【가우왕. “나를 죽이려 한 게 틀림 없다. 그런 식의 녹음 따위 들어본 적 없다.”】

【배도빈. “가우왕과의 녹음 작업은 즐거웠다. 다음에도 함께했으면 좋겠다.”]

ㄴ 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쟤들 뭐 함?ㅋㅋㅋㅋㅋ

ㄴ개웃기네 진짴ㅋㅋㅋ 가우왕 불 쌍해 ㅠㅠㅠ

ㄴ 이게 뭔 말임?

ㄴ 진짜 악마 같은 놈일셐ㅋㅋㅋ 가우왕 인터뷰 사진 봨ㅋㅋㅋㅋ 진짜 혼이 빠진 것 같음ㅋㅋㅋ

ㄴ  이번에 배도빈 연탄곡이 자연에 관련된 곡들인데 ‘더 퍼스트 오브 □ I’가 태풍 세트장에서 연주했다고 함. 거기서 영감을 받아 자연 소리 와 맞춰 연주했다고 함.

ㄴ ??

ㄴ 맞춰서 연주를 했다고?

ㄴ 그게 가능한 일임?

ㄴ 그러니까 대단한 거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변주해서 연주를 했다는 거니까. 그래서 상대 연주자의 연주 실력도 중요했던 것 같음.

ㄴ 님 뭐 하는 분이세요? 왜 그렇게 잘 알고 계심?

ㄴ 아, 나 저 아이디 본 적 있음. 저번에 그래미 시상식 때 개인방송 켰던 배도빈 매니저 같은데.

ㄴ 그런 사람 아님.

ㄴ 배도빈 행복해하는 표정 봐랔ㅋㅋㅋ 진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넼ㅋㅋ

ㄴ 곡이 좋긴 함 ㅋㅋㅋ 새소리 들리는 ‘숲’ 들어봐라. 진짜 뭔가 다른 느낌임ㅋㅋ

디지털 음반과 함께 전 세계 동시 발매된 배도빈의 두 번째 앨범은 출 시 당일에만 무려 37만 장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클래식 음반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중의 반 응은 뜨거웠다.

곡 자체의 훌륭함에 제작 과정 중의 이슈가 더해지면서 화제성 역시 갖춘 덕이었다.

“이런 식으로 홍보가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가우왕이 열 받아서 한 인터뷰가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럴 만했지.”

“도빈이가 이런 것도 생각했을까요?”

“큭큭큭. 그럴 리가.”

배도빈의 앨범을 전 세계 동시 출 시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던 히무라와 박선영은 사무실에서 둘만의 축연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정신이 없었지만 배도빈의 음 반이 기록적인 성적을 내니 지친 몸 에 보람이 가득했다.

사무실에는 배도빈, 가우왕이 연주 한 연탄곡이 가득했고, 두 사람 사 이에 놓인 와인은 벌써 반이나 비어 있었다.

“가우왕은 어때요?”

“뭐가?”

“고소한다고 했잖아요.”

“아아. 녹음된 거 듣더니 별말 않더라고. 억울하긴 했어도 앨범 자체는 만족한 모양이야.”

두 사람은 빙긋 웃은 뒤 잔을 부 딪쳤다.

* * *

배도빈의 두 번째 앨범이 발매되는 날, 최지훈은 집사의 만류에도 굳이 직접 CD를 사기 위해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돌아오고 저녁때가 되어서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그것을 감상했다.

격정적인 음 배치와 즉홍 변주했다 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함.

배도빈의 두 번째 앨범은 원곡과 자연에서 연주해 녹음한 변주곡 두 장이 들어 있었는데, 양쪽 모두 너 무나 훌륭했다.

그 음률이 주는 긴장감과 감정의 흔들림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모두 듣고 아쉬움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밤 아홉 시.

마침 최우철이 귀가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반가운 마음에 오늘 친구 배도빈이 낸 앨범에 대해 말하려던 최지훈은 순간 말을 삼켰다.

아버지가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최우 철의 심기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우철이 최지훈을 불렀다.

소파에 앉아 안경을 벗은 그의 눈매는 몹시 신경질적이었다.

“배도빈이 앨범을 냈다더구나.”

“네.”

“벌써 기록을 세웠다고 하더구나.

가장 빨리 판매된 앨범이라고.”

‘ 역시.’

친구의 성공에 기뻐했으나 최지훈은 그 기쁨을 내색하지 않았다.

“넌 대체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열심히 할게요. 걱정 마세요.”

대신 아버지의 반복된 질타를 그저 받아들이고 열심히 하겠다며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열심히 하는 걸로는 안 된다고! 음악의 회당 아카데미에서는 대체 뭘 배우고 있는 거냐.”

“요즘에는 쇼팽의 연습곡을 연습하 고 있어요.”

“그놈의 쇼팽은 대체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생각이야!”

음악에 대해 무지한 최우철은 1년 간 쇼팽의 에튀드를 연습하고 있는 아들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쇼팽의 에튀드의 예술성과 난이도는 상정하지 않고 규격 외의 ‘대상’ 에 비추어 최지훈의 성장이 너무나 더딘 것처럼 느낀 것이었다.

‘지훈이는 정말 천재예요.’

‘아드님이 이렇게나 피아노를 잘 치시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런 말들이 이제는 전부 최우철 본인을 위해 아부하는 것으로만 들 릴 뿐이었다.

“넌 나와 다르다. 나는 살기 위해 너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해왔다. 그런데 너는 네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하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언제 경영을 배우라고 했더냐?”

“좋아하는 일에 좋은 환경을 주는 데 너는 대체 왜 이 아빠를 자꾸 실망시키는 거야! 어!”

벌써 몇 년째.

최우철의 비난은 갈수록 심해지기 만 했다.

“사, 사장님. 도련님도 충분히.”

“집사님은 가만 계세요! 귀하다고 싸고 도니까 얘가 발전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최지훈에게도 한계가 왔다. 여태 아버지의 비난을 듣기만 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6월에 학생 콩쿠르가 있어요. 초 등학생서부터 고등학생까지 구분 없이 나갈 수 있는.”

아들이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이야 기하기에 최우철은 그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거기서 우승할게요. 반드시.”

“……네가 한 약속은 지키길 바란다.”

유약한 아들이 처음으로 본인이 무 엇인가를 해내겠다고 하자, 최우철 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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