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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88화 (8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88화

    21. 8살, 1학년(4)

    다음 주 월요일.

    피아노부에 가지 않고 귀가했다.

    “누나,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어요?” 차에서 내리기 전 운전석의 박선영

    에게 물었다.

    “그럼. 왜? 어디 가게?”

    “녹음실 바로 가고 싶어서요.”

    “그래. 엄마한테 여쭤보고 문자 해. 별일이네? 오늘 일찍 와 달라고 하고. 채은이랑 뭐 하기로 했어?”

    “그건 아닌데 요즘 실력이 많이 늘어서 자주 봐주고 싶어서 그래요.”

    “흐음. 정말 잘하나 보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지훈이란 애보다 잘해?”

    “아마 곧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엑. 물어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 지훈이 앞에서는 하면 안 된다? 슬퍼할 거야.”

    이미 했다.

    “그런 걸로 기죽을 애 아니에요.”

    최지훈은 자기가 뛰어난 재능을 가 지지 못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매일 10시간씩 연습을 하는 거다.

    그런 근성이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발할 테고 내 친구의 이름은 널리 알려질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다녀왔습니다.”

    “어머, 오늘은 일찍 왔네?”

    “피아노부에 안 갔어요.”

    어머니께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당연히 물어보실 거라 생각했다.

    “왜? 오늘은 부 활동 쉬는 거야? 아니면 어디 아프니?”

    “채은이랑 피아노 치는 게 더 좋아요?

    “……그러렴. 채은이도 좋아하겠네. 녹음실로 갈 거니?”

    “네.”

    뭔가 더 물어보실 거라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굳이 내게 이유를 묻 지 않으셨다.

    어쩌다 그럴 수도 있는 거라 생각 하셨는지, 아니면 나를 믿기 때문인 지 몰라도 예상과 조금 다른 반응이 라 떨떠름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매니저 누나가 태워다 준대요.”

    “그래~ 재밌게 놀다 와.”

    역시 뭔가 좀 이상하다.

    옆집으로 가 문을 두드리자 아주머 니가 반겼다.

    “오늘은 일찍 왔네?”

    “네. 채은이랑 녹음실 가도 돼요?”

    “오빠!”

    “그럼. 채은아, 그렇게 뛰면 다쳐.”

    “히 히히.”

    “못살아 정말. 그렇게 좋니?”

    “응!”

    아주머니가 부르기도 전에 내 목소 리를 듣고 뛰어나온 채은이가 내게 안겼다.

    걱정 어린 말을 듣고도 웃을 뿐이 라 아주머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떻게 갈 거니? 아줌마가 데려다 줄까?”

    “매니저 누나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선영 씨도 고생이네. 그럼 재밌게 놀다 오렴.”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게씀니다!”

    녹음실에 도착했는데 박선영이 평 소와 달리 주변 카페에 가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있으려고요?”

    “응. 채은이 피아노도 들어보고 싶어서. 네가 이렇게까지 돌봐주는 게 신기하거든.”

    “그렇게나 신기해요?”

    “응. 너 다른 사람이랑 얽히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음악하는 사람 빼고.”

    맞는 말이다.

    “채은아 손부터 풀자. 1번부터.”

    “응!”

    채은이가 차채은을 위한 연습곡 N0.1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나도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동일한 음악을 연주한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녹음된 것을 반복해 트는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좋네.’

    오늘 컨디션은 더욱 좋은 것 같다.

    정말 신이 내린 재능이라는 말 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연주를 마쳤는데 박선영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나. 아니, 배도빈 같은 애가 또 있었네.”

    “……실례예요.”

    “아, 미안. 채은이가 피아노 친 지 얼마나 된 거야?”

    “10개월 정도?”

    “아직 1년도 안 된 여섯 살짜리 애가 이런 연주를 한다고? 이건 대 표님도 들어보셔야겠는데.”

    채은이가 좀 더 크면 말해주려 했더니 박선영도 듣는 귀가 있긴 한 모양.

    단숨에 채은이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적당히 기교를 익히고 이대로 피아노를 즐기다 보면 앞으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다.

    아직은 연주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것이다.

    내가 바쁜 와중에도 채은이에게 신

    경을 쓰는 이유가 이 귀한 재능이 싹트지 못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피아노도 좋아하지만 나에 대한 애착이 더 큰 상황. 내가 멀어 지면 음악과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 각했다.

    실제로 ‘더 퍼스트 오브 미’ 작업을 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동안 채 은이는 악보 보는 법을 모두 까먹었으니까.

    내가 연주한 것을 반복해 듣고 그 것을 따라 연주할 뿐이었으니 아직 은 신경을 써줄 때다.

    “오빠 다른 거. 다른 거.”

    “그래. 2번.”

    “응!”

    재능은 가꿔야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빛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닦아줘야만 제 빛을 낼 수 있다.

    그 빛나는 재능을 지닌 천재 모차 르트마저도 그러했고 나 역시 마찬 가지다.

    내 진정한 스승이었던 안토니오 살 리에리 역시 노년에 들어서도 끊임 없이 음을 탐구하여 숱한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나는 지금 내 연주를 그대로 따라 하여 호흡을 맞추는 저 아이가 언젠 가는 본연의 모습을 찾아.

    그 날개를 활짝 펼 것을 믿어 의 심치 않는다.

    그때가 되면 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내가 작곡한 피아노 협 주곡을 연주하게 하는 작은 꿈을 꾸 어본다.

    분명 근사한 연주회가 될 것이다.

    [도빈아, 어디 아파기

    [아니. 왜?]

    [어제도 그제도 부실에 안 왔잖아. 오늘은 올 거지?]

    [집에 가려고.]

    [혹시 선생님 때문에 안 오는 거야기

    종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 교실에서 최지훈과 문자를 나누었다. 며칠 부 활동에 나가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별일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뒤에서 홍승일이 나를 불렀다.

    “배도빈.”

    고개를 돌리자 화가 난 듯한 홍승 일이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디 아프냐.”

    “아니요.”

    “그럼 왜 부 활동에 나오지 않았냐.”

    “할아버지 마음대로 움직이기 싫어 서요.”

    “뭐?”

    “그간 저를 자극하는 이유가 궁금 했는데 알 것 같아서요.”

    홍승일은 조금 놀란 듯싶다가 이내 다그치듯 물었다.

    “왜 그랬을 것 같으냐.”

    “할아버지한테 말씀하셨다면서요. 제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할 거라 고요.”

    “그래.”

    “전 콩쿠르 나갈 생각 없어요.”

    내 대답에 홍승일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알았다. 내보내지 않을 테니 부실 로 가서 말하자.”

    외할아버지의 친구라 직접 찾아오 기까지 한 그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보겠다는 심정으로 박선영에게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부실에 들어서자마자 홍승일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차이코프 스키의 C샵단조를 연주했다.

    다음. 그다음.

    그는 연주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렇게 짧은 몇몇 곡을 연주한 뒤 에 나를 보았다.

    “어떠냐.”

    “좋네요.”

    사람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음악만은 훌륭하다.

    “네가 이 곡을 한 달 연습하면 나 만큼 연주하겠지.”

    “나는 이 곡을 치기 위해 6주를 연습했고 평생을 내 레파토리로 연주해 왔다. 그 과정에서 더욱 깊이 가 생겼지. 그런 내 연주를 너는 한 달 만에 따라잡는 거야.”

    “왜 더 열심히 하지 않는 거냐.”

    충격이었다.

    홍승일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지 만 설마하니 이런 말을 할 줄은 꿈 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전 지금도 충분히 음악을 하고 있어요.”

    “아니. 넌 새로운 걸 탐구할 뿐이지 더 깊게 파고들고 있지 않아. 새로운 곡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네 피아노 실력은 어째 다섯 살 때와 조 금도 달라지지 않은 게냐.”

    “무슨 말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네가 그간 한 거라고는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늘렸을 뿐이다. 너 스스 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분명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새로운 곡을 익히면서 자연스레 발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탐구.

    확실히 나는 피아노 연주를 계속 해왔지만 보다 완벽히 연주하기 위 해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다.

    과거 내가 쳤던 대로 연주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그 이상을 위해 노 력하진 않았다.

    새로운 연주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것을 탐구하진 않았다. 활용할 뿐 이었다.

    깊이 사색하는 시간이 없었음을 깨닫자 나는 비로소 그가 ‘내 실력이 3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라고 외 친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이해한 모양이구나.”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입은 떼지 않았다.

    “네 할애비한테 너를 맡아 가르치겠다고 했지만 직접 들으니 그런 생 각이 싹 사라지더라. 왜 그랬을 것 같으냐.”

    “너는 이미 너무도 높이 이르렀다. 어린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높아.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고 주 변에 너만 한 산이 없으니 더 이상 오를 곳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

    “내 말 들어.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언젠가는 꼭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내 말을 들어야 해!”

    ‘아니. 이해했는데.’

    “그러나 분명 너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거다. 어린 너라면 분명 오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선생이라 고 하지만 분하게도 난 그 더 높은 곳이 어딘지, 어디까지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 만 한다.”

    눈을 부릅뜬 홍승일에게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는 더 높은 경지의 단계를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홍승일 본인과 사카모토 료이치나 블레하츠 그리고 그에 준하는 다른 피아니스트.

    모두 나조차 감격할 정도로 너무나 뛰어나다.

    그러나 홍승일은 이 시대의 거장들 이 도달한 경지를 넘어선 것을 바라 보고 있는 것 같다.

    노년의 그가 이렇게까지 열정적일 수 있는 동기일 것이다.

    ‘재능은 갈고닦아야 제 빛을 낸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사실.

    루트비히, 투쟁을 했노라.

    내 삶을 스스로 저리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음악만을 위해 살았건만.

    새로운 것에 눈이 팔려 그것을 깊이 있게 내 것으로 하여 더욱 발전하지 않았다.

    분명, 예전 나와는 다른 삶이다.

    환경이 바뀌었던 탓일까.

    아니, 환경은 잘못되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어요? 더 열심히 하게 하려고?”

    “크흠.”

    “제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긴 했네요.”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 이다! 그래! 넌 분명 대단하지만 그렇게 자만해서는 네 성장을 막을 뿐이 야!”

    “누가 열심히 안 한대요?”

    “뭐?”

    나에 대해 모르는 홍승일이 그런 생 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직 어리니까.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육십 먹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돌이켜보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악보를 놓지 않았던 나다.

    인생을 짧다. 예술은 길다.

    지금까지 해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 홍승일의 말이 내게 새롭 게 마음을 다져준 것만은 사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아까 이 부분 엉망이었어요. 할아버지도 노력 좀 더 해야겠던데요.”

    “뭐, 뭐라고?”

    피아노 앞에 앉아 방금 홍승일의 연주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내 방법대로 연주하자 홍승일이 발끈했다.

    그리고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래도 콩쿠르는 안 나갈 거예요.”

    “나갈 수밖에 없을걸.”

    “안 나간다니까요?”

    “아니. 넌 나갈 수밖에 없다.”

    또 고집을 부리는 홍승일을 인상을 쓰고 보자 그가 나를 비웃더니 입을 열었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군대를 안 가거든.”

    뭔가 비장의 말을 한 것 같은데 무 슨 뜻인지 조금도 이해, 공감할 수 없었다.

    “뭔 소리예요?”

    “큭큭큭큭. 군대 갈 때쯤 되면 알게 될 거다.”

    여전히 경박하고 기분 나쁜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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