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73화
18. 7살, 노력과 집념과 재능(3)
루드 캣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날이 다가오면서 의외의 소식을 접했다.
“4월까지?”
“네. 왜요?”
“내년부터 학교 가야지. 2월에는 와야 할 텐데. 히무라 씨 지금 통화 가능하니?”
“ 앗.”
어머니의 말씀을 듣곤 영화 인크리 즈를 15세 관람가라 못 본다고 하셨던 것처럼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
초등학교라는 곳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봄에 개학을 하는 줄은 몰랐는 데, 히무라도 한국의 입학 시기에 대 해서는 몰랐던 모양이다.
“루드 캣과는 문제없는 거예요?”
“응. 우리 쪽 일이니까. 작업을 빨리 하면 그쪽에서도 도리어 좋아하지.”
“여유롭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않네요.”
“하하하. 미안., ”
갑작스레 일정이 두 달이나 줄어들 어 어쩔 수 없이 준비를 서둘렀다.
“7일에 간다고? 갑자기?”
“도빈이 입학 때문에 출국일을 당겼어요.”
“그렇지. 어쩔 수 없네. 도빈아, 이번에 가서는 건강하게 지내야 한다? 아프면 꼭 연락하고. 아프거나 하면 아빠 도빈이 음악하러 다니는 거 말 릴 거야.”
“그래 도빈아.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해야 한다?”
“ 네.”
인크리즈를 작업할 때도 히무라, 박 선영과 셋만 갔던 적이 있어서 그런 지 이번에는 어머니께서도 크게 걱 정하지 않으셨지만.
주기적으로 연락하라는 말씀을 하 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에 관해선 아버지도 같은 의견이 라 내게 선택지는 없을 것 같다.
“이, 이게 다 참고자료니?”
“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꼭 잘 챙겨주세요, 누나.”
“그, 그래.”
루드 캣과 계약을 체결한 뒤로 내 메모지는 늘어만 갔고 어느 정도는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어 바로 작업 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허. 벌써? 정말 도빈 군은 못 말리겠구먼. 7일이라고 했는가? 나도 비슷하게 도착할 테니 바로 한번 보 여 달라 전해주게.
“네, 선생님.”
또 출국일이 다가오면서 사카모토 료이치와 이번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빈도도 잦아들었다.
히무라나 박선영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느라 조금 불편했는데, 일본말 도 이제 꽤 귀에 익어서 대충 알아 듣는 정도는 가능해졌다.
어서 빨리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 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미국으로 가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출국 하루 전 아침.
“도빈아, 더 필요한 거 없니?”
“확인해 볼게요.”
8월부터 내년 2월까지 다섯 달이나 해외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짐 챙기는 데 신경이 많이 쓰였다.
어머니도 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옷이라든가 다른 물건은 현지에서 사는 게 더 편해서 대충 꾸렸지만, 내 감상과 발상을 적어둔 게임 참고 자료는 잃어버리면 안 된다.
미국에 도착해서 후회할 바에 귀찮더라도 빼먹은 게 있는지 체크리스 트를 보며 다시 한번 방을 훑는 게 마음 편했다.
“다 챙긴 거 같아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락처와 집 주 소 그리고 나에 대한 소개가 영어로 적힌 목걸이.
지갑을 포함한 간단한 여행용품과 겉옷을 넣은 배낭 하나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짐은 히무라가 미리 미국으로 배송을 보냈기에 큰 짐은 없다.
“히무라, 저번에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되었어요?”
“아. 음……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 에는 배송될 것 같은데?”
핸드폰으로 무엇인가를 확인한 히무라가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혹시나 늦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출 국하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다.
채은이네 집으로 향했다.
똑똑“
이 건물은 초인종이 너무 높은 게 단점이다.
“누구세요〜 아, 도빈이구나?”
“안녕하세요.”
“채은이도 이제 준비 다 했어. 채은 아〜 도빈이 오빠 왔다.”
아주머니의 부름에 안쪽에서 채은 이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다칠라.’
“오빠!”
“안녕. 아주머니, 채은이 데려가도 괜찮은 거예요?”
채은이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응. 엄마한테 들었어. 도빈이 녹음 실로 데려가 준다며?”
“ 네.”
“재밌게 놀다 오렴.”
“다녀오겠씀니다!”
히무라의 차를 타고 녹음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채은이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떠들었다.
“있잖아 어제 자는데 오빠 나왔다?”
“응.”
“오빠가 피아노 쳤어.”
“무슨 곡?”
“음……. 딩디딩 딩딩딩딩?”
“그게 뭐야.”
어이가 없어 웃었더니 채은이도 꺄 르르 웃는다.
30분 정도 달려 녹음실에 도착했고, 히무라가 미리 준비해 둔 피아노 두 대가 보였다.
역시 돈은 많고 보는 거다.
“우와!”
처음 보는 녹음실 풍경에 채은이가 들어서자마자 감탄했다.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결국에는 피아노에 관심을 보여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저기 가서 앉아 봐.”
반대편 피아노로 쪼르르 달려가 오 늘은 무엇을 배울지 기대하는 채은이 에게.
‘차채은을 위한 연습곡 1번’의 첫 소절을 들려주었다.
“이거 기억나지?”
“웅!”
“한번 쳐볼래?”
고개를 끄덕인 채은이가 건반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나쁜 버릇이라고 말해줬는데 도통 고쳐지질 않는다.
♪♫♬
채은이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나도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채은이의 연주가 정확해, 따로 맞추 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놀랐는지 연주가 조금 빨라졌다.
그래도 그 속도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전한 형태로 ‘차채은을 위한 연습곡 1번’을 연주했다.
환희.
채은이의 연주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를 이렇게도 칠 수 있구나, 내가 치던 곡이 이렇게나 아름다웠구나 하는 감정이.
평소답지 않게 빠른 연주에서 전해 졌다.
‘피아노는 이렇게나 즐겁다.’
‘네 손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
‘네가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나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했던 말들이.
저 어린아이에게 전해졌을까.
내 연주와 어울리는 것을 보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기뻐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지막 음을 낸 뒤에.
그 음이 공기 중에 스며들 때까지 조용히.
연주가 끝나면 충분히 시간을 가지라는 내 가르침을 채은이는 충실히 지켰다.
연주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얼굴 가득히 행복을 머금은 채은이가 여전 히 눈을 감고 방금 연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
내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나랑 체구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이렇게 달려들 때마다 위험하다고 생 각했지만 녀석이 기뻐해 줘서 다행이 라 생각했다.
“최고야! 최고! 또! 또!”
“재밌었어?”
“재밌어 완전 달라!”
그렇게 채은이가 만족할 때까지 다 섯 곡을 반복하며 연주했다.
꺄르르 웃으며 행복하게 웃어서 나 또한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이리 와봐.”
쪼르르 다가온 채은이에게 악보를 내밀었다.
“악보 싫은데.”
안다. 알아.
“이건 내가 만든 곡이야.”
그제야 채은이가 악보를 받아들어 보았다.
조금은 볼 줄 알게 되어 그것이 지 금까지 나와 함께 연주한 곡이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위에 제목이 있지?”
“ 제목?”
독일어로 적어두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차채은을 위한 연습곡 1번 C장조.”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채은이의 얼굴이 기쁨보다는 무언가 모호해졌다. 어정쩡한 저 얼굴이 채은이가 정말
기쁠 때 짓는 표정이라 믿고 싶은데.
다행히 그런 모양이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너를 위한 곡이야.”
악보를 다시 가져온 뒤 한 장, 한 장 넘겨주며 설명해 주었다.
“여기까지 배웠지? 앞으로는 이것도 이다음 곡도 배우는 거야. 그러려면 악보 보는 방법도 배워야겠지?”
다시 함박웃음을 짓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머리를 쓰 다듬어 주었다.
일요일 아침.
어제 배도빈과 함께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친 차채은은 정말 행복한 기 분으로 잠을 이루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날아갈 듯했다.
오늘은 배도빈이 어떤 곡을 가르쳐 줄까, 어제 그 행복했던 연주를 또 함께할 수 있을까.
당장에라도 옆집으로 가 배도빈에게 녹음실로 데려가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 나 오빠네 놀러 갈래!”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왔는 데, 현관에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있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아저씨들은 큰 물건을 집에 두 고 갔는데, 그때까지 차채은은 문 뒤 에서 나올 수 없었다.
“어머, 깼니?”
“응. ……엄마, 그게 뭐야?”
“도빈이 오빠가 채은이한테 주는 선물.”
“ 오빠가?”
“뜯어볼래?”
조금도 기다릴 수 없었던 차채은은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거실로 나가 엄마와 함께 박스를 뜯었다.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골판지를 뜯 자 곧 순백의 아름다운 피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채은이 쓰기에 조금 크지만 그래 도 연주를 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적당한 크기였다.
“꺄!”
너무나 행복해 지른 비명.
이 피아노로 배도빈과 함께 연주를 할 생각에 차채은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도빈이 오빠가 채은이 피아노 열심히 치라고 사 준 거래. 나중에 고맙 다고 하자?”
“지금 할래. 지금!”
“지금? 늦지 않았으려나?”
차채은은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너무 이르다 고 할 순 있어도 늦지 않았다니.
혼란스러워 엄마를 올려다볼 뿐인 차채은에게 엄마가 쪼그려 앉아 안쓰 럽다는 듯이 말했다.
“도빈 오빠 오늘 미국 간대. 오빠 없는 동안 밥도 잘 먹고 피아노 치면 서 있자?”
“ 미국?”
엄마의 말하는 태도로.
더없이 행복했던 차채은의 마음에 불안감이 싹텄다.
“응. 미국.”
“멀어?”
“멀지?”
“언제 오는데?”
“음…… 백 밤 자면 올 거야.”
너무나 긴 시간이었기에 차채은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끅. ……열 밤이면 안 돼?”
“오빠는 바쁘니까. 채은이가 피아노 열심히 치다 보면 금방 올 거야.”
“흐꼬윽. 열두 밤도 안 돼?”
엄마가 글썽이다 못해 곧 떨어질 것만 같은 차채은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끄아아앙!”
엄마는 그런 딸을 꼭 안아줄 수밖 에 없었다.
지쳐 잠들 때까지.
8월 8일. 날씨 맑음.
오빠가 이국 가따.
오빠 미워. 나빠.
일어나니까 엄마가 채은이의 곡을 틀어주 어마. 상냥했다. 오«바다. 채은이가 듣고 피아노 칠 수 이께 주고 갓다고 해따.
지금도 드꼬 이따.
오빠가 보고 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