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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98화 (9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98화

    22. 9살, 운명이 문을 두드렸다(5)

    “멋진 연주였어.”

    경연이 끝나고 가우왕이 찾아와 내 게 악수를 건넸다.

    그가 연주한 여섯 곡을 듣고 그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기에 그 손을 기쁜 마음으로 잡았다.

    “멋진 연주였어요.”

    “분하지만.”

    분하다면 더욱 정진할 터.

    그러지 않다면 이렇게나 성장할 리 없다. 단순히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인물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고 그는 군말 없이 그의 매니 저와 함께 떠났다.

    “생각보다 뒤끝이 없어 보이네요.”

    “그러게. 인터뷰만 봤을 땐 그런 진상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박선영의 말을 히무라가 동조했다.

    나 역시 화가 잔뜩 나 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분명 뭔가 그에게는 분한 일이 있었던 듯싶다.

    뒤이어 경연을 보러 와준 사람들이 대기실로 찾아와 주었다.

    “훌륭했다.”

    “고마워요, 세프.”

    “최고의 무대였네.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더군.”

    “무대 위에선 더 집중하게 되니까요.”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 외에도 많은 사람에게서 축하와 감사 인사를 받았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는지 경연을 끝내고도 두 시간이나 대기실 에서 꼼짝없이 묶여 있었다.

    “도빈아, 마리 얀스라는 분이 찾아 오셨어.”

    “마리 얀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잘 기억 이 나질 않아 히무라에게 되물었다.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이야. 세계 최 고의 거장이지.”

    “ 아.”

    푸르트벵글러가 있었더라면 대기실 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가 연말, 연초 연주회로 바빠 서둘러 귀국하여 다행이다.

    “만나볼게요.”

    히무라에게 뜻을 전하자 곧 암스테 르담의 지휘자 마리 얀스가 대기실 로 들어왔다.

    흰 머리가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눈 이 깊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가워요, 마리 얀스.”

    “반갑네, 어린 베토벤.”

    악수를 나누는데 마리 얀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린 베토벤이라니.

    뜨끔한 말을 한다.

    “그보다 완벽한 베토벤은 들어본 적 없었네. 꼭 경의를 표하고 싶어 찾아왔네만. 바쁜 와중에 실례하게 되었군.”

    “바쁘지만 시간 정돈 낼 수 있어요.”

    “하하하! 나를 알고 있는가.”

    “기사에서 본 적 있어요.”

    “기사?”

    “푸르트벵글러를 놀리려고 세계 최 고의 오케스트라를 뽑은 기사를 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 마리 얀스의 암스테르담이 1위를 했어요. 꽤 예 전 기사였는데.”

    “아, 기억이 나는구만. 빌헬름이 별 말 없던가?”

    “웬걸요. 재밌었죠.”

    처음 보지만 공통된 이야기가 있어 몇 번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대할 수 있었다.

    “연주에 이끌려 찾아오긴 했네만 어린 친구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좋을지 곤란했건만 의외로 동년배를 대하는 것처럼 편하구만.”

    “저도 그래요.”

    “하하하하! 이거 다 늙었다고 생각 했는데 의외로 내 정신연령이 젊은 모양이구만.”

    “도, 도빈아.”

    히무라와 이승희가 난감하다는 듯 안절부절못했지만 정작 마리 얀스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정말 훌륭한 연주였네. 특히 베토벤의 C단조. 베토벤을 좋아하는가?”

    “그럼요.”

    “자네가 연주한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을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든 가도 록 하지. 부디 내가 죽기 전에 들려 주었으면 하네.”

    내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라.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그런 일도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연주를 내가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데 아무래도 내 의도와 현재 내 곡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보니.

    그런 것을 지금의 방식을 어느 정 도 차용하여 새롭게 연주하는 것도 분명 재밌을 것이다.

    “그렇게 할게요.”

    “음. 꼭 찾아 듣겠네.”

    마리 얀스가 떠난 뒤에도 기자들이 몰려들어 인터뷰를 정신없이 진행했다.

    덕분에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29 일을 지난 시간이었고 씻지도 않은 채 곧장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생각보다 즐거웠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나와 대결을 하기 위해 더욱 성장하여 더 깊이 있는 연주를 했다.

    그 곡을 나 역시 연주하고 많은 사람들과 그 기쁜 행위를 공유한다.

    예전 귀족들의 심심풀이로 해야만 했었던 ‘대결’과는 사뭇 다른 느낌 이었다.

    음악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자리.

    영혼이 충족되는 듯한 착각에 몸은 고단하지만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하 루였다.

    ‘그러고 보니 최지훈이 안 왔네.’

    콘서트홀에 온 것까지는 봤는데 아무래도 인파가 너무 많아 먼저 돌아 간 듯.

    시간도 너무 늦었기에 한국으로 돌아간 뒤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우리 가족은 채은이네 가족과 함께 간단히 점심을 먹고 귀국했다.

    채은이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족과 함께 초청했는데, 느끼는 바 가 확실히 있는지 자꾸만 어제의 연주곡을 홍얼거렸다.

    “재밌었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채은이는 나한테 꼭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 조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 따따단〜 가르쳐 줘.”

    실력이 부쩍 늘었고 또 언제까지나 연습곡만 시킬 수는 없어서 그러지 않아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생각 하던 차였다.

    “그래.”

    채은이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최근 1년 사이, 큰 폭으로 성장한 최지훈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여유롭게 지낸 뒤, 다음 날 최지훈 에게 문자를 보냈다.

    [피아노 치자.]

    [만세! 지금? 어디서?]

    [내 녹음실. 어딘지 알지?]

    [응!! 준비해서 갈게!]

    언제나 씩씩한 녀석이다.

    ‘그런 점이 좋은 거지만.’

    옆집으로 가 녹음실로 가자고 하니 옆집 아주머니가 가족 모음이 있다며 채은이를 말렸다.

    엉엉 우는 채은이를 달랜 뒤 녹음 실로 가 연습을 하고 있자니 곧 최지훈이 들어왔다.

    “도빈아〜”

    들어오자마자 달려와 안기에 밀어 내곤 말했다.

    “왜 이래?”

    “반가워서. 히히.”

    “그제도 봤잖아.”

    “그래도 반가운걸?”

    싱거운 녀석.

    두 대의 피아노에 각각 앉았다.

    “오늘은 뭐 칠 거야?”

    “연주회 복기.”

    “복기?”

    “응. 경연 때 연주한 부분에서 아 쉬운 부분이 좀 있었는데 그걸 연습 해 보려고.”

    “아.”

    “중요한 일이야. 빼먹으면 안 돼.”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최지훈을 보 며 씩 웃고 집중했다.

    가우왕이 마지막으로 선곡했던 슈 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A단조.

    이 독특한 느낌의 소나타는 역동적 인 분위기로 그의 다른 곡에서 볼 수 있는 장점보다는 어떤 새로운 시 도를 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멋진 친구였지.’

    죽기 얼마 전 찾아와 울면서 뛰쳐 나간 모습이 아직 눈앞에 선하다.

    그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나중에 다시 태어난 뒤에야 사카모토로부터 그가 가난하고 힘겹게 음악을 했다는 것을 들은 나는 다시 한번 안타까웠다.

    그를 기리고 추억하기 위해.

    다시금 아쉬웠던 부분을 복기하며 연주를 이어나갔다.

    “와.”

    연주를 마치자 최지훈이 작게 감탄 했다.

    “좋지?”

    “응! 엄청 쫗아. 슈베르트지?”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주목할 건 3악장. 스케르초 랑 트리오의 대조점이야.”

    “그 집요한 부분?”

    ‘집요하다라. 적절한 표현이다.’

    “자, 그럼 쳐보자.”

    악보를 가져다주니 평소 겁부터 내는 것과 달리 곧장 악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특하긴 하다만 행동이 뭔가 달라 졌는데,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

    ‘이 몸의 연주에 감동한 건가’라고 생각하기엔 평소에도 내 연주를 많이 듣는다.

    그렇게 두 시간, 세 시간이 흐르고 엉망진창이지만 일단은 끝까지 연주를 해본 최지훈이 다시 한번 마구마 구 틀려대며 건반을 누른다.

    조금씩이지만 분명 어디서 잘못했는지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잠 깐잠깐 한마디씩 거드는 것 이외에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아직은 곡을 해석해 연주하는 단계 가 아니라 정확히 연주하는 데 집중 할 단계다.

    조금 답답하지만.

    저 집중하고 있는 얼굴을 보면 괜 스레 흐뭇해진다.

    피아노가 아니라도 녀석에게는 너 무나 많은 것이 있다.

    잘생긴 얼굴 부유한 집안 그리고 명석한 머리. 그 외에도 사람을 대 하는 태도나 여러 면에서 참 바른 아이다.

    그럼에도 저렇게나 말없이 피아노를 대함에 집중한다.

    저 나이 때의 평범한 아이의 집중 력은 한 시가도 채 안 될 터. 그럼 에도 벌써 몇 시간째 피아노 앞에 매달려 집중의 끈을 놓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재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집착.

    그 집착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알 방도 없다만 그것이 최지훈을 피아노 앞에 앉아 있게 해주는 것이리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상 그대로.

    녀석은 훗날 이름을 남길 음악가가 될 것이다.

    단지 하나 걱정이 있다면 그 ‘집 착’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 해 생긴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녀석의 아버지가 강요를 하는 듯해 그것이 걱정될 뿐이다.

    “후우.”

    “수고했어.”

    “나 좀 늘었어?”

    밝은 웃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녀석을 보며 같이 웃어주었다.

    “하나도 안 늘었어.”

    “히 잉.”

    “기죽은 척 하지 마. 하나도 안 그 런 거 다 아니까.”

    “……헤헤. 그러게. 열심히 하면 도 되지.”

    또 평소와 다른 반응.

    아무래도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는데?”

    거짓말이다.

    오늘 녀석을 보며 계속해서 들었던 이상한 감각이 확신이 되었다.

    “무슨 일인데?”

    “그냥. 빨리 안 늘어서 조금 속상 할 뿐이야. 신경 쓰지 마.”

    잠시 물을 마시고 쉬는데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지라 묵묵히 그 말을 들어주었다.

    “도빈아, 그거 알아?”

    “뭘?"

    “전 세계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수만 명이나 있대.”

    ‘그렇게나?’

    “몰랐네.”

    “나도. 히힛. ……집사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는데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닌 사람까지 생각하면 훨

    씬 더 많을 거래.”

    “그렇겠네.”

    “그런데 왜 우리가 아는 피아니스트는 그렇게 적을까? 프로가 되기 전에 포기하는 걸까?”

    “그래서 물어봤는데 프로가 되어도 무대조차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대. 넌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안다.

    대답을 않고 있자 최지훈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몰랐어. 나는 열심히 노력하 면 항상 무대에 오를 수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래. 원래는 그러지 못한대. 그게 정상이래.”

    “난 피아노만큼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건 줄 알았는데 피아노도 아버 지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 야.”

    “아니야.”

    최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콩쿠르에 더 열심히 나가 려고.”

    “콩쿠르?”

    “응.”

    “공평하니까.”

    어린 최지훈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 리지 않았다. 마치 굳게 다짐한 기 사의 그것처럼 흔들림 없이 전달되었다.

    “우리 아버지 부자고 다른 아이들 과 출발선부터 다르잖아. 다른 아이 들은, TV에 나오지도 못하잖아. 그 래서 부러움도 질투도 많이 받는 거 같아.”

    최지훈이 주먹을 불끈 쥔다.

    “분해. 나도 노력했는데, 그런 걸로 내 노력이 부풀려지거나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 분해.”

    “그치만 콩쿠르는 달라. 일단 모두 가 무대에 오를 수 있잖아?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연주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얼마나 많이 음악을 포기하는지 들었어. 그래서 난 콩쿠르에 나갈 거야. 그들과 같은 선에 서 연주하고 싶어. 그래야 내 노력 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최지훈이 나를 보며 말을 마쳤다.

    “나 내년에 전학 가.”

    그 굳은 눈빛과 목소리.

    내 벗은 이미 한 사람의 어엿한 피아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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