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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03화 (10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103화

    23. 9살, 불새(4)

    “응. 빠르네. 니아 발그레이 씨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야. 악 장 없이 연주회를 할 수도 없을 테 니 서두르는 것 같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니아 발그레이를 걱정하면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란 자리에 욕심이 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그만한 준비 단계도 없기 때문이다.

    지휘자만큼이나 악단을 상세히 파 악하고 지휘자가 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단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악장.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두뇌라면 악장은 심장이다.

    지휘자가 부재 시 악장이 대신 지 휘를 하는 것만 생각해도 그 자리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내가 비록 몇 개월 베를린 필과 여러 번 호흡을 맞췄다지만 악장으로서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다.

    외할아버지, 채은이 그리고 최지훈 과 같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점이 그러하 고.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독일에서 일 하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비자라든지).

    마지막으로 내가 한국인으로서 일 반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길 바라시는 부모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이라는 점이 나를 갈등하게 했다.

    이러한 생각을 털어놓으니 어머니 와 아버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 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 도빈이 정말 많이 컸구나? 여러 가지로 생각할 줄도 알고.”

    지금까지 단지 어휘력과 표현력이 부족했을 뿐이지만 두 분은 나를 기 특하게 바라보셨다.

    “도빈이가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 엄마도 이제 강요하 지 못할 것 같아.”

    “ 엄마.”

    “아빠는 널 믿는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고려할 수 있으면 네 선택을 존중할 거야.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에 대해 많이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충분히 말이야.”

    “아빠.”

    생각 외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응 이었다.

    나를 믿어주시는 것 같아 조금 감 동이다.

    “실은 아빠도 유럽으로 가야 하는 데 도빈이한테 어떻게 말하나 싶었거든. 하하하.”

    이제 보니 나 혼자 한국에 둘 수 없으니 같이 유럽으로 가길 바라고 계셨던 모양. 그럼 그렇지 하고 김 이 새버리고 말았다.

    “그럼 영국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 현장은 독일이니까. 알아봐야겠지만 강의를 매일 나가는 건 아닐 테니 독일에 살 것 같아. 아직 정해 진 건 없지만.”

    뭔가 감동 받은 게 억울해지기 시 작했다.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온 나는 니아 발그레이의 소식을 듣기 위해 이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9시니까 지금쯤 독일은 대충 점심시간이거나 그보다 조금 지났을 것이다.

    -도빈아!

    “연주회 잘 들었어요.”

    -어? 아, 영상으로 봤구나? 정말 이지 난리도 아니었어. 매년 하는 곡이지만 이번에는 워낙 힘이 들어 가서 말이지.

    니아 발그레이의 은퇴 무대니 확실히 그럴 만하다.

    -왜 전화했어? 누나 보고 싶었구나?

    “그건 아니고 악장이 아프다고 들 어서요.”

    -얘는 어쩜 어릴 때보다 눈치가 없니. 그럴 땐 빈말이라도 보고 싶었다고 하는 거야.

    이승희가 여전히 시끄러워 조금은 안심했다.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닐 테니까.

    “보고 싶어요, 누나.”

    -나두〜 그러지 말고 잠깐 보자. 나 한국이니까. 콘서트마스터에 대 해 궁금한 건 그때 말해줄게.

    독일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나도 통화보다는 직접 만나 이 야기하는 게 좋다.

    “그럼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

    -그럼. 도빈이랑 데이트하는 데 없는 시간도 내야지.

    말하는 걸 들어보니 뭔가 바라는 게 있어 보이는데 그게 무엇인지 대 충 알 것 같다.

    아마 예전 객원 연주자로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네. 그럼 샛별 엔터테이먼트 사무 실에서 봐요.”

    _그래〜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외할아버지를 찾아 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히고 있어 솔직하게 말하니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 할아버지 살날도 얼마 안 남았단다. 그때까지만 같이 살자꾸나.”

    비겁한 대응이다. 반대할 거라 생 각은 했지만 이렇게 정에 기대어 나 오실 줄은 몰랐다.

    저 탄탄한 육체를 보면 앞으로 20 년은 거뜬하실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 할아버지도 같이 가요.”

    “뭐?”

    “독일에서 사시면 되잖아요.”

    이렇게 나올 줄은 모르신 듯 끄응 하고 신음한 외할아버지가 고개를 은들었다.

    “정말 네 고집은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구나.”

    “엄마가 할아버지 닮았대요.”

    어머니가 깔깔 웃으셨다.

    “자주 찾아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아니면 아버지가 오셔도 되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할아버지도 납득을 하셨다. 손자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다. 어머니와 아 버지가 그러하듯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이다.

    “그럼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간다는 말이냐.”

    “오디션을 통과하면요.”

    “흐음.”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시던 할아 버지가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꺼내셨다.

    “진희야, 그럼 샛별 엔터테인먼트와 의 계약은 어찌되는 게냐. 베를린 필 소속이 되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

    “아. 그러게요. ……이야기를 해봐 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문제예요?”

    어머니께 물었다.

    “도빈이가 지금 하는 일들이 히무라 아저씨를 통해 들어오고 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께서 설명을 시작하셨다.

    “히무라 아저씨는 도빈이에게 도움 이 되는 일을 마련해 주고 연주회나 방송, 음반 같은 일을 할 때 생기는 수익을 가지는 거야.”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도빈이가 베를린 필에 들 어가게 되면 일정을 카밀라 아줌마 가 해주게 될 거야. 그럼 히무라 아 저씨와 카밀라 아줌마의 일이 겹치 게 되는 거지.”

    “둘 다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일정이 겹치게 되면?”

    조절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중 계약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 러니 우선 히무라 아저씨랑 만나서 한번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 가 가장 큰 고비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역시나.”

    어머니와 내게 설명을 들은 히무라는 짧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어제 도빈이 기색을 보고 오디션을 보고 싶어하진 않을까 생각은 했습니다. 베를린 필과 인연도 있고 무엇보다 도빈이가 너무 좋아했으니 까요.”

    “네.”

    어머니께서는 차분히 히무라의 말을 들어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난감하긴 합니다. 도빈이가 있는 자리에서 말 하고 싶진 않지만 샛별 엔터테인먼 트 도빈이만을 제대로 케어하자고 설립한 회사니까요.”

    굳이 히무라가 저렇게 미안해하면 서 말하지 않아도 그 사실은 나와 어머니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그는 다른 음악가를 관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유능한 프로듀서였던 그는 매니지먼트 사업을 한 이후에도 여러 사람 에게서 러브콜을 받아 왔다.

    그런 것을 모두 뿌리치고 나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빈이를 우선해 생각하면 외부 활동을 모두 포기하고 베를린 필에 서의 활동을 하되 앨범은 샛별 엔터 테인먼트에서 내는…… 방법이 있겠네요. 하지만.”

    “……그걸로는 회사 유지가 어려울 수 있겠네요.”

    “네.”

    히무라가 입을 굳데 닫았다.

    고민이 많이 되는 모양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 그래.”

    “악단에 들어가면 개인 활동은 전 혀 못 하게 되는 거예요?”

    “아마 그럴 거야. 다른 인원도 그렇지만 특히 악장 같은 경우에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악단 내부에 일어 나는 일을 컨트롤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적지 않게 들 거야. 특히나 베를린 필처럼 정기 연주회만 3일에 한 번씩 하는 곳이라면 말이야.”

    내 생각보다 현대의 오케스트라는 좀 더 체계적이고 한편으로는 경직되어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단원들이 각자 자기 직업 이 있고 모였다면 현재는 그것이 직 업인듯한 모양.

    나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지.

    아니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낼지에 대해 저울 질을 하게 되었다.

    “악장이 되면 중간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해야 해요?”

    “엄마는 지금도 도빈이가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하면 좋아.

    하지만 독일로 가는 걸 반대하지 않은 건 도빈이가 이제 자기 생각을 엄마한테 잘 말할 수 있어서 그런 거야. 도빈이가 정말 독일에서 음악을 하고 싶으면 국적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니. 내 아들인 건 변함없는 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배움이 짧아 현대의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이길 포기하는 일만 은 나 역시 그리 반갑지 않다.

    다시 태어나고 8년.

    너무나 소중한 것이 많이 생겼다.

    그 유대를 스스로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또 아직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음악 이 많은 지금 당장은 좀 더 눈을 넓히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히무라.”

    "응."

    “나랑 약속 하나 해줘요.”

    “무슨?”

    “나중에 제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려 하면 그때 최선을 다 해 도와주겠다고.”

    “그건.”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베를린 필의 악장 자리도 욕심이 나지 만…… 벌써 한 자리에 안주해 버리 면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아쉬워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 당분간 은 보류. 하지만 나중에 오케스트라 에 들어가고 싶을 때는 부탁할게요.”

    “……그래! 약속하마.”

    약속을 할 때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최지훈에게 배웠다.

    히무라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 역시 손을 뻗어 마주 걸었다.

    어머니를 보면서 말했다.

    “전 한국에 있을래요, 엄마. 할아버 지랑 같이 살면 되죠?”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같이 있어줘야지.”

    “아빠도 새 시작을 할 거잖아요. 저번엔 저랑 있어주셨으니 이번에는 아빠랑 있어주세요.”

    “도빈아.”

    어머니께서 안타깝다는 듯 나를 안으셨다.

    두 분도 자기 삶을 찾길 바라기에 어머니께서도 본래 미술을 하던 독 일에서 제대로 무엇인가를 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분이 독일로 가시면 나도 조금은 편해지니까.’

    일단 커피와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헤어 지는 게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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