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90화
21. 8살, 1학년(6)
다음 날.
호텔 앞 라멘집에서 카레를 먹었다. 후룩후룩-
“와, 맛있다.”
“나 아침에 라면 먹는 거 처음이야.”
“난 라면이 처음이야. 건강에 안 좋다고 하던데 먹어도 될까?”
“그 라면이랑 이거랑 다른 거 아니야?”
“달라?”
다들 시끄럽게 라멘을 먹고 있는데 옆에 앉은 최지훈이 물었다.
“어? 카레도 있었어?”
“여기.”
메뉴판에 옆집 카레라고 적힌 곳을 가리키자 최지훈이 놀랐다는 듯 말 했다.
“와. 일본어도 할 줄 알아?”
“조금.”
사카모토 료이치, 히무라 같은 일 본인과 몇 년이나 함께 지내면 모를 수가 없다.
“근데 왜 라멘집에서 카레를 먹어?”
“맛있으니까.”
내 대답에 납득하지 못했는지 최지훈이 의아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데 주인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카레라이스 곱빼기입니다!”
“오, 고맙네.”
홍승일도 카레를 주문한 모양.
그릇을 받자마자 수저로 푹푹 먹기 시작하는데, 먹음직스럽게 잘 먹었다.
나와 홍승일을 번갈아 보던 최지훈 이 조심스레 매장 앞으로 가 뭔가를 새로 주문했다.
“뭐 했어?”
“아니, 그냥……
“어?”
대답을 회피한 최지훈은 스마트폰으로 카레의 효능을 검색하더니 꽤 신중한 표정으로 그것을 살폈다.
“미니 카레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 최지훈 앞에도 작은 그 릇에 카레라이스가 놓였다.
센다이시 청년 문화 센터에 도착하 자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유 미 선생님은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시고요.”
“네, 선생님.”
홍승일이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 관람을 할 때 필요한 절차를 밟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자니 지루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 여성이 테이블을 두고 그 앞에서 무엇인가를 팔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팸플릿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내 팸플릿입니다.”
“ 얼마예요?”
“100엔입니다. 어머. 혹시 도빈 군?”
“ 엉?”
“도빈, 배도빈이야!”
주변에 서성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판매원보다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꺄아!”
“배도빈이 왔어! 너무 귀엽다!”
“역시 콩쿠르에도 관심이 있었구나. 가서 사인이나 받아볼까?”
“혹시 사진 찍어줄 수 있니?”
‘이게 뭔 소란이야.’
갑작스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멀리서 ‘도빈아! 도빈아! 괜찮니?’ 라고 소리치는 담임선생의 목소리가 더욱 멀어져갔다.
잔뜩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어주 고 악수를 나눈 뒤에는 지쳐 버리고 말았다.
“……괜찮니?”
팸플릿 판매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기가 소리를 내서 이 지경이 되었다는 걸 잘 아는 모양이다.
“괜찮아요. 그거 하나 주세요.”
“그냥 가져가도 돼. 서비스.”
“……감사합니다.”
천천히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담임선생이 달려와 내가 다치진 않았는지 이곳저곳을 살폈다.
최지훈이나 학생A, B, C도 마찬가 지로 달려와 걱정했다.
“괜찮아?”
“도빈아, 언제 거기로 간 거야? 다치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라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여기가 더 하다.
어린 나는 여전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죽을 뻔했어.’
히무라나 박선영 또는 할아버지의 보디가드가 없으면 함부로 돌아다니 지 말아야겠다.
“그건 뭐야?”
“ 팸플릿.”
최지훈이 마침 깜빡하고 있던 팸플릿에 대해 물어 그것을 펼쳤다.
“SIMC?”
“센다이 인터내셔널 뮤직 컴피티션 의 줄임말이래.”
최지훈이 옆에 적힌 영어를 대신 읽어주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센다이 국제 음악 경연이란 뜻이야.”
고개를 끄덕이고 읽어 내리니 알아 볼 수 있는 글은 적지만 대충은 어 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85년생 이후 출생한 사람만 참가할 수 있대. 나이 제한이 있나 봐.”
“아, 응. 맞아. 그런 조건이 있었던 것 같았어. 다른 콩쿠르에서도. 다른 건?”
조금 더 읽어주었다.
“1위를 하면 300만 엔이랑 CD> 제작해 주네. ……센다이 필하모닉 과 협연을 할 수 있다는데, 여기에 도 오케스트라가 있나 봐.”
내가 팸플릿을 읽는 걸 들었는지 주변에 부원들이 몰려들었다.
“와, 상금 많다. 내 용돈보다 많아.”
“협연? 재밌겠다.”
‘300만 엔을 용돈이랑 비교를 해?’
부잣집 자식들의 어이없는 말에 황 당해하며 계속해서 읽었다.
“운영위원장에 에비사와 슌. 심사 위원장에 켄 도모타, 야시마 케이지. 여기 바이올린 콩쿠르도 같이하는 거였네.”
“네가 출전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나 보고 싶어?”
“아니. 같이 나가고 싶어. 나중에 꼭 오자.”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면 슬퍼할 듯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좀 더 기다리자 로비로 홍승일이 누군가와 함께 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이다.
“자, 다들 인사해라. 너희 선배인 남궁예건이다.”
“안녕. 반가워.”
“안녕하세요!”
“와! 나 저 형 알아. 작년에 윌리 엄 카펠에서 우승한 형이야!”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하하! 고마워. 날 알아보네.”
이렇게 어린애들이 자신을 알아봐 기쁜 듯 웃은 남궁예건이 홍승일과 우리 일행을 보며 말했다.
“다들 귀엽네요. ……어? 배도빈. 배도빈 맞지?”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하시던 제자가 도빈 이었어요? 와, 진짜 대박이네. 도빈 아, 앨범 잘 듣고 있어.”
“고맙습니다.”
“너 왜 나한테는 틱틱대면서 예건 이한테는 예의바르게 구냐?”
“당연하잖아요.”
“하하하! 너도 선생님께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구나?”
“뭐라고!”
당연한 말인데 홍승일이 역정을 냈다.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홍 승일이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있는 너희 선배가 오늘 콩쿠르 결선에 올랐다. 직접 들으면 느끼는 바가 있을 거야.”
“하하. 선생님, 너무 부담 주시는데요? 민망하잖아요.”
“아무렴. 부담 가져야지. 너는 대한 민국 피아니스트의 미래다.”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건 그의 천성인 듯하다.
그래도 남궁예건의 표정에서는 긴장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니 필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와, 그러면 형도 선생님한테서 배웠어요?”
“응. 너희 선생님 엄청 무섭지?”
“아니요! 재밌어요!”
“재밌어?”
‘재밌다고?’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가 모두 홍 승일을 좋아한다고 하니 남궁예건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크흠. 말은 그쯤하고 어서 가서 준비해라.”
“네. 그럼 이따 봬요. 너희도 재밌 게 들어줘.”
“네!”
* * *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하 필이면 홍승일과 바로 나란히 있는 자리였다.
조금 일찍 입장한 터라 팸플릿을 더 보고 있는데 홍승일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건이 피아노 들은 적 있냐?”
“ 없어요.”
“주목해야 할 게다. 그 나이 때 그 아이보다 잘 치는 사람 세계에서도 드물다.”
홍승일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 면 어느 정도일지 조금 짐작할 수 있다.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
“그리고 더욱 발전할 테지. 저 녀 석 집이 가난해서 악착같이 노력하거든.”
“좋은 자세네요.”
직접 본 적은 없기에 대충 대답했다.
곧 센다이 콩쿠르 결선이 시작되었기에 홍승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확실히.’
센다이 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D단조를 연주한 남궁예건은 빛났다.
그의 표정에서 그가 연주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물새가 수면을 튕기듯 움직이는 날렵한 손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아낸 소리는 홍겹다.
‘10년쯤 뒤면 정말 큰 물건이 되겠는데.’
홍승일이 그를 높이 평가한 것도 납득이 되었다.
무엇보다 연주를 저리도 즐겁게 하 니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선 첫 번째 날의 모든 연주가 끝나고 담임선생과 아이들이 일어나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홍승일이 앉은 채로 말했다.
“어떠했냐.”
“잘하더라고요.”
“그뿐이냐?”
“무슨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거예요?”
“솔직한 감상.”
조금 생각하다 좌석에 다시 앉아 말했다.
“힘은 있는데 음 표현력이 조금 아 쉬워요. 음을 짧게 잡는 버릇이 있네요. 그런 단점이 즐겁게 연주하다 보니 듣는 사람도 즐거워져서 상충 되는 것 같고. 다듬으면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거예요.”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피아니스트를 넌 고작 그 정도로 평가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라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만큼 네가 다른 음악가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거다. 내가 왜 네게 집착하는지 알겠느냐?”
“예건이는 분명 훌륭한 피아니스트다.” 잠시 말을 멈춘 홍승일이 이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작은 늦었지. 10살쯤이었나? 재능도 없고 시작도 늦은 편이라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 정말 큰 기쁨이지.”
재능이 없었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10살이면 비교적 시작이 늦었던 것도 사실인데.
분명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겁게 연주를 하 니 조금은 흐뭇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거장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이 콩쿠르에서 누가 우승할 것 같으냐.”
“남궁예건이요.”
“그래. 다른 참가자를 압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게 국제 피아노 콩쿠르 수준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제법 재밌는 유흥이었지만 적어도 홍승일의 기준에서는 대회 참가자들 의 수준이 낮다는 말이다.
남궁예건은 분명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개화하지 못한 상태.
그럼에도 쉽게 우승을 점칠 수 있다.
굳이 일본까지 와서 국제 콩쿠르를 직접 보여준 이유는 세계적으로 연주자들의 수준이 낮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가우왕 등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연주자가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 적으로 수준이 떨어지고 있는 것만 큼은 사실이다. 클래식 음악가들의 수입 격차가 큰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클래식은 죽어가고 있다.”
히무라와 나카무라도 예전에 내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 음악은 희망이다.’
아직 눈을 넓히지 못한 나로서는 느끼지 못해도 현대 클래식 음악계 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어려워지긴 한 모양이다.
“한 명의 천재가 나옴으로써 시장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네게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 뜻을 어린 너는 아직 이해할 수 없겠지. 그러나 분명 인지하고 있어 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승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너는 희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