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100화
23. 9살, 불새(1)
“끄응.”
외할아버지는 웃는 나와 어머니를 보며 작게 신음한 뒤 단정 짓 듯 말씀하셨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 알아보도 록 하지. 일단 잊어라.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네.”
어머니께서는 손자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은 외할아버지를 놀 리는 게 재밌는 듯하다.
‘영국으로 오면 지훈이랑 채은이가 난리 나겠네.’
특히 채은이가 얼마나 한스럽게 울 지 대강 짐작이 되었다.
아버지가 본래 하시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고 나도 좀 더 넓은 곳에서 음악을 할 수 있는 게 좋다.
하지만 샛별 엔터테인먼트도 문제 고 내가 정상적으로 한국에서 교육을 받길 바라는 어머니, 그리고 조 금은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게 된 홍승일도 조금은 마음에 걸린다.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조금은 지켜 보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럼 내일은 아빠 응원하 러 가자?”
“네.”
“도빈이는 내일 나와 같이 갈 데가 있다.”
“갈 데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바이올린 사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간 매물이 없었는데 내일 경매에 괜찮은 물건이 하나 나온 다고 하더구나.”
“ 아.”
굳이 영국까지 와서 떡국을 먹은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일도 그렇고 바이올린도 그렇고.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 사 주실 거예요?”
“그럼.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처음 부탁한 일인데 들어줘야지.”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미소 짓는다.
돈으로 사랑을 평할 수는 없지만 값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너무나 기뻤다.
“어쩌지……
어머니께서 대학에 갈지 경매장에 갈지 고민하시는 듯해 말했다.
“아빠랑 같이 가 주세요. 전 할아 버지랑 있으면 되니까요.”
“……그래. 아빠가 많이 초조할 테 니 엄마가 응원하고 올게.”
‘다 컸네’라고 말씀하시면 내 머리를 쓰다듬으신 어머니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루턴 대학으로 향한 어 머니와 아버지를 배웅하곤 외할아버 지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영국은 몇 번 온 적이 있지만 내 가 기억하는 런던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예전 분위기가 어느 정도 남아 있긴 해도 세월의 흐름을 무시할 순 없는 법이니까.
“슬슬 출발하자꾸나.”
“네 시 시작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음. 아무래도 연주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당연한 일이다.
악기를 사는데 그 소리를 확인해 보지 않고 사는 건 있을 수 없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명인이 만든 거라 해도 지금의 런던처럼 세월을 피할 순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래도 경매에 나올 물건은 보안 문제로 직접 만지는 게 힘들 거라는 말을 예전에 히무라에게서 들은 만 큼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주최측을 통해 시연을 할 수 있도록 했단다. 경매에 들어가기 전에 연주를 하는 거지.”
역시 할아버지다.
가우왕과 피아노 경연을 할 때도 한 생각이지만 무슨 일을 할 때 정 말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역시 세계적인 회사를 경영하는 분 답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와 함께 경매회장에 도착 하자 정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우 리를 안내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직원이 버튼 아래에 카드를 넣었다.
“저게 뭐예요?”
“보안 카드겠지.”
할아버지 덕분에 신기한 구경을 참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걸 넣지 않으면 엘리베이터가 작 동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들으며 어 딘가에 도착하자 금발의 여성이 할 아버지를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장혁 회장님. 그리고 마에스트로 배도빈.”
한국말이다.
“반갑소. 바로 안내해 주시오.”
“네. 이쪽으로.”
기껏 3층에서 내렸더니 원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서는 이쪽으로 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 들어 선 어두운 방 가운데.
오렌지보다 좀 더 붉은, 아니, 불 타오르는 황금빛을 내뿜는 바이올린 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나는 영혼을 빼앗긴 듯했다.
“파이어버드.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718년에 제작한 물건 입니다.”
안내를 해준 금발 여성이 설명해 주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나무 판을 내밀었다.
그 위에 흰 면장갑이 있어 받아서 끼는 와중에도 나는 ‘파이어버드’에 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떠냐.”
“눈을 뗄 수 없어요.”
아름답다. 우아하다. 품격 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있는 그 대로의 감상을 대답하기 위해 할아 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시연은 언제 시작할 수 있겠나.”
“언제든지 가능하십니다. 다만 말 씀드린 대로 회장에서……
“알고 있네. 도빈아.”
다시 파이어버드에 빠져 있는데 할 아버지가 불러 고개를 돌렸다.
“경매 시작 전에 회장에서 연주해 야 한다고 하더구나. 괜찮으냐.”
“그럼요.”
할아버지가 금발 여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내게 설명을 시 작했다.
“파이어버드의 시연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배도빈.”
“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
“저희로서도 거장께서 맡아주신다 하여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 만 시연은 20분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후에는 경매가 완료될 때까지 접하실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해 주시 기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준비가 필요한 일은 없으실 까요?”
“조율이 되어 있나요?”
“저희는 물품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율 또한 되어 있지만 시연 전에 확인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부탁드 려요.”
“네. 그럼.”
경매장 직원이 파이어버드에 다가 갔고 나는 너무나 두근거려 외할아 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하하. 그렇게나 좋으냐.”
“네!”
“장난감을 그렇게 사 줬을 때도 신 통치 않더니.”
외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고 나는 곧 직원에게서 파이어버 드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건넨 활을 받아들곤 눈짓을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다는 뜻이기에 현을 켜기 시작했다.
역시나 조율을 했다고는 하지만 완 벽하진 않은 느낌이라 줄감개를 만졌다.
“어떠냐.”
“연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동안 걸은 뒤 직원이 막을 치우자 작은 무대가 나왔다. 아무래도 연주를 위해 준비된 곳은 아니고 경 매를 하는 곳 같은데 좌석에 벌써 꽤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에스트로께서 직접 시연한다고 하시어 일찍 찾아와 주셨습니다. 연주는 언제든 편하실 때 해주시면 됩니다.”
“잘하고 오너라. 할아버지는 돌아가 앉아 있으마.”
“네.”
할아버지와 직원이 떠나고 무대 가운데로 향하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눈을 감고 잠시 정숙해지기를 기 다렸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찾았는지 장내는 금방 음악을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독주곡이 라.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이보다 좋은 곡을 찾기 힘들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 번 A 단조.
그라베의 음이 길고 아름답기에,
후가의 다채로운 느낌에서 안단테와 알레그로로 이어지는 서정적인 비극 등 곡 자체로서도 매우 훌륭한 독주 곡이다.
다양한 음을 사용하는 만큼 이 ‘파 이어버드’의 소리를 듣기에도 적절 한 곡이라 생각했다.
♪♫♬
누군가 곡을 연주하는 행위는 악기 가 더 자유롭게 공명할 수 있게 의 도하는 행위라고 했던가.
딱 그 표현이 어울리는 악기다.
모든 음표가 다이아몬드처럼 찬란 히 빛을 낸다.
확실히 명품이라는 느낌을 연주하는 내내 받았으며 ‘그녀’가 내는 소 리에 빠져 쉬지 않고 바흐의 A단조 무반주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자 박수 소리가 들렸다.
원래 들었던 20분보다 조금 시간 이 넘었음에도 기다려준 것인지 곧 장 사람이 올라와 파이어버드를 받아들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할아버지 옆으로 가 앉았는데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훌륭한 연주였다.”
“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 구나.”
귀신이다.
“네. 안 사도 될 것 같아요.”
“흐음. 분명 진품이라 했거늘.”
“진품은 맞을 거예요. 너무 완벽했거든요.”
“음?”
“나가요, 할아버지.”
“으음? 정말 마음에 안 드는가 보구나. 시연하길 잘했지. 그래, 가자 꾸나.”
할아버지와 조용히 경매회장을 나섰다.
파이어버드를 연주하면서 처음 느낀 감정은 그 아름다운 음색에 매료 됨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음을 좀 더 제대 로 내기 위해 연주가 따라갈 수밖에 없는 느낌.
연주자는 빠지고 악기만 남은 듯한 기분에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예쁜 연인 같은 느낌이에요. 어르 고 달래도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는 이끌기 어려운.”
“……하핫하! 네가 그런 기분을 안단 말이냐. 내 손자가 이렇게 조숙 할 줄이야.”
“그런 느낌이에요.”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해 봤는데 적당한 표현인 듯하다.
연인은 내 소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더 애가 타는 것이다.
그러나 연주자와 악기의 관계가 그래서는 안 된다.
분명 너무나도 아름답고 황홀할 지 경이었으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다 뤄서는 내 연주를 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나는 연주를 하고 싶은 거지 악기를 돋보이기 위해 현을 켜는 게 아니다.
“한 번 연주해 봤으니 그걸로 됐어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흐음. 그래. 네가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만 더 좋은 물건을 같이 찾아보도록 하자꾸나.”
“네.”
나를 위해 노력하신(실제로는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노력했겠지만)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며 할아버지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별장에 도착해 얼마 안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도 돌아오셨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아버지는 정말 지치셨는지 돌아 오자마자 주무시고 말았다.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지보다도 먼저 결과를 알아버려서 푹 주무시게 두었다.
“합격이라 하는구나.”
그 말을 전할 때 할아버지는 나를 어떻게든 한국에 두기 위해 고민 중 이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