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68화
16. 7살, 선생님이 되다(4)
“교본?”
히무라에게 피아노 교습용 악보를 구해다 달라고 말하자 못 들을 말이 라도 들은 듯 되물었다.
“아, 혹시 라흐마니노프 악보 말이 니? 선영 씨, 지금 안 바쁘면 도빈 이랑 같이.”
“아뇨. 피아노 배우는 애들이 보고 배우는 거요. 엄마가 학원 같은 데 에서 쓰는 게 있을 거라고 하시던 데.”
그게 너한테 왜 필요하냐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게 왜 필요해?”
정말 똑같이 물어서 조금 신기했다.
“피아노 공부하는 애가 있는데 가 르쳐 주려고요.”
“아하.”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히무라가 고 개를 끄덕였다.
“구해다 줄 수 있어요?”
“그럼. 어려운 일 아니니까. 난 또 네가 그런 걸 왜 구하나 싶었네. 하 하하. 음. 바이엘 교본이 무난하겠지?”
“저도 어렸을 때 그걸로 배운 것 같아요. 체르니나.”
체르니?
카를 체르니 그 친구의 교본이 아직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최대한 많이요. 난이도가 있어도 괜찮고요.”
“그래. 일단 종류별로 구해볼게.”
꼬맹이가 배우는 속도를 봐서는 일 반적인 초보자용 교본으로는 며칠 못 가지 않을까 싶어 부탁했다.
곧 박선영이 교본을 구하기 위해 나섰고 나는 히무라가 따라준 유가당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그의 질문을 받았다.
“도빈이가 직접 가르친다니 궁금한 데? 누구야? 그 지훈인가 하는 친구인가?”
“옆집 꼬맹이에요.”
“응?”
“가르쳐 주면 신기하게 똑같이 따라서 쳐요. 틀리기도 하고 그렇지만 결국엔 금방 완벽하게요.”
“오렌지 주스 마시러 온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엄마가 주는 오렌지 주스는 맛이 없단 말이에요.”
“하하하.”
“조금만 더 주세요.”
한 시간 뒤.
서점에서 피아노 교본을 종류별로 구매한 박선영이 배도빈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배도빈이 사무실 밖으로 나섰고 그 모습을 보던 히무라 쇼우 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선영 씨.”
“네, 대표님.”
“도빈이 요즘 밝아진 것 같지 않아?”
“글쎄요? ……듣고 보니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분명 즐거운 거야.”
히무라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박선영으로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다.
“저 없는 동안 무슨 이야기라도 나 누셨어요?”
“아, 응. 도빈이가 옆집 친구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나 봐.”
“어머. 그래요?”
“그런데 그게 재밌는 것 같아. 말 하는데 웃더라고. 배우는 애도 실력 이 곧잘 는다고 하네?”
“보통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잘 못 가르치던데. 도빈이가 가르치는 것 도 잘하나 보네요.”
“혹시 모르지. 배우는 애도 천재일지.”
“설마요.”
매니저 박선영이 구해다 준 바이엘 교본은 생각보다 쉽고 단계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연주법부터 시작해 곡의 난이도도 적당히 올라가 무난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첫 장을 펼쳐 악보를 보는 법, 피아노를 치는 법에 대해 설명하자 꼬 맹이가 뚱하게 있었다.
“채은이 어려워.”
역시 애는 애다.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애가 이 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처럼 두 마 디를 먼저 연주하고, 음계를 알려준 뒤 따라 칠 수 있도록 하였다.
‘거참, 신기한 일일세.’
취미로 할 거라면 굳이 공부를 하 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렇게 악보도 없이 박자를 정확히 맞춰 따라 치는 걸 보면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전에 쳤던 곡을 기억하고 있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즐거운 나의 집 기억해?”
“즈거운 나 집?”
도입 부분을 연주해 주니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좋아.”
비켜주니 연주를 시작하는데, 나흘 전에 알려준 곡을 정확히 연주했다.
♪♫♬
반주까지 있어 기억하기 어려울 텐데.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잘도 연주를 했다.
“잘하는데.”
“헤헤.”
칭찬을 해주니 몸을 배배 꼬며 쑥 스러워 한다.
‘ 천재야.’
가르칠 맛이 나는 아이다.
이제 겨우 일주일 함께했을 뿐이지만 내가 본 그 어떤 아이보다 뛰어 난 재능이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분명 이름을 남길 피아니스트가 되겠지.
아직은 어려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음감과 박자감각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꼬맹이가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악보도 못 보는 주제에 내가 연주 한 것을 듣고, 그대로 치는 거다.
기억력이 좋은 것도 훌륭하지만 그 보다 음과 박자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
‘채은이라 했지.’
“또, 또.”
“그래.”
메마른 땅이 비를 머금듯.
애타게 피아노를 갈구하는 채은이 에게 또다시 두 마디의 연주를 들려 주었다.
채은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고작 한 달 배웠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배우는 속도가 빨랐는데, 여전히 악보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곧잘 연주를 하기에 조금씩 난이도가 있는 곡을 알려주는 와중, 채은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기 싫어?”
“오빠가 하는 거 하고 싶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에 혹시나 싶어 편 곡 중인 리스트의 교향시를 조금 연주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려울 텐데.”
그래도 계속 재촉하기에 하던 대로 두 마디씩 나눠 연주를 해줬는데 역 시나 아직은 이런 곡을 연주하기엔 무리였다.
“천천히 배우면 돼. 우선은.”
“흑. 꾜윽.”
"..."
뜻하는 대로 잘 안 되자 채은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내가 연주했던 것을 따라해 보려고 건반을 반복해 치는데, 역시나 아직이다.
“나랑 같이 치려면 더 연습해야 해. 언젠가는 악보 보는 법도 배워 야 하고. 재미없어도 기본적인 기교는 익혀야 하고.”
"음."
어린애가 그래도 정말 분했던 모양. 다음 날부터 어렵다고 쳐다보지도 않던 악보에 대해 공부하기도 하고.
재미없다면서 연습하지 않으려 했던 하농의 교본을 따라 연습하기 시작했다.
‘자세가 됐어.’
정말 분했다면.
싫증을 내고 짜증을 내는 게 아니 라 이렇게 부족한 점을 채우려 악착 같이 달라붙는 게 정상이지만.
내가 가르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지 않았단 걸 생각하면 채은이가 피아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또 한 명의 천재를 보며 마음이 움직인 난 결국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새 악보를 펼쳐 음표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빠!”
이제는 놀러오는 일이 잦아진 채은 이가 날 부르며 집으로 들어왔다.
“채은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후다닥 들어와서는 ‘오늘은 뭐 가 르쳐 줄 거야?’라고 말하듯 들떠 있는 녀석.
하농을 가리키자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그래도 피아노 옆에 섰다.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연주 해 주었다.
악보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지 만 아직은 이 정도 수준의 악보를 볼 줄은 몰랐기에 이렇게 한 번씩 들려줘야 했는데.
두 마디씩 나눠 연주하지 않아도 곧잘 기억하고 따라 하기에 최근에는 이런 식으로 가르쳐 주곤 했다.
“오늘은 이거 연습하자.”
“응.”
중간중간 틀린 부분이 있지만 악보를 설명하며 다시 한번 연주해 주면 또 틀리는 법이 없다.
악보를 채워나가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수밖에.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게 이렇게 나 보람찰 줄이야.
카를 체르니.
그 친구 이후로는 처음이다.
얼마가 지났을까.
채은이의 연주가 제법 완성도 있게 진행되었다. 스스로도 만족했는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오빠, 뭐 해?”
“지금은 몰라도 돼.”
“채은이 연습 다 했어.”
“한번 해봐.”
채은이가 다시 피아노 앞에 가 처 음부터 기교연습곡을 치기 시작했다.
‘ 역시나.’
탁월한 박자 감각이다.
어린 나이에 하기에 버거운 수준이 건만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잘 가르쳐야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
위대한 음악가 아마데.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 중에는 두 대의 피아노가 조화를 이루며 연주 하는 곡이 하나 있는데.
아직 막 걸음마를 뗀(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채은이에게는 버거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재미없어 하기도 하고.’
슬슬 기교적인 부분을 반복 연습하는 것보다는 재미를 느끼며 연습할 수 있는 곡을 생각하다가 모차르트의 그 곡을 떠올려 직접 만들어보는 중이다.
‘나를 잘 따르니까.’
함께 연주를 하면 조금 더 재밌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확실히 현대에 사용되는 많은 교본 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이런 아이를 가르치는 데에는 그리 효 과적이지 못하단 생각이 들었다.
기본은 당연히 중요하고.
기교를 반복 숙달하는 것도 중요하 지만 무엇보다 이 어린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환 경을 만드는 것.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내가 가르쳤던 것처럼 엄격하고 무서운, 애증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정말 많은 연주자가 악기에 대해 말할 때 ‘애증’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 것처럼.
나 또한 그랬으니까.
이 아이마저 그렇게 성장하는 것은 보기 싫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나도 참 부드러워진 것 같다.
“오빠, 다 했어.”
“그럼 다음.”
“힝. 싫어. 재밌는 거 할래.”
“일주일만 연습하면 재밌는 거 가르쳐 줄게.”
“정말?”
고개를 끄덕이니 채은이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