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92화 (92/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092화

21. 8살, 1학년(8)

일본에서 돌아온 뒤.

두 번째 앨범, ‘배도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만들다 보 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좋은데.’

그리고 여름방학과 2학기 중간고사

를 치렀을 무렵에 아홉 곡의 협주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더 퍼스트 오브 미’의 테마곡을 녹음하면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자연을 주제로 한 곡들이었다. 예를 들어 ‘숲’은 숲에서 연주해 자연스 럽게 숲의 바람과 새들의 노래가 더 해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간중간 변주를 해야 해서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의 실력이 뛰어 나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말 이다.

‘누구랑 하지.’

녹음을 누구와 함께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히무라가 가우왕

을 다시 한번 추천하였다.

“저번에 거절했잖아요.”

“그래도 꾸준히 연락을 해와서 말 이야. 나도 사실 그때 일이 이뤄지 지 않아서 아쉬웠어. 가우왕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거든.”

히무라가 이렇게까지 추천하고 저 쪽에서 오랜 시간 몇 번이나 요청을 할 정도니 한 번쯤은 만나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와 만나게 되었다.

“반가워.”

“반가워요.”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 만으로 스 물아홉 살의 젊은 중국인인 가우왕 은 역시 예전 느낌대로 대단한 기교 파였다.

고작 하루 연습했을 뿐인데 처음 보는 내 피아노곡을 곧잘 연주하게 되었다.

화려한 느낌을 살린 소나타 형식의 ‘폭포’와 오랜만에 예전 감성을 떠 올려 만든 ‘루시퍼’에 대해서는 얼 마간 더 연습하면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감정 표현에 대해서는 좀 아쉽지 만.’

히무라의 말대로 이만한 피아니스트를 섭외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 걸 감안해 보면 어느 정도는 타협을 해 야 할 것 같다.

그렇게 가우왕과 나흘째 곡을 맞춰 보는데 그가 히무라를 통해 물었다.

“이제 슬슬 계약해도 되지 않겠어? 맞춰보는 것은 충분한 것 같은데.”

히무라가 그의 말을 적당히 순화해 내게 전달해 주었는데, 실제로는 상 당히 건방지게 말한 듯했다.

태도가 무척 오만했기 때문이다.

“저 사람 정확히 뭐라 그랬어요?”

내 성격을 잘 아는 히무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대로 전해주었다.

“자기가 한국에까지 와서 4일이나 맞춰주었다고 생색을 내는 거야. 더 이상 지체하지 말자는 거지.”

“네.”

“사실 가우왕 정도 되는 사람이면 그렇게 말할 만도 해. 너와 함께하 기 위해서 우리를 배려한 것도 사실 이니까.”

가우왕이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분명 뛰어난 피아니스트고 그의 연주는 화려하다.

고개 젖히면서 긴 머리카락을 상모 돌리 듯 휘두르는 건 싫지만 말이다.

“흉하게 왜 저래요?”

“하하하하하!”

왜 저렇게 피아노 앞에서 설쳐대냐는 내 질문에 히무라가 설명한 쇼맨 십이라는 것도 관객의 반응을 이끌 어내기에 도움이 되는 수단 같다.

연주만으로 승부하는 게 옳다고 생 각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것도 연주 회의 일부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아. 버릇 인가.’

손놀림은 빠른데 건반을 끝까지 누 르지 않는 것도 불만이었다.

처음에는 곡 해석에 대해 생각이 다른가 싶었는데 모든 음을 가볍게 치는 걸 봐서는 내가 악보에 적어둔 지시사항을 무시하는 모양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굳이 함께 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타협을 했지.’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고 분명 강점 이 있지만 함께하기엔 꺼림칙한 점 이 있다.

특히 같은 음을 반복 연주하는 전 조 단계는 이해도가 전혀 없었다.

긴장감을 유발하는 아주 중요한 부 분이라 한마디 했다.

“가우왕, 여기 음 표현이 잘못됐어요•”

“뭐?”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해 모 르는 것 같아 피아노 건반을 눌러 직접 들려주었다.

“이렇게 음마다 다르게 연주해야 의도한 느낌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박자도 음계도 똑같잖아?”

“건반을 누르는 방식에 따라 달라요. 빠르고 깊게 눌러야 해요. 앞선 음은 간결하게. 그래야 뒤따르는 음

이 좀 더 울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하하하하!”

크게 웃은 가우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래서 이런 트집을 잡는 건가?”

“가우왕 씨,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 니까, 히무라 쇼우 씨. 당신이 듣기 에도 제 연주와 방금 배도빈이 낸 소리가 다릅니까?”

“그건••••••

가우왕이 히무라에게 뭐라 말했고 히무라는 그에 대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뭐래요?”

“네 연주와 자기 연주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 음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야 있지. 하지만 울리는 느낌을 주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직접 듣고도 모르겠어요?”

히무라가 적당히 말하곤 있지만 이 미 가우왕의 비아냥대는 태도만 봐

도 매우 무례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아노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 지조차 모르는군. 현을 치는 해머는 그 세기에 따라 달라질 뿐이야. 울 리는 느낌? 나를 4일씩이나 머물게 해놓고 이제 와서 구조적으로 불가 능한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하지?”

이 사람은 멍청이다.

건반을 치는 기계일 뿐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건반을 칠 때의 손가락의 접촉면, 깊이에 따라 얼마든지 음색에 변화

를 줄 수 있고 앞선 음과의 배치와 연주법에 따라 얼마든지 여운을 남 길 수 있다.

미세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바에는 내 속 주에 집중하라고. 이런 느린 곡으로는 나도 듣는 사람도 만족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을 조금도 중요하게 생 각하지 않는 이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히무라.”

“응?”

“정확히 전달해 주세요. 당신과는 연주하지 않겠다고 분명히요.”

“도빈아, 잠깐.”

“관계 생각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도 이 사람과 함께할 생각 없어요. 수준 이하예요.”

“뭘 걱정하는지 아는데, 이런 사람 과 함께 녹음을 해서 음반 질 낮출 바에야 차라리 내지 않는 게 나아요. 그러니 거절해 주시고 앞으로도 이 사람과 함께하지 않았으면 해요.”

“……알았다.”

히무라는 입장상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단호해져야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순화해서 말할 거라는 것은 알 고 있지만 가우왕이란 사람과 녹음 작업을 함께할지 말지에 대해서는 내가 확고해야 히무라도 움직이기 수월하다.

결국 히무라가 그를 돌려보냈고.

그와는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가우왕, “배도빈의 음악세계는 유아적”】

[독일 아리아. 가우왕. 배도빈의 공 동 작업이 불발됨에 유감 표명]

[세기의 만남이 비극으로 치달은 이유는기

2년 전, 천재 작곡가 배도빈의 두 번째 앨범 녹음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합류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비록 배도빈의 일정상 당시에는 무 효화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가우왕의 소속사 ‘독일 아리아’는 샛별 엔터테

인먼트에 러브콜을 보내왔다.

두 사람의 콜라보에 대한 기대가 나날이 이어지던 와중, 결국 사전 미팅을 가지던 두 사람이 결별했다는 소식이 지난 19일 양측 소속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가우왕 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뛰어나지만 신 이 그에게 연주 실력과 인성은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독단적이며 억지를 부렸습니다.”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가우왕과 달 리 ‘독일 아리아’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키고 있지만 샛별 엔터테인먼 트의 대표 히무라 쇼우가 반론을 제 시하면서 여론은 첨예하게 대립 중 이다.

•이필호 (관중석)

가우왕은 자신의 연주를 지적한 배도빈을 공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역시 두터운 팬층을 가지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계에서 그의 실력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극 소수였다.

간혹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곡 해석이 너무 가볍다고 평했지만 그 의 연주회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것이 가우왕의 자신감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의 티켓 파워는 현재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압 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가우왕 이 저렇게 말하고 다니냐?

ㄴ 샛별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음악적 의견 차이 때문이라고 발표했음.

ㄴ 근데 저딴 식으로 말함? 얼척 없네. 애기 상대로 무슨 짓이냐?

ㄴ 그러니 더 그런 듯. 자기보다 한 참 어린애한테 지적당해서 바들바들 대는 거 아니겠음?

ㄴ 진짜 구질구질하다.

ㄴ 다른 건 몰라도 피아노 실력으로는 가우왕 거장급인데 저리 말할 정 도면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님?

한국 내 반응은 배도빈에 대한 우 호적이었다.

그러나 가우왕의 중국 팬들이 나서 면서 사건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ㄴ 도빈배은 연장자 선배 악사까지 예우을 갖춰야 한다.

ㄴ 번역기 제대로 돌려라.

ㄴ 그래미상 받은 음악가한테 충고 들었으면 아,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쪼잔하게 십랔ㅋㅋㅋ

ㄴ 한국은 속국으로써 분수대를 모름.

ㄴ 와, 살다 살다 이런 개삽소리를 듣네. 속국이 뭐? 짜장면 새끼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ㄴ 가우왕이 뉘 집 애냐? 배도빈보 다 유명함? 죽음의 유물 1, 2부 OST만 해도 버로우 타야지.

ㄴ 피아노는 가우왕이 더 잘 칠 듯.

ㄴ 응~ 개소리~

ㄴ 배도빈이 작곡가로서 성공한 건 맞지만 연주자로서는 아직임.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모를까. 솔직히 피아노는 연주회 한 번 안 했잖아. 어 디 콩쿠르 나가서 상을 탄 적도 없고. 증명되지 않은 걸로 싸우지 말 고 그냥 무시하셈. 님들이 안 그래 도 배도빈 천재인 거 모르는 사람 없음.

ㄴ 저 새끼들이 지랄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이 빡대가리야.

각 국가의 팬들 사이에서 논란은 더욱 확산되었다.

결국에는 ‘누가 더 피아노를 잘 아 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해 중국 측 클래식 팬들은 실적을 입증한 가우왕에 비 해 배도빈은 여태 보여준 것이 없다 고 비난했다.

한국 팬들도 배도빈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의 연주를 배도빈이 직접 연주한 거라면서 반 격에 나섰지만 그 외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적이 없었기에 자꾸만 밀리는 상황이었다.

ㄴ 거장 가우왕 >>> 반도 꼬맹이 ©

ㄴ 아우 개빡치네.

ㄴ 이 지경이면 차라리 둘이 어디서 붙었으면 좋겠다.

ㄴ O X OX

ㄴ 근데 도빈이 진짜 피아노 잘 치는 거 맞음?

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던 유장혁 회장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당장 법적 대응을 하기 위해 준비했다.

“가우왕인지 가왕인지 그 새끼랑 소속사 고소해!”

“네. 알겠습니다.”

유장혁 회장의 성격을 잘 아는 김 실장은 군말 없이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서둘러 방을 나섰다.

‘후우. 큰일났구만.’

유장혁 회장을 10년 넘게 보좌한 그도 지금처럼 화가 난 유 회장을 본 적이 없었다.

“망할 놈의 새끼들. 감히 내 새끼를 건드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유장혁 은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회장님, 손자 분 가족 도착했습니다.

“오, 그래?”

잠시 뒤 딸 가족이 들어서자 유장 혁 회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귀여운 손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안녕하세요.”

“그래그래. 도빈아. 어서 와라.”

포옹하는 것을 꺼려 하는 배도빈을 억지로 끌어안은 유장혁에게 유진희 가 물었다.

“실장님 급하게 가시던데, 무슨 일 있어요?”

“아. 그 가우왕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일 좀 처리하라 시켰다.”

그 말을 내뱉자 품에 안겨 있던 배도빈이 말했다.

“무슨 일이요?”

“그런 놈들은 본때를 보여줘야지. 이 할아버지만 믿어라. 입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단단히 혼을 내주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음?”

“도빈이가 그렇게 자신 있으면 연주회하자고 얘기했대요.”

유진희의 설명을 들은 유장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도빈을 보았다.

실력으로 찍소리 못 하게 눌러주겠다는 말인데, 그 패기는 높게 사지 만 선뜻 걱정이 되었다.

“그걸로 정말 괜찮으냐?”

“네. 연주 대결을 하면 보러 오는 사람도 많을 거래요.”

“그렇기야 하겠지.”

“방송도 할 수 있대요. 그럼 사람 들도 많이 보고요.”

“그야……

“혼도 내주고 돈도 벌면 좋잖아요. 그래서 해보자고 했어요.”

“뭐, 뭐라고?”

어린 손자가 그 많은 사람이 욕을 하고 비난을 해서 얼마나 상심이 컸 을까, 걱정했던 유장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실력을 증명하 고 그로 인해 돈까지 벌겠다는 생각 에 기특하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엄마 아빠랑 히무라도 할아버지랑 똑같았어요.”

“정말 아버지 닮아서 그런지 못 말 려요. 승일 아저씨도 신나서 도와주겠다고 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배도빈은 어른 중 유일하게 자신의 편에서 대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홍승일을 이용.

결국에는 히무라 쇼우의 승인 아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걸로 돈 벌면 할아버지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손자의 말에 유장혁은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 귀여운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분노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내 손자라면 그래야지. 할아버 지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뭐든 도와 주마. 장소는 준비되었느냐.”

“걱정 마세요.”

배도빈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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