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85화 (8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85화

    21. 8살, 1학년(1)

    아름다운 정치 체계는 개뿔. 이건 개인에 대한 폭력이다.

    김정민 1표

    배도빈 16표

    이승석 2표

    “어머.”

    ‘이래서 꼬맹이들이 싫어. 무슨 짓 이야.’

    후보도 아닌 내 표가 쏠려 버렸다.

    “여러분, 도빈이는 후보가 아니라 서 이름을 적으면 안 돼요.”

    “도빈이가 젤 잘할 거 같아요.”

    “도빈이가 좋아요!”

    담임교사가 차분히 설명을 했지만 아이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난감하다는 듯 있던 교사가 내게 물었다.

    “친구들이 이렇게나 바라는데 해보 지 않을래?”

    “투표가 잘못 되었잖아요. 그럼 안 돼요.”

    민주주의란 신성한 것.

    비록 득표는 많이 했지만 후보조차 아닌 내가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승석이 회장, 김정민이 부회장이 되었는데.

    피곤한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도빈아, 이거 이렇게 연주하는 거 맞니?”

    음악 시간.

    음악 교사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다가 조심스 레 연주에 대해 물었다.

    이것저것 말할 것도 없어서 심드렁하게 반응했는데 그 다음 수업부터는 녹음된 CD를 트는 것을 보곤 황당해졌다.

    또 다른 일은.

    “그래서 맷돌이 계속 돌아가 소금이 나왔고 바다는 짜게 되었답니다. 도빈아,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이 뭘까?”

    동화를 읽는 시간인데 담임교사가 대뜸 나를 지목해 짧은 판타지 소설 이 전하고자 하는 교훈에 대해 물었다.

    ‘ 교훈?’

    가난한 농부에게 주어진 보물을 김 부자가 훔쳐 배를 타고 도망갔는데, 소금이 너무 많이 나와 배가 가라앉았다는 이야기였다.

    ‘물건을 홈치면 안 된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안전한 곳에서 맷돌을 돌렸다면 빠져 죽지 않았을 테니까?’

    ‘소금이 그때 비쌌나?’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몰라 내 생각을 모두 말했다.

    “다들 도빈이에게 박수 보내주세요. 도빈이처럼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짝짝짝짝짝.

    “도빈이 대단해!”

    “멋있어!”

    ‘아니,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칫.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넌 왜 이런 걸로 질투를 하냐.’

    그 외에도.

    “도빈아, 시험 보느라 힘들었지?”

    “별일 아니었어요.”

    “고생했어. 엄마가 카레 만들어놨 으니까 어서 먹자.”

    식탁에 앉아 채점을 받은 시험지를 어머니께 보여드리자 어머니께서 크 게 기뻐하셨다.

    “어머. 도빈아, 전부 백 점이잖아?”

    “문제가 쉬웠어요.”

    “어쩜. 한글도 제대로 못 배워서 걱정했는데. 우리 도빈이 너무 장하다. 열심히 했구나? 오구구.”

    어머니도 교사도 병아리들도.

    진짜 별것 아닌 걸 가지고 다들 똑똑하다, 천재다 치켜세우니 다들 나를 놀리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별것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다들 겸손하다며 더욱 칭찬을 해대니 그 상황이 도리어 짜증이 났다.

    “잘해서 그런 건데 기분 안 좋아?”

    “잘하긴 개뿔. 모르는 게 이상하지.”

    “나는 주변에서 막 좋아해 주고 칭찬해 주면 좋던데. 그래서 더 열심 히 하게 되고.”

    ‘네가 나이 육십 먹고 8 더하기 9 맞혔다고 칭찬 받아봐라. 좋아할 수 있는지.’

    그나마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최지훈에게 털어놓았는데 역시 나 애는 애인지라 이해를 못 하였다.

    “그런데 도빈아, 너 부활동은 뭐 할 거야?”

    “부 활동?”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학교 공부 외에도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일반적인 음악 수업이 아니라 심 화, 특화되어 있다는 말에 조금은 기대했었다.

    “응. 난 피아노부인데 피아노부로 와라. 다들 좋아할 거야.”

    피아노라면 가장 좋아하는 악기다.

    학교생활 중에 그나마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답하니 최지훈이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거기서 뭐 하는데?”

    “보통은 피아노를 연습해. 동영상으로 배우기도 하고 또 콩쿠르에 나갈 준비도 하고.”

    “콩쿠르?”

    “응. 도빈이 너라면 쉽게 우승할 수 있을 거야. 아, 근데 우승은 내가 해야 하는데.”

    아직도 천재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모양이다.

    “걱정 마. 나 그런 데 안 나가.”

    “어? 왜? 실력이 아깝잖아.”

    “아깝긴. 나가서 뭐 하게.”

    “열심히 연습해서 1등 하면 기분 좋잖아.”

    남보다 우월한 것을 뽐내는 일이라.

    그리 즐기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피아니스트와 누가 더 위인지 가렸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곧잘 그런 식으로 누구의 연주가 더 훌륭한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결국에는 하릴없는 귀족들의 심심 풀이일 뿐이라 대부분 응하지 않았지만.

    정말 우위를 가리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없진 않았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생기면 그때 생각해 볼게.”

    말 그대로 그 정도로 인정할 만한 사람이 콩쿠르에 나온다면 생각해볼 만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나이 때에는 없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이치라면 한번 해보고 싶은데.’

    사카모토 료이치나 그가 추천했던 블레하츠라는 사람 정도라면 확실히 훌륭한 피아니스트다. 그들의 연주는 항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미 성공한 그들이든 나든 체면 때문에 대결 같은 걸 할 리가 없다.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지훈이 갑자기 화색이 되었다.

    “뭐가?”

    “정말 비슷한 사람이 생기면 콩쿠르에 나갈 거야?”

    “뭐……

    “내가 그렇게 될게. 그러니까 언젠 가 꼭 함께 콩쿠르에 나가자.”

    “아까는 네가 우승해야 한다면서.”

    내 질문에 최지훈을 힘차게 답했다.

    “나도 열심히 할 거야.”

    “……내가 콩쿠르에 나가든 말든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사람들이 네 연주를 들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난 알아. 네 연주가 얼마나 멋있는지. 다른 사람도 알아 줬으면 좋겠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 최지훈 이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연습하러 가자!”

    4월이 되자 4교시가 끝나고 두 시간 동안 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최지훈의 말대로 피아노부에 들어갔는데, 오늘은 그 첫 시간이라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피아노를 어떻게 배우는지.

    혹시나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쁜 것이다.

    할아버지가 특별히 초등부 피아노 부의 교사를 초빙까지 했다고 하니, 그 사람이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참 고하면 채은이도 좀 더 잘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피아노 레슨은 많이 했지만 사실 공을 들여 가르친 사람은 몇 없다.

    또 교수법이라는 것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발전, 변화했을 테니.

    하루라도 빨리 채은이와 협연을 하기 위해서라도 현대의 체계적인 학 습법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

    ‘여긴가.’

    4교시를 마치고 한국 초등학교의 본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 로 향했다.

    붉은 외벽에 다가갈수록 악기 소리를 작게 들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도 여기서 연습하는 모양이네.’

    초등부뿐만이 아니라 중등, 고등부도 함께 있는 듯하다.

    긴 복도를 지나자 조용한 교실이 나왔다.

    A108

    최지훈이 알려준 피아노부 부실이다.

    “실례합니다.”

    “어서 들어와.”

    “도빈아! 여기!”

    인사를 하고 피아노부 부실에 들어섰는데 사람이 몇 없다.

    손짓하는 최지훈을 포함해 학생은 다섯 명뿐이다.

    학생 수 자체가 적기도 하지만 아 무래도 피아노부는 인기가 적은 모 양이다.

    “네가 배도빈이냐?”

    꽃무늬 셔츠를 입고 옷깃을 세운 남자가 물었다.

    이 학교에서 본 사람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 보였는데, 아무래도 피아노부의 교사인 듯하다.

    나이에 비해 뭔가.

    경박해 보이는 느낌이다.

    “네.”

    “자, 그럼 왔으니 신고식부터 해야지.”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교사가 재차 말했다.

    “뭐 해? 네가 젤 자신 있는 곡으로 한번 연주해 봐. 천재는 어떤 연주를 하나 들어보자. 다들 들어보고 싶지?”

    “네!”

    ‘뭐 하는 인간이야?’

    슬쩍 기분이 상하려 하는데 최지훈 이 잔뜩 기대를 하고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의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 정 도는 참아줘야겠다 생각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소나타 B플랫장조 4악장.

    솜씨를 보여 달라 했으니 그에 부 응해 줘야겠지.

    4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 *

    ‘이 녀석 봐라.’

    어떤 곡을 선택할지 궁금했는데 마치 내게 이해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듯한 선곡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 실제로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다.

    실력이 없었더라면 모르겠지만.

    표현하기 어렵다는 초반부마저 음을 자아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몇 년 전, 다섯 살짜리 아이가 클래식 앨범, 그것도 신곡으로만 구성 해 직접 작곡, 연주했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는 죽기 전까지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배도빈.

    ‘배도빈: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 한 모음곡’을 들었을 때는 그 완벽 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하니 그 친구 손주일 줄은 몰랐지.’

    이렇게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음을 감정을 담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단순히 기술만 뛰어난 아이가 아니 라는 것.

    곡을 정확히 이해하고 나름의 해석을 더해 연주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거장이라 한다.

    ‘정말 천재가 있긴 있구만.’

    들을수록 놀랍다.

    보통 솜씨를 뽐내려면 기교가 많이 들어간 곡을 선택하기 마련인데 기 술뿐만이 아니라 곡에 대한 해석 능 력도 갖춰야 하는 이 곡을.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B플랫장조보다 훌륭히 연주한다.

    ‘빠른데.’

    원래도 중반에 이르면서 곡이 빠르게 진행되는데, 배도빈의 연주 속도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아이들을 슬쩍 보자 넋이 나가 있다.

    저 아이들이 이 곡을 제대로 이해 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니 단순히 저 복잡하고 난해한 곡을 저만큼 빠르 게 연주하고 있음에 놀란 거다.

    자존심 강한 천재.

    내가 과연 이 녀석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이미 이 아이는 완성되었다. 그 어 떤 거장과 비교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으며.

    동시에 독보적이다.

    ‘이러니 재미가 없지.’

    지훈이가 한 말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대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콩쿠르에 나간다는 그 말.

    처음에는 웃어넘겼으나 직접 연주를 들어보니 이 나이 때 저런 실력을 갖추었다면 경쟁 자체에 의미를 두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안 될 일이지.’

    사람에게는 목표가 필요한 법.

    억지로라도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의 이 연주가 다섯 살 때 녹음한 연주와 그 실력이 조금도 차이 가 없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사람은 동기가 부여되었을 때 성장 하는 법이니까.

    ‘ 재밌겠는데.’

    꼬맹이들 있는 곳에 가서 뭘 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속은 셈 치고 와 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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