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79화
20. 8살, 입학(2)
두 사람이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없었고 그들 이외에는 유장 혁 회장의 비서만 함께하고 있었다.
“도빈이 학교를 알아봤네.”
“아.”
뜻밖의 이야기였던지라 배영준은 반은 안도하고 반은 고마웠다.
유장혁 회장의 비서인 김 실장이 건네준 팜플렛에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학교가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진희도 이곳 출신이었기에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한국 초등학교. 자네도 잘 알 걸 세.”
“네. 잘 압니다.”
“도빈이는 천재야. 부모라면 최고 의 환경에서 불편함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해줘야겠지.”
비록 그의 형편이 부족하다고 하지 만 유장혁과 같은 생각이었다.
아이에게만큼은 가장 좋은 것을 주 고 싶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야. 기악부도 우리나라에선 최고니 도빈이와 잘 맞을 테지.”
유장혁이 말하곤 김 실장에게 눈짓을 주자 그가 배영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고등학교까지 학비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받으실 겁니다. 특히 초등부 부터 전문 교사가 붙어 도빈이의 학교생활을 관리해 줄 겁니다.”
“학교생활을요?”
“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학습에 관련해 도빈이의 성취도에 따라 맞춤형 대응을 할 예정입니다. 또 성장기 영양 상태부터 신체적인 케어 나아가서는 교우 관계에 있어 서도 관리를 받을 겁니다.”
“다른 건 그렇다 치지만 친구를 사귀는 건 도빈이가 스스로 결정할 일 입니다.”
배영준이 김 실장이 아니라 유장혁 회장을 보며 말했다.
“……그건 빼게.”
“네.”
잔뜩 긴장하고 용기를 내 한 말인 데, 의외로 쉽게 의견이 반영되어 배영준은 도리어 당황했다.
“그럼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특 히 음악과 관련해 최고의 교사와 환 경을 마련해 드릴 겁니다. 이미 한 국 초등학교에는 합창단, 현악부, 관 악부 등이 있지만 도빈이의 수준을 고려, 고등부와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예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 사도 초빙할 예정이고요.”
그 뒤로도 이어진 김 실장의 설명 에 배영준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한국 대학교의 부설학교인 한국 초 •중•고등학교는 애초에 ‘있는 집 자 식’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정원 수는 적고 환경은 최고였다.
배영준은 한국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만큼 일반적인 환경과는 동떨어 진 곳인데.
김 실장의 말을 들어보면 지나친 부분 몇몇만 제외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나카무라가 해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 그런 분야가 있겠습니까? 음악 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선생에게 서 배웠는지, 누구와 함께했는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에 따라 음악 활 동을 하는 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요. 기회부터 다 르죠. 그래서 갑자기 성장한 도빈이는 그 기반이 아쉽습니다. 이제부터 차차 만들어가야죠.’
학연이 폐습 중 하나라지만 좋은 사람을 많이 알고 지내는 게 나쁜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학연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자리에 그 기준으로 포함된다면 문제겠지만.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는 것만은 분명 좋은 일이니까.
지금도 존경하는 김남식 박사.
고아였던 배영준이 아득바득 한국 대학교에 진학하여 김남식을 만나면 서부터 그의 인생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배영준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잠시 정적이 흐르고.
유장혁이 입을 뗐다.
“나를 원망하는가.”
“이게 무슨……
할아버지와 통화를 한 다음 날.
누군가 찾아와서 식사를 준비했다 고 하기에 히무라와 박선영 그리고 숙소에서 생활하는 루드 캣 사람들과 함께 나섰더니.
요리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숙소 앞 정원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다가와 테이블로 인도했다.
“무슨 일이에요?”
“글쎄. 루드 캣이 준비한 건가?”
자리를 잡고 앉은 히무라와 박선영 이 당황한 것처럼 나도 적잖이 놀랐다.
‘ 설마.’
문뜩 어제 외할아버지와 한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찾아온 사람은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였고, 정원에 세팅된 식탁은 저마다 정성스럽게 가꿔져 있다.
예전에 귀족가에 초청을 받았을 때나 보던 광경이다.
“와아. 이것 좀 봐. 도빈아, 아.”
“아.”
뷔페처럼 놓여 있는 에피타이저를 먹어본 박선영이 내게도 권해주어 맛을 보았더니 영혼이 행복해졌다.
“루드 캣에서 준비한 겁니까?”
히무라가 제임스 터너에게 물었다.
“아뇨. 듣기론 도빈이의 할아버지 께서 보내셨다고.”
“네?”
뭔가 놀랄 말을 들었는지 히무라가 되물었고 제임스 터너는 어깨를 으쓱인 뒤 음식을 먹으러 다녔다.
박선영과 나는 달고 새콤한 에피타 이저를 잔뜩 담아와 앉아 먹기 시작 했는데, 히무라가 슬며시 앉으며 물었다.
“도빈아, 할아버지 어떤 분이셔?”
“몰라요.”
돈이 많다는 건 알지만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머니께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할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한 것도 아니니까.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어서 그런가 보다 여기고 있었다.
“제임스 터너가 도빈이 할아버지가 준비해 주셨다는데?”
“그래요?”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손주 사랑이 지극한 능력 있는 할아버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 버지가 준비한 거니 맛있게 먹는 일 만 남았다.
“그래요라니. 출장 뷔페는 몇 번 봤지만 이만한 퀄리티는 처음이라고.”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게 에피타이저를 먹고 있는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척 보기에도 맛있어 보인다.
“세상에. 대표님, 이거 보세요. 아, 진짜 맛있어. 도빈아, 자.”
박선영이 덜어준 걸 먹어보니 확실히 지금까지 먹었던 파스타를 가장 한 무엇인가와는 차원이 달랐다.
“식재료도 좋고.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맛 좋은 음식을 즐기지 못하는 히무라도 결국엔 욕망을 거 스르지 못하고 먹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거 도빈 군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군.”
“사카모토. 리옹.”
그러고 있자니 뒤늦게 나온 사카모토와 리옹도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들 입맛에도 맞는 모양.
소식을 하는 사카모토도 여러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음미하며 먹는다.
“입에 맞으십니까?”
누군가 한국말을 해서 돌아보니 중년의 남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책임자 앤드류 홍입니다.”
웃긴 이름이다.
“셰프셨군요. 정말 맛있어요.”
박선영이 모두를 대신해 밝게 인사 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 덕여 보였다.
앤드류 홍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행입니다. 회장님께서 앞으로 하루에 한 번 자리를 마련하라 했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식재료나 요리를 말씀해 주시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님?”
“하루에 한 번?”
다들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걸 다들 모르는 눈치다.
요점은 이렇게나 훌륭한 솜씨를 보이는 요리사의 음식을 앞으로 계속 맛볼 수 있고.
그 메뉴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거다.
“카레가 쫗아요.”
“카레. 알겠습니다.”
“자, 잠깐. 도빈아. 카레는 언제든 지 먹을 수 있잖아.”
박선영이 말렸다.
“하지만 맛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냥 먹어도 맛있는 카레를 이렇게 솜씨 좋은 분이 만들면 대체 얼 마나 맛있겠어요?”
“하하하.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보도 록 하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앤드류 홍이 자리를 떠나자 사카모토 료이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거 도빈 군에게 깜빡 속았지 뭔 가.”
“속아요?”
나와 히무라 박선영이 동시에 물었다. 그를 속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더욱 의문이 들었는데.
“앤드류 홍이라는 친구 WH호텔에 서 나온 모양이더군. 회장님이라 하는 걸 보니 WH그룹의 유장혁 회장 에 대해 말하는 거 같던데.”
사람들이 요리사들이 타고 온 차량을 확인하곤 나를 봤다.
당장 소리라도 지를 기세다.
기억을 곰곰이 더듬으니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대화를 나눌 때 WH라는 말이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럴지도요?”
“뭐?”
히무라와 박선영 그리고 롤랑 리옹까지 놀라 역시나 소리를 쳤다.
“자, 자세히 얘기해 봐, 도빈아. 정말 WH그룹의 유장혁 회장이 네 할 아버지야? 성이 다른데?”
“외할아버지요.”
퍼뜩 어머니를 떠올렸는지.
히무라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 그렇지. 어머님도 분명 유 씨. ……아니, 그런데 어떻게 이게 이렇게까지 비밀로.”
비밀이 아니라 연을 끊은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족 이야기라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
외할아버지에게도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닌 듯하니 더더욱 그렇다.
“전 어려서 잘 몰라요.”
이럴 때는 어린 것도 편리한 듯.
정확한 대답을 피하자 다들 황당한 눈으로 나를 계속 봤다.
식사를 하는 데 방해가 되어 살짝 인상을 썼다.
“불편하게 왜 이래요.”
“전형적인 대사야. 신분을 숨기고 있었던 재벌 3세의 전형적인 대사.”
박선영이 헛소리를 해댔다.
“아, 아니. 그래. 도빈아, 너 집이 가난해서 돈 벌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건 무슨 뜻이야?”
히무라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고 다시 답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깊게 파고들면 안 돼요, 히무라.”
“이, 이것도. 천재에다가 비밀을 가진 재벌 3세. 게다가 귀엽기까지 해.”
“하하하하! 재밌구만. 재밌어.”
내 외할아버지가 부자인 게 그렇게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가 싶다.
혼란스러워하는 히무라와 박선영을 무시하곤 밥을 먹는데 버섯과 함께 곁들어 나온 스테이크가 너무도 맛 있었다.
입안에서 육즙이 혀를 감싸듯 촥 터져 그걸 음미하는데 사카모토와 눈이 마주쳤다.
“껄껄. 미국에 와서 그렇게 행복한 표정은 처음 보는구만. 녹음이 잘 되었을 때보다 말이야.”
“걸작을 맞이했을 때의 기쁨은 비 교할 수 없죠.”
“요리도 걸작이라고 표현하는가. 흠. 어디……
사카모토도 음식을 덜어 한 입 먹었는데 과연 그도 입안 가득 육즙의 풍미를 느꼈을까 싶다.
“과연. 과연 이건 걸작이로군.”
사카모토와 웃으며 다시 한번 고기를 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