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69화
17. 7살, 밤과 고양이(1)
채은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 보 니 어느덧 더위가 찾아왔다.
이제는 밖에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땀이 날 정도였는데, 선풍기 와 에어컨이라는 최고의 발명품과 함께 한가로이 지낼 수 있었다.
내 상태를 걱정한 히무라가 두 번째 앨범 작업에 대한 일정을 최대한 미룬 덕. 그러면서 가우왕이라는 사람과 함께하기로 조율 중이었던 이 야기도 무산되었다.
히무라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앨범 은 천천히 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덕분에 채은이에게 피아노를 가르 쳐 주며 느긋하게 지내는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안달이 나버리고 말았다.
올 봄에 작업을 한 영화 블랙맨 시리즈의 마지막, ‘블랙 나이트 인 크리즈’의 개봉일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
시사회 때 초청을 받았지만.
16일, 한국에서의 시사회에는 아버 지의 일 때문에 함께 보러 가지 못 할 것 같아 캔슬.
제작사로부터 직접 초청을 받은 미 국 뉴욕 시사회는 26일로 한국 개 봉일보다 늦기도 했고.
비행기를 타고 또 거기까지 가서 보려니 내키지 않아 가깝고,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한국 정식 개봉일에 맞춰 보기로 했다.
그 외에도 관객들의 반응을 직접 들을 수 있다든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볼 수 있다든가 하는 이유도 겹쳤기에 굳이 미국이나 일본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7월 19일에 개봉한다 고 하니, 이제 2주 뒤면 명장 크리 스틴 노먼과 내 곡이 어떻게 어울렸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척 기대된다.
“엄마,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 보러 갈 거죠?”
“그래야지? 도빈이가 만든 영화는 항상 함께 보러 갔잖니.”
말이 나온 김에 어머니께서 컴퓨터를 켜 영화표를 알아보셨다.
잘 알아볼 순 없지만 궁금해서 옆 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무엇인가를 발견하셨는지 어 하고 감탄사를 내셨다.
“왜요?”
“도빈아, 이거 15세 관람가인데?”
“그게 뭐예요?”
“15세 미만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뜻이야. 봐, 여기 그렇게 적혀 있잖니?”
어머니께서 가리킨 곳을 보자 정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세상 무너지는 듯하다. 내가 참여한 영화를 내가 못 보다니. 이 무슨 황당한 법이란 말인가.
황망히 서 있자니 어머니께서 깔깔 웃으셨다.
“아하하하. 그렇게 놀랐어? 엄마랑 같이 가면 볼 수 있어요〜”
어머니께서 날 속이시다니.
더욱 큰 충격이다.
그런 나를 귀엽다고 꼭 안으시는데 배신감과 끈적끈적한 날씨 덕에 몹시 언짢아졌다.
그런 와중에 들린 희소식이 반가웠다.
-도빈아, 루드 캣 (Rude cat) 이란 곳에서 작업 제안서가 왔어. 지금 집이야?
의사는 별문제 없다고 했지만 부모 님과 히무라가 강제로 휴식을 취하 게 했기에.
5월부터 두 달간 채은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 외에 일이 없어 조금 심심하던 차였는데 일감이 생겼다.
히무라의 전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네. 집이에요.”
-그래. 어머님도 계시지? 곧장 출 발할게. 삼십 분 정도 뒤면 도착할 거야.
전화를 끊으니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히무라 씨니?”
“네. 루드 캣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자고 제안이 왔대요. 삼십 분 뒤 에 온대요.”
“루드 캣?”
어머니께서도 모르는 곳인가 보다.
“히무라가 오면 같이 설명 들어요.”
“그래. 하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예전처럼 무리할 필요 없이 적당한 선에서 음악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여 어린 몸을 축내는 게 도리 어 멍청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돈 많이 벌었으니까.’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정산을 받으면서, ‘Dobean Bae 배도빈: 피아노 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이 현재 까지 총 약 8억 3,331만 원의 수익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 음반 판매량이 높기도 했고.
온라인이라는 곳에서도 많이 팔렸다고 했다.
히무라에게 이 상황을 설명 들으면 서 애석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서의 수입이 매우 적었다는 것.
히무라는 클래식 음악은 경우가 조 금 다르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음악이 온라인에서 판매되고 있다고 설 명했다.
그런데 한국 시장에서 음원은 곡당 최저가가 60원 정도밖에 안 된다고.
그에 반해 주 판매처이자 구매처였던 일본과 미국에서는 곡당 최저 판매 가격이 한국의 약 30배 이상이라는 설명까지 들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약 220엔, 미국은 약 70센트.
충격이다.
‘시장 크기의 문제가 아니야.’
히무라는 애석한 일이긴 하지만 한 국 음악 시장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수익 구조의 문제라 말했다.
때문에 저작권자가 음반 판매만으로 충분한 수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런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다행히, 일본과 미국, 유럽 쪽의 수입이 잘 나와 준 덕에 이 집도 사고.
생활도 풍족하게 되었다.
연주회나 방송 출연, 영화 오리지 널 스코어 등 추가 수입이 있다 보니 앞으로는 천천히 즐기면서 음악을 하자고 생각할 때쯤.
히무라가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히무라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어머니께서 부엌으로 향하셨다.
“무슨 일이에요?”
이번에는 어떤 영화일까, 잔뜩 기 대하고 물었는데 히무라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게임 오리지널 스코어를 만드는 일이야.”
“게임?”
배영빈이 하던 것을 말하는 듯한데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하하. 영화 음악을 만드는 것과 크게 차이는 없을 거야. 게임도 영 화랑 마찬가지로 스토리가 있고 장 면이나 캐릭터에 맞는 음악을 만들 어주면 돼.”
고개를 끄덕이자 히무라가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인크리즈를 작업했던 것처럼 앨범 전체를 만들면 돼. 혼자 하는 게 아 니라 팀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조건 이 붙었어. 음악 감독으로서의 권한을 준다는 뜻이지.”
팀이라.
하나의 곡을 함께 만들어본 적은 없었기에 꺼려지기는 했지만 음악 감독이란 뜻을 정확히 몰라 물었다.
“음악 감독이요?”
“음악을 만드는 데 전권을 가진다는 뜻이야.”
“전권?”
“모든 권한.”
7살짜리 어린애에게 권한을 다 준 다니, 통도 큰 회사다.
일단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음반 제작에 필요한 악단 섭외에 대한 결정 권한도 도빈이에게 준대. 여러모로 많이 배려해 주고 있어.”
팀을 만든다는 권한은 잘 모르겠지 만 이 부분은 확실히 좋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할 수 있는 지 오랜만에 푸르트벵글러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많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어봤지만 베를린 필하모닉만큼 내 마음 에 쏙 드는 관현악단도 없으니까.
“작업 기간은요?”
“최대 10개월. 내년 6월에 출시 예 정이야. 할 수 있을 것 같니?”
10개월이면 내년 4월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말인데, 생각보다 넉넉하다.
충분히 공을 들일 수 있는 시간이 라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요. 좋은 조건인 것 같아요. 큰 회사예요?”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루드 캣이라고 게임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곳이야. 여러 명작을 많이 만들었지. 성공을 많이 해서 장기 시리즈도 많고.”
“그럼 이번에도 마지막 시리즈예요?”
지니위즈 죽음의 유물도,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도 모두 시리즈의 마 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지 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 작품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아쉬움도 분명 있었다.
“아니. 이번에는 첫 작품. 앞으로 이 시리즈는 모두 너한테 맡기고 싶대. 그래서 계약 규모가 좀 커.”
장기적으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안정적 이니까.
“우선 이번 작품에 대한 제시액은 30만 달러. 다음 작품에 대해서는 3 5만 달러를 제시했어.”
“그렇게나요?”
생각보다 많은 액수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니위즈 시리즈나 블랙 나이트 트 릴로지가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한 시리즈라 큰돈을 받을 수 있었던 거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높은 액수를 준다고 하니 내 예상보다 루드 캣이라는 곳이 큰 회사인가 싶었다.
“응. 아무래도 경력이 있으니까. 지 니위즈 시리즈도 대박이 났고 이리 저리 네가 활동한 경력이 있으니까. 계약액을 조절할 여지는 아직 남아 있어. 조금 더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게 가능해요?”
히무라가 이건 처음 제시 받은 계 약 내용일 뿐, 얼마든지 항목이나 계약금에 대해 협상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해 한 번 더 놀랐다.
“보통 영화보다 게임 쪽이 시장 규 모가 크지. 루드 캣도 크고 모회사 인 유니 인터렉티브는 세계적인 대기업이니까.”
이 시대에 조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
세계가 넓다는 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도빈이, 너를 인정한 거지. 대작에 들어갈 음악인데 최고를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히무라가 기분 좋은 말을 해주었다.
그렇게 언제 미팅을 할지,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그리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한번 정리해 볼게.”
히무라가 적어두었던 것을 보며 읊기 시작했다.
“녹음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다. 팀은 필요 없고 보조자로 사카모토 료이치를 둔다. 게임을 이해하 기 위한 지원을 아낌없이 한다. 이 거면 되는 거니?”
고개를 끄덕이자 히무라가 흐음,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녹음 작업을 하는 거야 저쪽에서 먼저 자유를 줬 으니 괜찮은데. 베를린 필의 입장이 어떨지 모르겠네.”
“푸르트벵글러라면 도와줄 거예요.”
“저번에 독일에서 뵈었을 땐 사카모토 선생님께 애니 음악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내셨잖아. 자존 심이 강한 분 같던데.”
“아.”
그 생각을 못 했다.
“물어보는 건 네가 직접 해볼래? 아무래도 내가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으으으음. 네. 해볼게요.”
나만큼이나 고집쟁이인 그를 어떻게 꼬셔야 할까 생각하다가 일단은 이야기부터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카모토 선생님이라면 지 금 좀 바쁘실 거야. 이것도 여쭤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많이 바빠요?”
“응. 버서커즈라는 만화가 내년 2 월에 극장판으로 나오거든. 그거 음악 작업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
내년 2월이면 일정이 겹친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의 일정을 망가뜨릴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이야기를 안 했는데, 히무라가 슬쩍 물어봤는지 전화가 왔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껄껄 웃으며 흔 쾌히 수락을 했는데, 나를 도와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나서준 게 조금 감동이었다.
“고마워요, 사카모토.”
-하하핫! 고맙긴 무슨. 루드 캣의 신작 게임이라니. 내가 빠질 수야 없지 않은가. 이거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게임 음악은 처음이라 사카모토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이런 거 많이 작업해 봤으니까.”
-그럼! 음음, 이거 가장 빨리 스토 리를 볼 수 있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군. 계약은 아직인가?
“네.”
-빨리 하고 일정을 알려주게. 최대 한 빨리.
“……네.”
이제 보니 날 도와주려는 게 아니 고 자기가 하고 싶을 뿐인 것 같다.
그렇게 세부 조항에 대해 조금 더 서로의 조건을 맞춘 끝에.
나는 루드 캣과의 두 작품 계약을 총액 70만 달러로 계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