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81화
20. 8살, 입학(4)
12월 23일.
루드 캣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과 작별하고 비행기에 탔다.
롤랑 리옹은 언젠가 한번 내 피아노와 협연을 하자고 했고, 기쁘게 수락했다.
그보다 클래식 기타를 더 잘 연주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내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니게 되면 지금처럼 장 기간 프로젝트는 못 할지도 모르겠군.”
사카모토의 말대로 그럴 것 같다.
이렇게 해외에 나와 몇 개월씩 일 하는 건 아무래도 당분간 힘들 것 같다.
“방학 중엔 가능하니까요.”
그래도 어차피 다녀야 하기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학기 중 일부와 방학 때 내 활동 에 대해 최대한 지원해 주겠다는 외 할아버지의 말도 있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사카모토 료이치가 빙그레 웃었다.
“그 안에서 분명 또 즐거운 일이 있을걸세.”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학교를 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도 있다.
본 대학에서 청강을 한 것이 내 학벌의 전부였지만, 칸트와 실러의 이야기는 내 영혼을 충족시켜 주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분명 소중한 배움의 기회가 될 거라 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보지.”
“또 봐요.”
그렇게 사카모토와 악수를 하곤 이 번 일을 마무리했다.
“꺄아아악!”
촤르르르르륵-
인천 국제공항에 내리자 또다시 기 자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있는 대로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서 눈이 다 부실 지경이라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히무라와 박선영이 없었더라면 분명 인파에 휩쓸려 압사 당했을 것이다.
불쾌하여 인상을 썼는데, 공항 근처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부모님과 곧 만날 수 있어 기분이 풀렸다.
“도빈아!”
“엄마! 아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와락 끌어안아 숨이 막혔다.
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아 버둥대니 그제야 두 분이 일어나 히무라와 박선영에게 인사를 했다.
“고생하셨어요, 히무라 씨. 선영 씨.”
“별말씀을요. 고생은 도빈이가 했죠.”
히무라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녁에 초대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빨리 돌아가고 싶으시겠죠?”
“아무래도요. 선영 씨도 가족과 오래 못 봤으니까요. 저도 오늘은 이 만 돌아가 쉬고 조만간 찾아뵈어 인 사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머니와 함께 히무라, 박선영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도 돌아가자.”
아버지의 낡은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여주셨다.
깔깔 웃으셔서 뭔가 하고 봤는데.
기사 제목은 ‘천재 배도빈 귀국, 불편한 기색마저 귀여워’였다.
‘이 인간들이.’
불과 삼십 분도 안 되어 이런 기 사가 올라오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것과 별개로 사람이 기분이 안 좋을 때 멋대로 사진을 찍어 올리다
니,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도빈아, 예쁘게 나와야지. 비행기 타는 거 많이 힘들었어?”
“눈이 부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사진을 저장하셨고 아 버지가 흐뭇하게 나를 보았다.
“이번에도 재밌었니?”
운전을 하고 계신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멀리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항상 물어보시는 질문이다.
“네. 재밌었어요. 이번엔 롤랑 리옹 이라는 기타리스트를 만났는데 태핑 이라는 기술이 엄청났어요.”
매일 통화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만나니 더욱 반가운 것이 가족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 왔다.
그리운 향기.
집 냄새를 물씬 느끼며 샤워를 하 고 나오자 졸음이 슬슬 밀려들었는데, 나를 부르는 높은 목소리에 정 신이 번쩍 들었다.
“오빠!”
채은이다.
“잘 지냈어?”
채은이가 고개를 있는 힘껏 저어 부정했다. 잘 못 지냈다는 것을 표 현하고 싶은 모양이다.
“도빈이 보고 싶어서 얼마나 투정을 부렸는지 몰라.”
옆집 아주머니의 말에 어떻게 반응 해야 좋을지 몰라 조금 난감했다.
“오빠 이제 다른 데 안 가?”
“ 일단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저녁식 사를 하는 내내 채은이의 표정이 밝았다.
다음 날.
아침부터 피아노를 치자고 조르는 채은이를 달랬다.
다른 데 안 간다고 했는데, 하고 칭얼거리는 채은이에게 오후에 보자 고 하며 초콜릿을 주니 겨우 진정했다.
할아버지와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아직 어색한 것 같다.
차분하고 조용한 장소에 세 사람만 있는데 두 분이 어색해하니 분위기 가 더욱 조용하다.
그래도 이렇게 어색하게나마 가족 이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베를린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발전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컸구나.”
“한창 자랄 때니까요.”
“음? 하하하하. 그래. 그럴 때지.”
식사가 나오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6월에 출시라고 들었는데 벌써 작업을 마친 게냐.”
“좋은 사람들이랑 있으니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어요.”
“문제는 없었고?”
“문제가 있어야 더 발전하더라고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할아버 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사람은 항상 발전을 해야지. 벌써 다 컸구나.”
뭔가 기분이 묘한 칭찬이다.
“그래. 네가 갈 학교에 대해서는 들었느냐.”
“아직 이야기 안 해줬어요.”
할아버지의 질문을 어머니께서 대답하셨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나를 보고 본론을 꺼내셨다.
“한국 대학 부설 초등학교다. 대한 민국의 최고가 될 사람들이 배움을 시작하는 곳이지.”
확실히 좋긴 좋은 곳인가 보다.
“음악을 하고 싶다면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마. 악기부터 선생까지 최 고로 준비했단다.”
“음악도 배울 수 있어요?”
한글과 수학, 자연과학 그리고 철 학 정도를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그럼. 네가 배우고 싶은 것은 모두 가르쳐 주마.”
“도빈아, 음악도 좋지만 다른 것도 잘 배워야 해.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암. 내 손주가 학교 공부를 못 하 면 안 될 일이지. 네 엄마도 학교 다닐 때 공부 하나는 참 잘했단다.”
무엇을 배울지는 모르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다른 것도 잘하면 좋겠지 만 음악가인 내가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학교에 가는 걸 받아들인 이유는 어디까지나 현대 생활에 잘 적응하 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할아버지는 내게 기대가 큰 모양이다.
조금은 걱정되어 할아버지를 보는 데 씩 웃더니 정말 궁금했던 것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작곡을 가르쳐 주는 과정은 없지 만 일반 수업이 끝난 뒤 부 활동을 할 수 있을 게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를 다루거나 중학생이 되면 악단에 들 수도 있단다.”
“악단이요?”
“음. 네 수준에는 맞지 않겠지만..."
적어도 또래 중에선 가장 훌륭한 아이들이 장학생을 뽑혀 모인 곳이니 괜찮을 게야.”
중학생이 되면 한국 중학교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할 수 있을까.
수준이 높고 떨어지는 걸 떠나 한 악단을 지휘할 수 있다는 건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도리어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이 완벽한 곳이 아니라 지휘자로서 갖춰 야 할 것에 대해 좀 더 경험할 수 있으리라.
‘아무래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최지훈이라는 아이를 알고 있느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어머니와 나도 놀랐다. 최지훈을 언급하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네.”
“도빈이 친구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아이 애비가 EI전자 최우철 사장이지 않느냐. 이야기하다 보니 알게 되었지.”
“아.”
부자집 아들이라더니 확실히 외할아버지와 아는 사이인 듯하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 아버지께 종종 선물을 보냈다고 들었는 데, 외할아버지와 친해서 그런 것 같다.
“그 아이가 한국 초등학교 피아노 부에 있다고 하니, 학교생활이 좀 더 재밌을 것 같지 않느냐.”
확실히 모르는 사람만 있는 것보다는 아는 사람이 있는 게 편할 테니 까.
고개를 끄덕이자 외할아버지가 껄 껄 하고 웃으셨다.
“그래. 친구는 많이 사귈수록 좋지. 그러나 도빈아.”
갑자기 무게를 잡으신다.
“이 할아버지의 이름이든, 너 스스로 쌓은 이름이든 앞으로 정말 많은 사람이 네게 다가올 거란다. 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야. 국어나 수학 도 배워야 할 테지만, 나는 네가 그 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부했으면 한단다.”
“걱정 마세요.”
유명세를 얻은 후 내게 접근한 사람은 정말 많았다.
말도 안 되는 소문도 정말 많이 나돌았고 심지어는 누구와 통정을 해서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헛소리 마저 나돌았다.
안톤 쉰들러 같이 욕망을 감추고 다가오는 사람을 판별하고 적으로 만들지 않되 거리를 두는 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하하하하. 그래.”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히무라나 다른 사람들이 나와 외할 아버지의 관계를 들었을 때 놀랐던 이유에 대해서다.
그만큼 유명한 사람인가 싶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 물어보렴.”
“할아버지 유명해요?”
“사람들이 다 놀래서요.”
“유명하지. 도빈이가 크면 할아버 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연 스럽게 알게 될 거란다.”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조금 험상궂게 생겼다곤 하지만 내 예전 얼굴에 비해서는 유순한 편이다. 배도 나왔고.
“뭐, 뭐라.”
“쿡쿡쿡쿡.”
어머니께서 웃으셨는데 조금 당황 했던 외할아버지도 헛기침을 하실 뿐 나중에는 작게 웃으셨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외할아버지를 좀 더 놀리고 싶으신지 나와 장난을 할 때의 표정을 지으셨다.
“도빈아, 할아버지가 널 많이 사랑 하시나 봐. 할아버지 말대로 대단한 분이시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 든지 말씀드리렴.”
“암. 필요한 게 있으면 할아버지한 테 얼마든지 말하렴. 다 해주마.”
필요한 거라.
막상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예전 ‘부활’을 녹음할 때 이승희가 대여 받았다는 뒤포르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떠올랐다.
“바이올린 하나 사 주세요.”
“바이올린?”
“네. 스트라디바리우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내 알아보마. 김 실장.”
“네, 회장님.”
“경매 나온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외할아버지 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이승희에게 들었던 현 시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가격은 내가 상상하기 힘든 수준.
그런 것을 냉큼 사 주겠다고 하시 니 우리 외할아버지 정말 부자이신 듯하다.
갓 다시 태어났을 때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고 착각했는데, 그 착각이 사실일 줄이야.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김 실 장이 다시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귓 속말을 했다.
“으음?”
“왜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왜요, 아버지? 손주 사랑 지극하시더니 너무 비싼가요?”
그간 한이 많았던 모양.
어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 놀리는 걸 참을 수 없으신 모양이다.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