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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87화 (8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87화

    21. 8살, 1학년(3)

    오늘도 건방진 교사를 혼내주기 위 해 부실로 향했다.

    그 앞에 최지훈이 있어 아는 척을 했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이 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내가 괜히 피아노부에 들어오라고 해서. 선생님 우리한테는 엄청 친절 하게 가르쳐 주시거든. 피아노도 너 무 잘 치시고.”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강사에 대한 일이다.

    “……그래서 분명 너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네 피아노를 잘 받아들일 수 없으신가봐.”

    “실력 문제가 아니야.”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피아노부의 담당 강사 홍승일은 뛰어난 연주자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면 분명 그 이름을 널리 떨쳤을 거라 생각할 정 도니까.

    “그 사람 몰라서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야.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고.”

    “그게 무슨 뜻이야?”

    그 이상은 말로 내뱉기 싫어 대답 하지 않았다.

    홍승일은 나이가 너무 많고. 나는 아직 손가락에 힘이 없다.

    그 때문에 건반을 충분히 내 의도 대로 누르기에는 아직 버겁다. 억지로라도 칠 수는 있지만 아직은 손도 작은 편이니 칠 수 있는 곡이 한정적이다.

    더욱이 낭만 시대 이후의 레퍼토리는 아무래도 내가 그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곡을 많이 들어도 단 한 번도 연습하지 않은 곡이 수도 없이 널렸다.

    특히 피아노 같은 경우에는 활동 자체를 작곡과 바이올리니스트로 했던 지난 몇 년 때문에 충분히 치지 못한 점도 있다.

    서로에게 아쉬운 점이 분명 있다.

    나도 그도 페널티를 가지고 있는데 서로 상정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게 옳은 말이리라.

    그의 말투는 나를 몹시 노엽게 하지만,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완벽한 연주를 위해, 또 이 시대에 맞춰나가기 위해 나도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하니까.

    ‘그게 짜증 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면 무시할 테지만.

    나조차 내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말하니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터.

    그래서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연주에 대해 물고 뜯는 거다.

    적어도 나는 그가 나를 도발할 때 마다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 해, 연주로서 그를 압도하기 위해 최근에는 피아노에만 매달렸다.

    이 내가.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드르륵-

    부실에 들어서자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못된 영감을 볼 수 있었다.

    “용케 도망치지 않고 왔구나!”

    “도망은 누가 친다고 그래요?”

    “하하하!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네. 오늘은 쇼팽의 녹턴으로 가볼 테냐?”

    “……악보 좀 보고요.”

    “하핫! 드디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구만!”

    “그럼 무슨 곡이 있는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치라고요!”

    “낄낄낄. 같이 봐줄까?”

    “필요 없어요.”

    정말이지 이렇게 격정적이 된 것은 오랜만이다.

    저 얄미운 노인이 찍소리도 못하게 해줄 날을 위해 피아노부 한쪽에 꽂 혀 있는 쇼팽의 악보를 펼쳤다.

    쇼팽.

    일생을 피아노에 바친 남자다.

    그의 대담함과 화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교는 작곡가로서도 피아니스트로서도 그를 존경하게 만든다.

    특히 지금 보고 있는 그의 녹턴(야 상곡)은 달콤한 티라미수다. 조용히 귀로 들어온 음률이 감성을 자극하 는데 일찍이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Nocturne Op.9 No.2

    ‘이런 느낌인가.’

    악보를 펼쳐 놓곤 연주를 시작했다.

    천천히 악보를 따라 손을 움직일수록 그가 배치한 이 황홀한 감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으’

    조금 불편한 게 있다면 페달을 적절히 밟아야 하는데 자세가 좀 불편 하다는 정도다.

    페달을 밟는 것도 건반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누르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니 말이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 후우.’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을까.

    잠시 쉬다 할까 싶어 일어섰다.

    다들 부 활동 시간으로 정해진 두 시간이 지나자, 다들 각자 따로 마련된 연습실에서 나와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아노부 강사 홍승일이 안 보이길래 오늘은 방해 없이 조용히 연습할 수 있겠다 싶어 물을 마실 생각으로 움직였는데 홍승일이 바로 내 뒤에

    서 있었다.

    계속 연주만 하고 있었던지라 몰랐는데 계속 그대로 있었던 모양. 깜짝 놀랐다.

    “뭐예요?”

    “집에 가려고?”

    “물 마시려는 거예요.”

    “오늘 안에 이걸로 너와 연주하는 건 틀린 것 같네.”

    “간단한 것도 아니고 이런 걸 어떻게 하루 만에 완벽하게 쳐요.”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또다시 억지를 부리려고 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자 그가 씩 하고 웃었다.

    “한 시간쯤 뒤부터는 틀린 구간도 없던데?”

    “틀리지 않고 치는 걸로 만족할 것 같아요?”

    “하하하!”

    홍승일이 내 대답에 웃으며 부실을 빠져나갔다.

    ‘ 뭐야.’

    오늘은 조금 다른 식으로 기분을 상하게 한다.

    “도빈아, 오늘도 더 있으려고?”

    최지훈이 가방을 맨 채 물었다.

    “응. 몇 번 더 연습하려고. 너는?”

    잠시 고민하던 최지훈이 가방을 풀어 내렸다.

    “나도 오늘은 좀 더 있을래.”

    “뭐 할 거 있어?”

    “아니. 그냥.”

    조금 평소와 다른 느낌이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할 말이 있다면 곧 하겠지.’

    “뭐 연주하고 있었어? 아, 쇼팽.”

    “저번에는 쇼팽 에튀드로 대결하자고 하더니 이번에는 녹턴으로 하자고 해서.”

    “쇼팽은 너무 좋으니까.”

    “훌륭하지.”

    “아, 나 연습하고 있는 거 있는데 들어줄래?”

    “해봐.”

    "응."

    최지훈이 열심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녀석다운 솔직하고 차분한 연주다.

    주말에 외할아버지까지 해서 가족 모두가 모였다.

    외할아버지의 집은 처음이라 이 시 대의 부자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을까 기대했는데.

    도리어 예전 삶에서 보던 귀족 저 택과 유사했다.

    “도빈아, 학교생활은 어떠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외할아버 지가 궁금했는지 근황에 대해 물어 보셨다.

    “그냥 그래요.”

    동화와 동요를 듣고 별것도 아닌 일에 우쭈쭈 당하는 것도 이제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러려니 싶어 포기하고 있는데 내 대답이 별로 마음에 안 드셨는지 할 아버지가 눈을 좁히며 걱정스레 물었다.

    “왜. 재미없느냐?”

    왜 별로인지 설명하려면 내가 어떻게 다시 태어났는지까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저어 부정했더 니 떨떠름하게 나를 보신다.

    “도빈이 요즘 학교 열심히 가서 엄마는 재밌게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아 니었나 보네? 무슨 일 있니?”

    “그러게. 요즘 학교에서도 오래 있잖니.”

    “아.”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도 물어보셨는 데 내가 성이 나 있던 걸 학교에 가고 싶은 것처럼 보셨나 보다.

    ‘빨리 가서 큰코다치게 해주려고는 했지.’

    생각해 보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 라서 입을 뗐다.

    “피아노부 할아버지 때문에 그래요.”

    “오. 그래? 마음에 들더냐?”

    ‘너무 반가워하시는데.’

    거지같은 인간이라 본때를 보여주려 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뭐…… 실력은 있는 것 같아요.”

    “하하하하! 그래. 내 친구지만 실력 하나는 아마 대한민국 최고일 거다.”

    ‘ 친구?’

    “아는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대신 물어보셨다.

    “암. 승일이라고 너도 몇 번 봤을 거다. 어릴 땐 연주회도 같이 가고 그러지 않았냐.”

    “어머. 누구신가 했더니. 인사드리러 가야겠네요.”

    “승일? 혹시 홍승일 피아니스트 말씀이신가요?”

    “음. 막역지우지.”

    막역지우란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으로 봐서는 외할아버 지와 친밀한 관계 같다.

    아버지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듯해서 물었다.

    “유명해요?”

    “그럼! 우리나라 최초로 차이콥스 키 콩쿠르에서 1등을 했지. 그때가 78년이었나.”

    ‘꽤 오래 전 이야기다.’

    차이콥스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클래식 음악 팬인 어머 니께서 설명을 이어하셨다.

    “4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유명한 콩쿠르야. 쇼팽, 엘리자베스 콩쿠르 랑 함께 가장 유명한데, 도빈이 선 생님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 승하셨대.”

    그 실력은 나도 인정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외할아버지와 친구라는 점부터가 그러하다.

    ‘그 늙은이가 외할아버지를 믿고 나를 그렇게 대한 건가?’

    조금만 더 선을 넘었더라면 머리를 들이박았을 정도라 조금 심란하다.

    “그런데 이제 몸은 좀 괜찮아지신 거예요?”

    “아, 그렇지. 몸이 안 좋아져서 은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을 듣곤 의아해졌다.

    내가 보기엔 당장 나무를 하러 다녀도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글쎄. 자기 몸에 대해선 솔직하지 않으니 모르지. 그래도 도빈이 이야 기를 꺼냈더니 냉큼 하겠다고 하더 구나.”

    “저를요?”

    “음. 꼭 가르쳐보고 싶다고 하더구 나. 너도 알겠지만 그 친구 실력이 라면 내 손자를 맡겨도 되겠다 싶어 부탁했었지.”

    “정말 잘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도빈이 음악 학원 다니면 제대로 못 가르치겠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하하하!”

    할아버지가 기쁘게 웃으신다.

    반면 나는 홍승일이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다는 걸 듣고는 몹시 언짢 아졌다.

    이제 보니 그 영감탱이가 나를 놀린 것이다.

    억지를 부린다거나 맞는 말을 해도 사람 성질을 긁듯 말하는 게 뭔가 노리고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얼마 전에 승일이도 말하더라. 10년 뒤 한국에서 쇼팽 콩쿠르 우승자 가 나올 거라고 말이다. 도빈이 너 를두고한 말이지.”

    “콩쿠르요?”

    “음”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나를 기특하다는 듯 따듯하게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내색하지 않으시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모습.

    홍승일이란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자극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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