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99화
22. 9살, 운명이 문을 두드렸다(6)
“그래. 잘 가.”
“어?”
잘 가라는 인사를 했더니 진지했던 최지훈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잘 가라고.”
“아니, 그.”
‘뭐가 문제야.’
당당히 자기 무대를 찾아가려는 것 같아 응원했는데 뭔가 최지훈이 생 각했던 일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왜?”
“전학 가잖아. 아쉽거나 보고 싶거 나 하지 않아?”
“전학 가면 못 봐?”
“그건 아니지만……
“어디로 가는데?”
“서울 시립 초등학교. ……음악의 회당 아카데미에도 들어가기로 했어.”
“서울이잖아.”
“응.”
“거기 가면 나 안 볼 거야?”
“아니야! 내가 왜 그래!”
“그럼 문제없잖아.”
최지훈이 어떤 생각으로 각오를 다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환경에 있든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
피아노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이 상 환경은 부가적인 요인일 뿐.
홍승일이 뛰어난 피아니스트고 나 말 고 다른 학생들에게 존경 받는 듯하지 만 분명 그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멀리 가버리면 조금 아쉽겠지만 서 울에서 다니는 거라면 못 만나는 것 도 아니고.
문제될 것 하나 없다.
“……그러네.”
« O ”
흐.
“히히힛. 그러게. 문제없어.”
최지훈이 다시 평소처럼 웃기 시작 했다. 아무래도 전학을 가는 것과 환경을 바꾸는 일이 녀석의 뜻은 아 니었던 듯, 불안했던 모양이다.
“근데 음악의 회당 아카데미가 뭐 하는 곳인데?”
“아. 우리나라 음악 영재들이 모이는 곳이야. 아버지 말로는 음악 영 재 교육 시스템으로써는 우리나라 최고래.”
그 뒤로도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푸는데, 학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다니던 베토벤 같은 곳은 아니지?”
문뜩 최지훈과 처음 만난 음악 영 재 유치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음악 영재라고 하기에는 음악에 조 금 관심 있는 아이들을 보육하는 유 치원일 뿐이었다.
“응.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많이
날 거야. 아, 너도 다닐래? 재밌을 거야. 저번에 한번 가봤는데 환경도 정말 좋았어. 선생님들도 대단한 분 이셨고.”
“난 안 갈래.”
“히잉. 왜?”
“내가 그런 데 가면 생태계 파괴하는 거래. 황소개구리라나 뭐라나.”
“생태계 파괴? 황소개구리?”
고개를 끄덕이자 최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못된 말 누가 했어? 내가 혼내줄게!”
“인터넷 댓글로 있던데.”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카무라마저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린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어 봤자 내 이미지에만 독이 될 거라는 이야기 말이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나니까 그런 데 에 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질투 받을 거래. 내 이미지도 안 좋아지고.”
“아.”
최우철이라는 배경 때문에 알게 모 르게 그런 시기를 받았던 최지훈이 라면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콩쿠르나 그런 데 당분간 은 안 나갈 거야. 나이 차서 성인들 하고 겨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넌 정말 실력인데. 불 공평해.”
착한 녀석이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부자래. 그런 이야기 때문에도 말이 나올 수 있을 거야.”
“아, 맞다.”
“그리고.”
“응?”
“네가 한 이야기 좋았어. 다들 무
대조차 오르지 못해 발버둥 치며 살 거야. 콩쿠르는 그런 사람들도 누구 나 공평한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 까. 분명 의미 있지.”
“응!”
홍승일도 히무라도 나카무라도 사카모토도 내게 콩쿠르에 나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 일을 최지훈의 어리고 솔직하며 고고한 마음이 성공한 것이다.
내가 쌓아올린 유명세와 인맥.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당장에라도 나는 푸르트벵글러에게 연락해 베를린 필하모닉과 피아노 협연을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내 실력에 대해 알 고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 전혀 활동하지 않은 내가 말이다.
그 역시 요행과 배경으로 얻은 무 기는 아니지만 분명 헛소리들이 나 올 것이다.
그런 이야기 무시하면 그만이라 해 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최지훈은 내게 그런 점에 대해 아 주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마워. 말 잘했어.”
“히힛. 난 천재니까.”
아직 그 이름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듯해 항상 그러하듯 부담을 덜어 주었다.
“천재 아니라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해 서 멋진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면 천재가 되지 않을까?”
“천천히 해. 피아니스트 최지훈이 될 생각만 해도 바쁠 거야.”
이미 그 마음가짐은 어엿한 음악가 라 생각하지만.
“오늘 너 조금 친절한 것 같아.”
“난 원래 친절해.”
부디 그 마음이 비와 바람에 흔들 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4년 새해를 맞이해 가족끼리 모여 떡국을 먹었다.
외할아버지는 십 년 가까이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것을 준비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불편해 보였다.
“굳이 런던까지 와서 떡국을 먹어 야 해요?”
결국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를 타 박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도 안 해주셨잖아요. 도빈이 아빠 일도 못 나가 게 일주일씩이나.”
“괜찮아. 연차 다 썼으니까.”
“올해 연차 반을 써버렸으니 문제죠.”
“하하하.”
괜찮다고 하시는 아버지께서도 조 금은 서글퍼 보이는 기색이다.
“흐음. 그 직장 말이야.”
“네, 장인어른.”
“대학 총장으로 있는 친구가 이번 에 교수 자리가 비는데 자네 이야기를 꺼내더군.”
“네?”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자네도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야 지. 언제까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연구도 하고 학생들도 가르치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면접 볼 생각 없느냔 말이야.”
“대학……
아버지는 조금 고민하시는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워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대학에서 관심을 보일 정도라면 아버지께서도 이름 있는 학자셨던 것 같다.
“아버지, 아버지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제 남편 작은 회사지만 엄청 인정받고 있어요. 형 편없는 중소기업이라고 해도 그렇게 그만두게 할 수는 없어요.”
“흐음. 그런 뜻으로 들었다면 오해
다. 나는 단지.”
“그리고 그 일 이후 그렇게 무시했는데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거 받 아들이지 않을걸요? 그렇죠?”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보며 물었는 데 아버지께서는 일단 어머니를 말 리고 싶은 눈치였다.
“아니. 예전 일이고. 확실히……
“거봐요. 그 못된 학계 사람들과는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요.”
“그, 그렇게까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쉽 구만. 난 사위가 다시 하고 싶은 일
을 하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 아버지는 하고 싶으신데 어머 니께서 아버지를 너무 생각하느라 두 분 사이에 간극이 생기는 듯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아버지 이 야기만 나오면 흥분하시는 어머니시 라 조금 도와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 아빠가 원래 하던 일 했으면 좋겠어요.”
“도빈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동시에 나를 보셨다.
아버지는 반가운 얼굴, 어머니께서
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다.
“도빈아, 복잡한 일인데 아빠가 예 전에 아주 못된 사람들한테 당한 게 있어. 그렇게 무시하다가 외할아버지 가 물어보니 어쩔 수 없이 나온 거 니 아빠 자존심에 용납할 수 없을 거야.”
“내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 친구 녀 석이 먼저.”
“아버지는 좀 가만히 계세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직접 말씀하셔 야 할 것 같다.
아버지를 보며 손을 꼭 잡아주자 솔직하게 입을 여셨다.
“장인어른, 저 면접 보겠습니다.”
“봐요, 아버지. 신랑도. ……어?”
“자존심 같은 거 하고 싶은 일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지. 또, 도빈이에 게 당당해지고 싶고. 아빠도 잘하는 게 있다고.”
“ 여보.”
두 분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손을 꼭 잡는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저렇게 뜨거운 걸 보면 결혼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생각했네.”
외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닦으셨다.
“그럼 내일 준비하도록 하게.”
“ 네?”
“면접 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기야 한데 준비도 없이……. 오늘 밤에 가도 내일 아침에나 도착 할 테니 조금 촉박합니다.”
“그런 거 본래 제 실력으로 보는 걸세. 그리고 대학은 한국이 아니라 여기야.”
그 말에 우리 가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어는 잊지 않았겠지?”
아버지의 얼굴이 난감해졌다. 잊으신 모양이다.
“그런 거 직접 들으면 금방 기억할 거야. 운전도 안 하다 보면 까먹은 것 같은데 막상 운전대 잡으면 기억 나지 않은가.”
아무래도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큰 기회이자 시련인 듯하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한 뒤 올라가셨는데 그 모 습이 조금 급박해 보였다.
“무슨 대학이에요?”
“루턴 대학이다. 김 실장이 데려다 줄 거니 걱정 마라.”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준비할 시간 도 필요할 텐데.”
“그쪽에서 먼저 제안한 일이야. 테 메스 쪽에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그 쪽 관련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더 군. 어지간하면 데리고 갈 거다.”
“사업 문제가 아니라 연구 자료를 위한 일이니 예전과 같은 일은 없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똑같은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이에요. 그 일 이 후로 믿었던 동료들한테도 손가락질 당했으니까요.”
“흐음.”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빠가 루턴 대학에서 일하게 되 면 우리는 어디서 살아요?”
“음?”
“ 아.”
“한국에 있어야지. 넌 학교도 다녀 야 하잖느냐.”
“도빈이 아빠가 영국에서 일하게 되면 어차피 이쪽에서 사는 것도 나 쁘지 않을 것 같아요. 도빈이가 음악 하기에도 유럽이 좀 더 쫗은 환경일 것 같기도 하고요.”
확실히 독일과 가까워지니 베를린 필하모닉과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영국에 직장을 얻게 된다 면(그게 아버지가 평생 바라던 일이 라면 더욱이) 어머니도 영국으로 이 주할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다.
“아, 안 돼. 그건 안 된다.”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외할아
버지가 잔뜩 당황하셨다.
“도빈이가 영국에서 사는 건 생각 하지 못하셨나 봐요? 손자 보러 오 려면 영국까지 오셔야 하는데.”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외할아버지의 역정을 듣고 어머니와 마주 보고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