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96화
22. 9살, 운명이 문을 두드렸다(3)
두 대의 피아노가 무대 위에 마주 하고 있다.
두 천재 음악가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보냈다. 그들 의 용기와 향상심을 향한 응원이자 격려였다.
배도빈은 차분히 인사를 한 뒤 피
아노 앞에 앉았으며, 가우왕은 팔을 휘감아 가슴에 대고 인사했다.
그 모습만 봐도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자, 무엇으로 나올 테냐.’
가우왕이 피아노 너머로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배도빈을 바라 보았다.
적막이 흐르고.
배도빈이 연주를 시작했다.
♪♫♬
♪♫♬
‘이것은.’
동시에 관중석을 채운 사람들이 놀 라고 말았다.
현대 음악의 시작을 장식한 러시아 출신의 거장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그의 초기 짙은 러시아풍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페트루슈카의 제3악장 은 빠르고 다채롭기로 유명하다.
또한 가우왕이 리사이틀 때마다 연주하는 그의 특기 곡이기도 하다.
‘무슨 짓이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가우왕은
수천 번 연주했던 곡을 듣는 순간 인상을 썼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많이 고민했건 만 단 한 번도 상정하지 않았던 곡 이 나오자 놀랐으며.
다시 한번 그의 자존심에 상처가 생겼다.
‘내게 맞춰주고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네게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뜻이냐.’
그러나 그 분노는 오래 가지 않았다.
‘ 흐음.’
사카모토 료이치가 작게 고개를 끄 덕였다.
기묘한 음률 속에 전달되는 공허함.
너무나 많은 음표들이 빠른 속도로 연주되는 사이에 솟아나는 긴장감.
이보다 완벽한 페트루슈카를 들어 본 적 없었다.
‘ 역시.’
배도빈이 연주를 시작하고 눈을 감 은 미카엘 블레하츠는 어떠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배도빈의 연주는 마치 장난감을 발 견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장면 이 보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음표마다 전달되는 기묘한 상황과
익살스러운 묘사.
피아노 연주만을 들었을 뿐인데 발 레 공연을 함께 보는 듯 선했다.
이 두 거장의 느낌을.
지난 십 년 이상을 페트루슈카를 연주한 가우왕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완벽했다.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 생각했던 선 곡이 너무도 완벽하게 연주되고 있다.
정확한 터치와 본디 빠르기보다 좀 더 빠른 속도 그럼에도 전달되는 상 황적 비극에 대해 너무도 잘 표현하
고 있었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가우왕은 배도빈의 연주에 집중했고.
이윽고 2분을 조금 넘는 짧은 시 간 뒤에 배도빈이 연주를 마쳤다.
짝짝짝짝짝 1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콘서트홀이 떠나 갈 정도의 박수 세례였다.
이 짧은 시간 피아노를 통해 하나 의 이야기를 ‘보여준’ 피아니스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연주를 마친 배도빈은 차분히 손을
내리고 상대방의 연주를 기다렸다.
‘너와 내 차이를 알겠느냐.’
배도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가우왕은 마치 배도빈이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까득.
가우왕 역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피아니스트 인생을 대표하는 곡인만큼 질 수 없다는, 질 리 없다는 자신이 있었다.
‘과연 가우왕이로군.’
‘역시나 훌륭해.’
가우왕의 연주는 너무도 정확했고
너무나 빨랐다.
수천 번의 연주로 그만의 해석이 담긴 페트루슈카는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청중이 빨려 들어갈 것 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마치 최면과 같이.
‘지지 않는다.’
‘내가 이 곡으로 질 것 같으냐.’
‘내가 최고다!’
본인에게도 최면을 걸 듯, 몰입했던 가우왕이 연주를 마무리하자 앞 선 박수 소리만큼이나 크게 환영을 받았다.
박수 소리가 모두 가시자.
무대 옆에 자리하고 있던 사회자 라 타우가 마이크에 입을 댔다.
“두 연주자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 러면 심사위원단의 평가가 있겠습니다. 개별 채점이니 심사위원께서는 신중히 판단하시고 마련된 버튼을 눌러주십시오.”
심사를 맡은 여섯 명은 깊게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양측 모두 더없이 훌륭한 연주를 했기에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라 타우가 재촉했을 때야 결정을 내렸다.
“첫 번째 곡. 페트루슈카 3악장에 대한 결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대 정면의 스크린에 배도빈과 가우왕의 이름이 떠올랐고 그 아래 동 시에 4분음표가 하나씩 생겨났다.
우선 한 표씩 획득했다는 뜻.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내가 질 리 없다.’
가우왕은 긴장한 듯 스크린을 보고 있었고 이내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 아래에 음표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5 대 1. 배도빈 군이 첫 승을 가져갑니다.”
라 타우의 발표에 관중들은 반응하 지 않았다.
승자에 대한 축하만큼이나 패자에 대한 예우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다섯 곡이 남아 있으므로 이 후 대결에 가우왕이 흔들리지 않도 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대표곡에서 패배했다는 생각에 가우왕은 잔뜩 흥분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피아노 너무 아 슬아슬하게 보이는 배도빈을 보았다.
‘••••••뭐냐.’
너무나 차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배도빈은 연주를 마쳤을 때와 조금 도 다르지 않게 있었다.
그 모습에 가우왕도 정신을 차렸다.
저 어린아이가 평정을 지키고 있는 데 고작 한 곡 뒤쳐졌다고 해서 추 태를 보일 순 없었다.
피아노의 황태자로서의 면모에 스 스로 흠집을 낼 순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가우왕이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첫 번째 곡을
연주했다.
♪♫♬♪♫♬
‘ 뭐야.’
상대방의 곡 선택에 놀란 것은 가
우왕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도전적인 선곡에 배도빈은 슬 며시 미소 지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다단조.
‘오랜만이네.’
그가 막 청력에 문제를 느끼던 시 절, 방황하던 청년 루트비히는 그의 불행한 환경과 음악에 대한 간절함 끝에 이 곡을 지었다.
부정하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극복하기 위해 처절히 싸웠던 그는 그의 여덟 번째 소나타에 ‘Grande Sonate pathbtique’라고 이름 붙였다.
‘비장한 대소나타.’
아직 미숙한 그의 상대가 그 1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전이로군.’
‘증명하려는 게야.’
가우왕의 열연을 듣는 심사위원들 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배도빈과 많은 원로 음악가들이 뛰 어난 피아노의 황태자에게 했던 말.
‘표현력과 이해도가 부족하다.’
많이 연주한 레파토리에서는 더없이 훌륭하지만 그 외의 곡에서는 아 쉬움이 있다는 평이었다.
특히 고전파 시기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러한 평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 경연에서 베토벤의 곡을 선택함으로 써 그 오명을 벗겠다는 가우왕의 의 지였다.
그러나 그만의 아이덴티티만은 지 키기 위한 방책으로 4페이지부터 연주를 시작한 가우왕에게.
곧 청중들이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의 장점은 누가 뭐라 해도 정확 한 속주.
제시부를 건너뛰고 발전부부터 연주를 시작한 가우왕은 그 기량을 유 감없이 뽐냈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훌륭하군.’
전과 달리 속주에만 힘을 준 게 아니라 힘 있게 내려치는 그의 무게 감 넘치는 연주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냐.’
가우왕 역시 만족했는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배도빈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난 두 달간 밤을 새워가며 연습했기에.
완성했다고 자신했기에 가우왕은 배도빈이 이 곡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 궁금했다.
굳이 마이너한 곡이 아니라 ‘비창’ 과 같이 유명한 곡을 선택한 데에는 아직 레파토리가 좁을 게 뻔한 배도빈과 정면승부를 벌이고 싶다는 마 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웃어?’
언뜻 봤지만 배도빈은 웃고 있는 듯했다.
여유인가 비웃음인가.
가우왕이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1799년 1월 빈.
“아니야. 아니야!”
쨍그랑!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머그컵이 산 산이 부서져 내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간헐적으로 들리던 이명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제 드디어 빛을 보는가 싶었는 데, 신은 내게 또다시 시련을 안겨 주려 하고 있다.
문득 내려다본 악보를 보곤 분에 못 이겨 찢어버렸다.
얼마나 더 음악을 할 수 있는가.
‘곧 그날이 올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자꾸만 치 미는 불안감에 미친 듯이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음을 잊지 않으려고.
홀로 C음을 반복해 누른다.
도. 도. 도. 도.
머리에 가슴에 영혼에 각인하기 위 해 몇날 며칠을 건반을 누르고 악보를 탐독하기를 벌써 수개월째다.
그럴수록 나의 영혼은 산산이 찢어 지는 듯하여 산새가 눈태풍에 집을 잃고 죽어가는 것처럼 싸늘해진다.
지난 고난을 이겨내고 빈에서 인정 받기 시작한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시련에 나는 신을 원망했다.
나는 채 내 속에 담긴 악상을 다 끄집어내기도 전에 음악을 잃을 것 이다.
베트호펜 가문의 장남은 죽지 않으
나 음악가 루트비히는 죽어 사라질 것이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설사 신이 나를 죽이려 한다 해도 그럴 수는 없다.
내 안에 남은 악상을 끄집어내야만 한다. 그것만이 이 내 영혼이 위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와 같아서는 안 된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그 천재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
들을 따라 걸어서는 내 영혼이 위로 받을 길이 없다.
시간이 없다.
신이 내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남은 시간만이라도 내 영혼을 달래 기 위한 나의 울음을 연주해야 할 것이다.
한달 후.
“오오! 베트호펜. 이 친구. 깜짝 놀랐네. 대체 언제 이런 곡을 만든 겐 가.”
“이렇게나 마음을 흔드는 곡은 처 음이야. 대단해. 정말 대단해. 독특 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구만.”
“이건 어떻게 발표하면 되겠나.”
“비장.”
“ 음?”
“비장한 대소나타로 해주시오.”
나 루트비히가 새롭게 태어날 첫 곡으로 그 의지가 담긴 ‘비장한 대 소나타’를 넘겨주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