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80화
20. 8살, 입학(3)
일주일 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연주를 마쳤다.
내가 직접 지휘를 했다면 좋았겠지만 토마스 필스를 두고 로스앤젤레 스 필하모닉을 앞에 둘 순 없는 법 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몇 번 미팅을 하며 토마스 필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휘를 맡았는데.
바라던 바와 조금 달랐다.
다른 부분은 토마스 필스의 해석을 존중해 줄 수 있지만 주제와의 연결 부가 내 의도와는 달리 너무도 자연 스러웠다.
‘대화를 나누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고.’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어떤가.”
“훌륭했어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토마 스 필스에게 말했다.
“연결부에 음을 좀 더 끈 건 무슨 의도였어요?”
“아.”
토마스 필스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따라오는 음과 차이가 심해서 음을 좀 더 늘려 연주하도록 했네. 그게 듣기 편할 테니까.”
토마스 필스의 의견은 틀리지 않다.
“음이 끊은 뒤에 반전을 주기 위함이었어요. 일부로 연결부는 끊어지도록 의도한 거예요.”
“흐음. 그랬구만.”
“네. 이 곡, 타이틀이 나올 때 들어가거든요. 타이틀이 사라지면서 화면이 어둡게 되었을 때 소리도 없어요.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접했을 때 다시금 시작되는 거죠.”
“무슨 뜻인지 알겠네.”
토마스 필스가 단원들과 함께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다.
많은 작곡가가 주제와 연결부를 자연스럽게 또는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 주력하고 나 또한 그런 곡이 없는 건 아니나.
나는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다.
연결부를 유려하게 표현할수록 주 제와의 독립성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그런 만큼 연결부를 포기하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정적 뒤에 오는 반전을 말이다.
♪♫♬♪♫♬
연주는 내가 의도한 바와 같이 구분된 후에 진행되었다.
역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역시 훌륭한 오케스트라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렇게 훌륭한 관현악단을 지휘할 거라 생각하며.
그것이 베를린 필하모닉이길 바라며 연주를 마친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훌륭한 곡이었네.”
녹음을 마친 토마스 필스는 ‘더 퍼 스트 오브 미’의 시작 테마인 ‘Entrance’를 다이나믹하다고 표현 했다.
“고마워요, 필스.”
“천만에.”
이로써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 쳤다.
* * *
한국으로 짐을 보내기 위해 숙소에 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박선영이 침 대에 풀썩 앉으며 환호했다.
“드디어 집이다!”
“아직 3일이나 남았잖아요.”
“그러게에〜 어떻게 기다리지?”
아예 누워버린 박선영이 싱글싱글 웃기에 나도 피식 웃곤 짐을 쌌다.
한국에서 보낼 때보다 짐이 훨씬 많았는데, 이쪽에서 산 겨울옷이라 든가 물건이 꽤 많았던 탓이다.
낑낑대고 있자 박선영이 일어나 도 와주었다.
“한국 가면 젤 먼저 뭐 할 거야?”
“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건 당연 하고 가장 궁금한 건 채은이가 최근 몇 달간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해 서다.
‘악보는 제대로 봤으려나.’
혹시 몰라 히무라에게 부탁해 제1피아노와 제2피아노를 직접 연주한 것을 합쳐 녹음한 걸 옆집 아주머니 께 드렸지만.
그 애는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으니 지금은 어떨지 궁금했다.
“옆집 애가 얼마나 늘었는지 보려 고요.”
“옆집 애? 친구? 여자애야?”
뭐가 그리 궁금한지.
박선영이 징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짐부터 싸요.”
“어? 부끄러워하는 거 보니 정말 여자애인가 보네? 조숙해라. 예쁘게 생겼니?”
육십 넘은 내게 조숙이라니.
인상을 쓰곤 대답을 않자 박선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연애를 하는데 나는 뭐니. 힘들다. 인생. 안쓰럽다, 내 청춘.”
“아직 어리잖아요. 좋아하는 일에 미쳐 있다 보면 좋은 날도 올 거예요. 분명.”
“그럴까아?”
짐 싸는 걸 도와주나 싶더니 박선 영이 다시금 침대 위에 누워 뒹굴뒹굴 굴렀다.
무시하고 짐을 계속 싸는데.
박선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빈아.”
“왜요?”
“대표님이랑 오래 알고 지냈지?”
“네 살인가 다섯 살 때부터?”
“흐음.”
답답해서 싸던 걸 멈추고 물었다.
“왜요?”
“아니……. 혹시 대표님이 가족 이야기 같은 거 네게 한 적 있어?”
그 질문을 듣고 박선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더럽게 안 들어간다.
“ 없어요.”
“대표님도 많이 힘드실 텐데.”
그렇겠지.
히무라가 가끔 지갑을 열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가 가끔 있다. 아 마 가족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음악으로 달래려 해봤지만.
그럴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져 머리를 흔 들곤 늘어져 있는 박선영을 타박했다.
“놀지 말고 빨리 와서 이것 좀 도 와줘요. 내일 보내야 하잖아요.”
“그래 애.”
밍기적대던 박선영이 어쩔 수 없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8살이라 고는 해도 역시 어리다.
처음에 봤던 빠릿빠릿함도 미국에 서 넉 달간 많이 무뎌졌다.
“도빈아, 내일 루드 캣에서 환송회 파티 하자는데 어때?”
때마침 히무라가 방으로 들어왔고 갑자기 느릿느릿하던 박선영의 움직 임이 빨라졌다.
그보다 뭔가 침대 위를 구르느라 부스스했던 머리가 어느새 차분해졌다.
‘뭐지.’
“아, 선영 씨도 있었네. 도빈이 짐 싸는 거 도와주는 거야?”
“네. 도빈이가 잘 못 싸는 거 같아 서요. 이럴 때 도와줘야죠.”
“ 믿음직하네.”
‘ 얼씨구.’
이제 보니 히무라에게 마음이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 허물 없이 지내는 걸 보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애초에 우수한 재원이라던 박선영이 샛별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것도 신기한 일이다.
엑스톤이 무너진 뒤 다른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는데 박봉의 작은 신생업체로 온 이유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가는 걸로 말할게.”
“네.”
히무라가 나가고 내가 박선영을 지 긋이 바라보니 그녀가 헤헤 하며 헤 프게 웃었다.
“절 이용하는 건 괜찮지만 적어도 안 보이는 곳에서 하세요.”
“미안•…”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짐과 씨름을 한 끝에 여덟 개의 큰 박스를 모두 테이핑했다.
“끝!”
환호를 한 박선영이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나갔다.
저 젊은 처자의 짝사랑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부디 비극이 아니길 바란다.
‘히무라는 애처가니까.’
오늘의 마지막 할 일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는데 마침 어머니께서 전화를 거셨다.
이른 시간일 텐데 아마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하신 것 같다.
“ 엄마?”
-아직 안 잤어?
“네. 내일 짐 부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지난 넉 달간 했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께선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셨고.
주로 음악 이야기라 어머니께선 잘 이해하지 못하셨을 텐데 끝까지 잘 들어주셨다.
오늘도 그러려고 했는데.
-도빈아, 할아버지하고 계속 연락 하고 있었어?
어머니께서 상냥하게 물어보셨다.
보통 어머니께서 화가 나셨을 때는 한 음 정도 목소리가 낮아지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반 음 높아졌다.
보통 화가 나신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네……
-할아버지가 좋아?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솔직한 게 최고다.
“할아버지니까요.”
특별히 외할아버지에 대해 애착은 없지만, 어머니의 아버지니까.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시기도 해서 감사한 정도다.
-할아버지는 도빈이를 너무 사랑 하나 봐. 도빈이 좋은 학교에 보내자고 하시더라. 들었니?
“네. 들었어요.”
-도빈이 생각은 어때?
“좋은 환경에서 배울 수 있으면 좋아요.”
굳이 어머니께서 싫어하신다면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저주처럼 어머니를 옥죄어 할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 테니까.
-실은.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사과를 하셨대.
이건 반가운 일이다.
어머니께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 지 않으셨지만 예전처럼 외할아버지에게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오래 사이가 안 좋았던 탓에 생긴 어색함이 랄까.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라 고 여겼다.
-그래서 도빈이가 좋은 학교 다닐 수 있게 해준다는 거, 엄마는 받아들이고 싶어. 그래도 도빈이한테 물 어보고 싶었어.
“고마워요.”
-고맙긴. 우리 도빈이 덕분에 엄마 가 외할아버지랑 화해할 수 있었는데. 우리 도빈이 너무 보고 싶다.
“저도요.”
아무래도 세 분이서 대화를 나누신 듯. 할아버지가 내 말을 받아들이신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 가족의 행복함을 알려주었던 어머니 아버지가 부모와 다시 가까워진 일이니 당연한 일이다.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채은이는 어떻게 지내요?”
-도빈이 보고 싶어서 매일 운대. 돌아오면 채은이하고도 놀아줘야겠다. 우리 아들 인기 많네?
“애기잖아요.”
-도빈이도 애기예요.
“……저는 곧 여덟 살이에요.”
-하하하하. 그래. 곧 여덟 살 되는 오빠니까 동생 잘 달래줘?
분하지만 졌다.
다음 날.
루드 캣에서 준비한 파티는 즐거운 분위기였다. 자극적인 음악과 함께 즐거운 분위기였는데, 다들 술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저렇게 흥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임스 터너가 손을 내밀었다.
“저야말로 새로운 일을 해볼 수 있어서 기뻤어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서로 무슨 말을 한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마음만은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그와 루드 캣이 만든 게임을 보고 감동한 것처럼.
그도 내 음악을 듣고 감동했던 것 처럼.
굳이 뜻이 통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분명 우리 사이 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