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91화
21. 8살, 1학년(7)
“희망?”
“그래. 희망이다.”
관객들이 일어서 빠져나가기 시작 했다.
“수재 남궁예건을 보고 많은 아이 가 피아니스트에 대한 꿈을 키울 거
다. 하지만 아쉽게도 예건이는 좋은 피아니스트지 세대를 이끌 재목은 아니야. 하지만.”
귀가하는 관중들로 혼잡하고 시끄 러운 와중에도 홍승일의 올곧은 눈 빛과 의지에 찬 목소리는 온전히 전 해졌다.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있다. 후대 만이 아니라 이미 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 그런 네가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은 어쩌면 의무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네가 많이 활동할수록 사람들은 클래식을 사랑하게 될 거다.”
“그러기에 희망이다. 클래식 음악 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어줄 희망 말이다.”
한 명의 뛰어난 음악가가 생김으로 써 음악이 한 번 더 발전한다라.
“이제 왜 내가 콩쿠르에도 나가도 연주회도 많이 하라고 하는지 알겠느냐?”
입맛을 다시자 홍성일이 다시금 일 장연설을 이어갔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후대에 큰 영 향을 미쳤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만 해도 말이다. 특히 베토벤은 세대를 바꿀 정도로 위대한 음악가
였다. 낭만 시대의 음악의 시작은 베토벤이 만들어낸 것이지.”
‘가끔은 기특한 소리도 하네.’
“그렇게 시대가 낳은 천재들에겐 분명 그 역할이 주어진 게다. 음악 은 수백 년간 축적된 그들의 유산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축적된 음악을 후대로 전하지 못했다. 나 외에도 정말 많은 음악가가 더 좋은 음악을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그 가 능성을 죽적했지만 적어도 내가 본
사람 중에선 그걸 제대로 전달한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 도빈아!”
홍승일이 말하는 도중에 담임선생 이 우리를 불렀다.
“그러나 너는 가능해.”
홍승일의 어조는 단호했다.
“너는 가능하다. 너는 이 클래식 음악계를 아울러 더 나은 곳으로 이 끌어갈 이정표가 될 아이다. 이 자 리에 있는 사람들이 노력하여 축적 한 것들을, 부디 언젠가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
무슨 말을 하나 싶더니.
그가 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는 알겠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내가 더욱 활 발히 활동하면서 클래식 음악을 향 유하는 사람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 중 이것만은 잘못 되었다.
“틀렸어요.”
“뭐?”
“바흐나 모차르트가 대단한 사람이 긴 하지만 그들 때문에 시대가 만들 어진 건 아니에요. 헨델, 하이든, 로 시니, 살리에리 그 말고도 수없이 많았던 거리의 악사들까지. 그들 모
두가 있었기에 지금의 음악이 있는 거예요. 위대한 음악가일지언정, 한 사람이 그런 거창한 일을 하진 못해요.”
바다와 같은 바흐가 위대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분명 위대한 음악의 아버지.
그러나 그만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고 후대 음악가, 평론가들의 허상이다.
내가 빈에 있을 적에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은 천재가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모차르트와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로시니와 살리에리 선생님의 음악이 더 사랑받았던 게 사실이다.
더하여, 다시 태어난 뒤에 내 후대 에도 많은 음악가가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음악사를 이룬 것이다.
“저는 제 음악을 할 거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저를 따라 하는 사람도 많아지겠죠. 자연스러 운 일이에요. 강요받을 일이 아니고요. 그렇게 되면 또 새로운 흐름이 생길 테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을 래요.”
내가 말을 마치자 홍승일이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게 네 생각이냐.”
“네.”
홍승일은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조급 했을 수도 있겠지. 더 늦게 전에.”
“늦기 전에?”
“아니다. 다들 부르는구나. 가자.”
동시에 일어났는데, 홍승일이 멈칫 하는 바람에 얼굴을 그의 몸이 박고 말았다.
“아!”
“음악은 모든 음악가에 의해 만들 어진 거라. 그럼 베토벤이 한 시대를 집대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말도 인정하지 않는 게냐?”
“그럴 리가요.”
암. 사실이고말고.
“음. 그래.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더구나.”
“처음으로 마음이 맞았네요.”
센다이시 청년 문화 센터를 나서자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나간 담임선생과 함께 이것저 것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홍승
일이 어머니를 보자마자 투덜댔다.
“요 꼬맹이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 더구나.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후훗. 저도 가끔 애먹어요. 도빈 아, 재밌었어?”
“네. 재밌었어요. 다들 재밌게 연주 하더라고요.”
그렇게 일본에서의 두 번째 날이 저물었다.
* * *
다음 날.
내 예상대로 남궁예건은 제5회 센 다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 했다.
상패를 받는 그는 담담했고 더 앞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 미래가 더욱 기대되었다.
저녁이 되어서는 일행과 인사를 나 누었다.
“축하해요.”
“고마워.”
진심으로 축하했다.
남궁예건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출전할 수 있을 때 더 정진해야
한다.”
“그럼요. 도빈이 같은 무서운 후배 가 있는데 가만있을 수 있나요.”
«으으«
디- w •
홍승일과 남궁예건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최지훈에게 인사했다.
“학교에서 봐.”
“예전 매니저 아저씨 보러 간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이자 최지훈이 말했다.
“난 내일까지 있으려고. 입상자 갈 라 콘서트가 있대.”
말하는 태도가 무척 고무되어 있었
기에 최지훈이 이번 콩쿠르에서 뭔 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자청해서 갈라 콘서트까지 듣고 돌 아가려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 재밌게 봐.”
“응! 너도 잘 다녀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어머니께 가 려는데 홍승일이 말을 걸었다.
“학교에서 보자꾸나.”
그 목소리와 말투가 예전과 달리 조금은 온화했다.
그렇다고 금세 마음이 풀리진 않지 만 속으로는 나 루트비히 판 베트호
펜과 배도빈을 위대한 음악가로 생 각하는 걸 아니,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나카 무라의 집으로 찾아갔다.
“도빈아, 그런데 대화는 어떡하지?”
“제가 이야기할게요.”
“일본말도 할 줄 알아?”
“네.”
어머니께선 내가 음악을 하는 것보 다 독일어나 일본어를 하는 게 더 신기하신 모양이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저녁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나카무라 씨!”
“어서 오세요, 진희 씨. 도빈이도. 이야. 엄청 컸는데?”
“키는 별로 안 컸어요.”
“하하하! 일본말도 엄청 늘었네.”
“••••••안녕.”
전자동 휠체어에 탄 나카무라와 그 의 딸 요코 그리고 처음 보는 여성 이 함께하고 있었다.
막 퇴근을 한 모양인지 정장 차림 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카무라 요코입니다. 남편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요코, 료코. 헷갈린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카무라 가족은 나와 어머니를 반 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머니께서 미리 준비하신 과일 바 구니를 선물로 드리니 나카무라 요 코가 웃으며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저녁을 함께한 뒤.
“하하하하! 그런 말을 들었단 말이
지?”
“네.”
“하긴. 나도 히무라도 널 그렇게 보고 있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홍승 일이라……. 들어본 것 같기도 하 고.”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내 말에 나카무라가 입맛을 다신 뒤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도 그분과 비슷한 생각 이긴 해.”
“어떤 점에서요?”
“넌 모르겠지만 네 곡이 일본에서
는 정말 큰 희망을 주었거든. 다들 네 협주곡을 들으며 위로받았다고 생각하니까. 팬들이 몰려들어서 힘 들었다고 했지? 네 생각보다 일본은 너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을 거야.”
감사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팬으로서도 활동에 더 적극적이면 좋지. 최근에는 연주 회라든지 하지 않았잖아.”
듣고 보니 그렇다.
무리한 일정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걱정한 뒤로는 딱히 일정에 구애받
지 않았다.
‘인크리즈’와 ‘더 퍼스트 오브 미’ 의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을 하고 지 금까지 대략 1년 6개월.
그동안 연주회는 딱 한 번 했고 그 외에는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일을 하느라 바빴던 것과 달리 팬들은 내 연주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홍승일도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이렇게 쉽게 좀 말하지.
“그러네요.”
“응. 하지만 절대로 무리해선 안 된다. 네가 어려서가 아니라 성인이 된 뒤에도 무리한 일정을 잡아선 안 돼. 히무라 녀석에겐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걱정 말고.”
“히무라가 나카무라한테 혼나고 일 주일이나 우울해했었어요.”
내가 한창 바빴을 때의 일을 떠올 리며 말했다.
“다행이네. 그 정도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지.”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렇게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요즘엔 무슨 작업을 하고 있어?”
“앨범 만들어야 해요. 너무 뒤로 미뤘거든요.”
“좋지. 사실 네 선생님이 추천한 콩쿠르도 일이야. 네 경우가 워낙 특이해서 그렇지 보통은 다들 콩쿠르를 통해 경력을 쌓아가거든. 굳이 지금의 네겐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비슷한 또래와 경쟁을 한 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괜찮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추천해 줄 거 있어요?”
“흐음. 나이 때문에 나갈 수 있는 콩쿠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나카무라가 조금 더 고민을 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 색다른 연주회 같은 걸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색다른 연주회?”
“뭔가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일?”
“그게 뭔데요?”
“그걸 모르겠네.”
확실히 답이 없는 일이라 정하기 어려운 듯하다.
“아무튼 괜히 어린애들 나가는 곳 에 출전했다가 애기들 노는 데 어른 이 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초등부 콩쿠르는 나가는 게 독이라 고 봐.”
“저도 앤데.”
“누가 널 일곱 살로 보겠냐. 넌 이 미 충분히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도 관리해야 해.”
역시 나카무라.
대화가 잘된다.
“그럼 유명한 콩쿠르는 뭐가 있는 데요? 나중에라도 참고하게요.”
“우선은 역시 차이코프스키와 쇼팽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지. 반 클라이번이나 파가니니 콩쿠르도 권 위 있고.”
생각보다 국제 콩쿠르가 많다.
“베트호펜 콩쿠르는 없어요?”
“왜 없겠어. 너무 많아서 탈이지. 본 베토벤 콩쿠르도 유명한 편이야. 한국에서도 입상한 사람 몇 있을 걸?”
거기는 한번 나가봐야 할 듯하다.
“그럼 방학 중에는 곡 작업을 바쁘겠네? 이번에는 어떤 느낌이야?”
“피아노곡 위주로 만들려고 해요.”
“피아노? 바이올린이나 관현악 곡 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뒤에 바이올린으로 많이 활동하여 피아노에 대해서는 그 리 많이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중에 제 이름이 걸린 피아노 콩쿠르가 만들어지려면 피아노곡이 많아야 할 테니까요.”
“하하하하! 정말 못 당하겠다. 생 각이 아예 다르네. 그래. 너라면 가 능할 거다.”
“물론이죠.”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