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02화
23. 9살, 불새(3)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는 기자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리스텀지의 사라입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 사라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저번 경연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우선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 부탁드 립니다.”
히무라의 말로는 간절하게 부탁했다던데, 그런 것치고는 일반적인 질 문이다.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곡은 완성되었는데 함께 연주할 사람을 정하지 못해서요.”
“예를 들어 친분이 있는 미카엘 블 레하츠 씨는요?”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년까지 가득 찬 그의 일정을 고려 하면 무턱대고 부탁할 수도 없는 일 이다.
사카모토의 경우에도 다른 작업이 정해져 있기에 이번만큼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다.
“워낙 바쁘니까요.”
그 뒤로도 일반적인 질문이 이어지다 사라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파이어버드 경매회장에서 시연 공연을 하셨다죠?”
“네.”
기자들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다.
“그에 대해 다들 의문을 가지고 있거든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와 스 트라디바리우스의 만남이 성사될 줄 알았는데 애석하다면서.”
“제가 활용할 물건은 아닌 것 같아 서요.”
내 말에 사라가 빙그레 웃더니 무 엇인가를 꺼내 앞에 놓았다.
신문 기사다.
【배도빈은 파이어버드의 진가를 몰 라봤다】
‘이건 또 무슨 시비야?’
히무라가 급히 기사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반응이라는 듯 사라가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찾아뵌 이유는 이것 때 문이에요. 찰스 브라움 알고 계시죠?”
고개를 끄덕이자 계속해서 말을 잇 는다.
“그 회장에 그도 함께 있던 그는 당신이 파이어버드를 당연히 살 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듣기로는 직접 시연까지 요청했던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연주를 마친 뒤 경매장을 떠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는 이야 기를 밝혔어요.”
“참 할 짓 없는 사람이네요.”
“도빈아.”
기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고 하지만 도발을 당하고 가만있을 내가 아니다.
“걱정 마세요. 이 내용을 기사로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좀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재밌는 이야기?”
히무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사 라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는 팩트고. ……재밌는 가십이 하나 있어요. 실은 이 기사 가 의도되었다는 말이죠.”
“루드 테슬라라는 유명 기획자가 찰스 브라움을 꼬드긴 모양이에요. 당신이 파이어버드를 연주하고도 사 지 않은 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무 시하는 거라고.”
“왜요?”
“만약 그랬다고 치고 그 테슬라라는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찰스 브라움과 당신의 경연을 보 고 싶기 때문이겠죠. 아니, 그걸로 돈을 벌고 싶기 때문이라 말하는 게 정확할 것 같네요.”
“만약 사실이라면 말이죠?”
“네. 만약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개벽한 듯 변화했다고 하지 만 어찌 사람만은 이렇게 달라지지 않았는지.
과거에도 귀족들이 이런 식으로 음악가들을 상대로 싸움을 붙인 적이 있었다. 아니, 수두룩했다.
내가 이러한 ‘대결’에 진절머리를 내는 이유다.
사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파이어버드의 진가를 몰라봤다는 찰스 브라움의 발언에 공식적으로 답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마 이 대답을 듣고 싶어 급하게 찾아온 듯.
곧 이 사람 말고도 여러 기자가
이에 대해 물을 것 같아 솔직하게 말했다.
어디 사는 개뼈다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 공연 기획자라는 놈의 의도에 놀아나 줄 생각도 없고 말이다.
“좋은 바이올린으로 좋은 연주 많이 하면 좋겠네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히무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반면 리스텀지의 기자, 사라의 얼 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대하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무척 아쉬운 모양이다.
“삼십 분이 지난 거 같은데 이쯤에 서 끝내도 될까요?”
“아, 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히무라가 나를 격려했다.
“잘했어, 도빈아.”
“뭐가요?”
“참았잖아. 그런 도발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어.”
기분이 상한 걸 알고 위로겸 전한 말이겠지만 아직 분한 게 사실이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 코를 찍어주 고 싶지만 그래서는 놀아나는 꼴이 돼버린다.
“그나저나 찰스 브라움도 성급하 네. 그런 말을 공식적으로 내뱉다 니.”
“그러게나 말이에요. 잘생기고 실 력도 좋아서 나름 챙겨 듣는 사람이었는데 정말 실망했어요.”
히무라와 박선영의 말처럼 이번 일
은 찰스 브라움이라는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 영향이 크고 작은 것을 떠나 말이다.
언제나 세상물정 모르는 음악가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이 있는 듯, 그러한 사실에 안타까워졌다.
* * *
“제길.”
찰스 브라움을 꼬드겨 큰 무대를 준비하려던 루드 테슬라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가우왕과 경연을 보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듯해서 공을 들여 준비했거늘.
아무래도 샛별 엔터테인먼트에서도 관리에 들어간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어찌된 겁니까?”
“ 아.”
벌써 석 잔이나 비웠을 즈음 루드 테슬라 옆에 금발의 잘생긴 남자가 앉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찰스 브라움이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덕담을 하더군요.”
“그게……
“잔뜩 기대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뭐, 거짓말까지 했는데 결과가 이러니 허탈하군요.”
찰스 브라움의 말에 루드 테슬라가 취한 와중에도 눈을 크게 떴다. 술이 깨는 듯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배도빈은 저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악기를 몰라볼 리가 없죠. 더욱이 파 이어버드를 산 제게 악기 볼 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리도 없고요.”
“그럼 대체 왜……
“ 흐음.”
찰스 브라움은 바텐더에게 신호를 보내 잔을 받았다. 그것을 관찰하듯 보다 한 모금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관심이라고 하겠죠. 지루하다고 해야 하나.”
“다들 너무 단조로워요. 가슴을 뛰 게 하는 일이 없어요. 어렸을 때 콩쿠르에 참가할 때, 매번 긴장할 수 밖에 없었던 연주회. 지금도 즐겁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극이 부족하다 고 해야 하나. ……그건 당신도 같은 생각이잖습니까?”
“그럴 때 배도빈과 가우왕의 경연 은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세상에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렇게 재밌는 일이 또 있었습니까?”
찰스 브라움은 남은 술은 마저 들 이 켰다.
“그는 특별해요. 정말 한번 겨뤄보 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죠. 요 즘에는 그를 악마(루시퍼)라고 한다 죠? 정말 공감해요. 그의 연주는 정말 악마가 유혹하듯 매일 밤 생각나 죠.”
“미안합니다.”
“미안할 것 없어요. 당신이 저를 이용하려 했듯 저 역시 당신을 이용 하려 했을 뿐이니까.”
“다만 하려던 일은 확실히 해야겠죠.”
“그게 무슨.”
탁 _
찰스 브라움이 신문을 그 앞에 두었다. 의아하게 찰스 브라움을 본 테슬라는 이내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고 의외의 기사를 접했다.
“니아 발그레이가 은퇴를?”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악장 이 은퇴를 한 모양입니다. 건강상의 문제라고 하는데 저도 오늘 기사를 접하네요.”
“그런데 이걸 왜……
“이런. 나쁜 쪽으로는 상상력이 풍 부하신 분으로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요. 배도빈이 베를린 필 과 인연이 있다는 건 아실 테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유구한 역사 속 에서도 최연소 단원이자 최연소 협연자 그리고 최연소 지휘를 한 사람 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절대 깨지지 않을 일이었기에 그만큼 크게 화제가 되었었다.
“베를린 필로서는 새로운 악장을 뽑아야 할 테고 그들의 전통대로 공 개 오디션을 할 테죠. 제가 여기에 참가하면 어떻습니까.”
“예?”
이미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크 게 성공한 남자가 하는 말이라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곧 루드 테슬라는 찰스 브라움의 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배도빈도 참가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 된다면 자연 스럽게 이 작은 이슈에 불이 붙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테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를린 필로부터 오디션장을 꾸미고 그것을 중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당신이 할 일이겠죠. 어때요. 가능하겠습니까?”
“해야죠.”
“좋은 대답이네요.”
막상 대답을 하고 조금 불안해 보였기에 찰스 브라움이 물었다.
“뭔가 부족한 거라도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배도빈과 겨루고 싶은 이유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정말 그는 도 전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도전. 도전이라.’
루드 테슬라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제 만 여 덟 살의 아이에게 도전이란 표현을 사용함을 곱씹었다.
*
“도빈아, 니아 발그레이 씨가 은퇴 한대. 건강 문제라는데.”
“네?”
건강 문제라니.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다. 소식을 전달해 준 히무라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문득 잊고 있던 꺼림칙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 *
“그런데 대체 왜 하필 29일인 거냐. 이 바쁠 시기에. 하필이면 악장도.”
“ 악장?”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나중에 본인이 말하겠지.”
‘그런 이야기였나.’
가우왕과의 협연 때 푸르트벵글러 가 지나가듯 말한 것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경연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무심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한 몇 개월은 짧지만 내 게 너무나 소중한 추억. 차분한 그는 언제나 악단의 기둥으로서 있었기에 이렇게 무너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걱정할까 봐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나 봐. 최근 연초 연주회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사무국을 통해 발표되었어. 벌써 이틀 전 이 야기네.”
박선영의 말을 들으니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섣불리 핸드폰 버튼을 누를 수 없었는데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핸드폰을 넣으려는데 외할아버지에게서 내일 아침에 집으로 오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다.
‘무슨 일이지.’
그러겠다고 답장을 보내는데.
“어? 베를린 필에서 악장을 공개 오디션으로 뽑는대.”
“공개 오디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