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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64화 (6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64화

    15. 7살, 세계와 함께하다(4)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조차 모르게 바쁜 나날이었다.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가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식사 한 번 하지 못하고 서둘 러 돌아왔어야 했으니까.

    여태 내가 바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계셨던 두 분에게는 꽤나 충 격이었던 모양.

    연주회를 마친 밤.

    집에서 하룻밤도 못 자고 심야 비 행기를 타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내 건강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두 분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드릴 시간도 없이 돌아온 나는 여섯 번째 곡이자.

    영화에 직접적으로 삽입될 마지막 곡인 ‘인크리즈’의 테마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 싸매야 했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한계였다.

    긴박한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악기를 만져 보며 악상을 떠올리려 했으나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진척이 없을 때.

    머리를 식히고자 오렌지 주스를 마 시며 눈을 감고 있는데 문득 잠에 빠졌던 모양.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창밖이 어두 워져 있었고 담요를 덮고 있었다.

    누군가 가져다 준 듯하다.

    몇 시간은 잤을 텐데 몽롱하고 몸이 찌뿌둥한 것이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오늘은 이만 자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 앗.”

    순간 어지러워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탕탕!

    “무, 무슨 소리야!”

    넘어지면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책 장을 잡았는데 그것이 쓰러져 버리 고 말았다.

    가까운 곳에 책상이 있어서 망정이 지 그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책장 에 깔려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등이 오싹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지.’

    히무라도 놀라서 허둥지둥 내 위로 쏟아진 책을 헤치고 나를 불렀다.

    “도빈아! 괜찮니? 어? 괜찮아?”

    그 순간.

    물건이 떨어지면서 난 소리가 퍼뜩 뇌리에 스쳤다.

    악기를 쓰는 거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것으로 표현하지 못할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고정관념.

    전임자였던 한스 짐이라는 사람도 바이올린을 칼 같은 것으로 긁어대는 것으로 소리를 표현했었다.

    모든 게 무너지는 듯한.

    그런 소리를 내려면 그런 분위기를 내려면 정말 사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지만.

    “도빈아!”

    “••••••네?”

    “괜찮냐고. 어떻게 된 일이야?”

    “아. 그냥 좀 현기증이 났을 뿐이 에요. 그보다 히무라, 책이나 무거운 거 많이 구해다 줄 수 있어요?”

    “뭐?”

    “마지막 곡에 넣고 싶은 소리가 있어요. 여러 물건을 좀 준비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도빈아, 일단 알겠으니 오늘은 이 만 자자. 현기증이라니. 내일 일단 병원부터 가고 그 일은 그 뒤에 하 도록 하자.”

    ‘ 아.’

    소리에 집중해서 눈치채지 못했는 데, 히무라가 정말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놀랄 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예전 일을 떠올려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의 걱정대로 잠시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할 듯싶다.

    “그렇게 해요.”

    오늘은 적어도 푹 자도록 하자.

    * * *

    다음 날.

    “뭐라고요?”

    “그러니까…

    “난 지금 당신을 아동학대범으로 신고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당신이 직접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그랬을 거예요.”

    뭐라는 거야.

    영어로 말하는지라 도통 알아 들을 수 없어 답답할 지경이다.

    의사가 히무라에게 잔뜩 겁을 주고 있는데, 히무라는 또 그것을 가만 들어주고 있었다.

    “하루 입원하되 충분한 수면을 취 해야 할 겁니다. 꼬마야, 영어를 할 줄 모르니? 이 사람이 너를 괴롭힌다면 언제든지 경찰에 연락해야 한다.”

    땡큐라고 하려다가 문득 히무라의 말이 떠올라 올려다보자 의사가 고 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무슨 상황이기에 저 친구가 저러는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널 괴롭히면 언제든지 경찰 에 연락하라고 했어.”

    “히무라가요?”

    “그렇게 보인 모양이야.”

    어이가 없어 의사에게 ‘no, no.’라 고 했지만 그는 히무라를 더욱 의심 스럽게 보았다.

    히무라와 함께 진료를 받기 위해 온 인근 병원으로 온 나는 과로라고 진단을 받았고.

    결국 1인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아무것도 하 지 못하게 침대에 누워만 있는데 보 통 지루한 게 아니었다.

    -jingle bells Batman smells Robi n laid an egg』)

    DBatman TAS 中

    TV가 있기는 한데,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내게는 그저 소음일 뿐 이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있기를 몇 시간.

    “ 괜찮은가?”

    사카모토 료이치와 토마스 필스 그 리고 크리스틴 노먼이 놀라서 병원으로 뛰어 왔다.

    과로라니.

    나조차 어이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 은 오죽할까.

    헝클어진 그들의 머리카락과 당황 하여 초점이 흔들리는 눈빛을 보니 다들 어지간히 놀란 듯하다.

    “도빈아, 자.”

    “고마워요.”

    박선영이 깎아 준 사과를 집어먹으며 세 사람의 걱정을 덜기 위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잠이 부족했을 뿐이에요.”

    그러나 그다지 효과는 없는 모양. 말을 잃은 세 사람은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루 쉬면 괜찮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래. 일단 쉬게나.”

    사카모토 료이치가 내 손에 그의 손을 얹으며 위로했다.

    마침 입원 수속 등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나갔던 히무라가 돌 아왔다.

    “아, 다들 오셨군요.”

    “어찌된 일인지 설명 좀 해보게.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

    사카모토 료이치가 히무라에게 물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최근 일정이 빠듯하 다 보니 도빈이도 조금은 부담을 느낀 모양입니다.”

    “흐음.”

    일본어를 조금 안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카모토와 대화를 마친 히무라가 내게 다가왔고, 사카모토는 또 노먼 감독과 필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듯했다.

    “도빈아, 보통 부모님이 몇 시쯤 출근하셔?”

    “그건 왜요?”

    “입원했다고 알려드려야지. 정말이 지 면목이 없다.”

    “안 돼요.”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아셨다간 당장 내일 비행기를 타고 오실 것이다.

    아니, 분명 오신다.

    “걱정시켜 드리기 싫은 건 이해하 지만 이런 일을 감출 순 없어. 이건 너를 믿고 맡긴 두 분에 대한 신뢰 문제야.”

    히무라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제가 말할게요. 그럼 괜찮죠?”

    “••••••그래.”

    벽걸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후 4시 30분.

    히무라가 지금쯤이면 서울은 아침 8시 30분쯤일 거라 말해주었다.

    보통 그 시간이면 아버지가 이미 출근한 뒤라 어머니께서도 깨어계실 거라 생각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이어졌고 어머니께서 전 화를 받으셨다.

    -도빈이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 수가 있지? 잘 지내고 있어? 밥도 잘 먹고 있고?

    분명 평범한 이야기인데 뭔가 죄를 지은 느낌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작업도 잘 진 행되고 있고요.”

    -다행이네. 엄마 보고 싶진 않고?

    “보고 싶어요. 음……. 엄마.”

    - 응?

    “곡 쓰다 보니까 요즘 잠을 잘 못 자서요. 그래서 사실 조금 졸리긴 해요.”

    -그럼 안 되지. 잠을 잘 자야 키도 큰단다. 계속 바쁜 거야?

    “네. 그래서 오늘은 푹 쉬기로 했어요.”

    -그래. 저번에 연주회 끝나고 그렇게 그냥 가서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안타까웠는데. 힘들면 히무라 아저 씨한테 말해서 꼭 쉬어야 한다?

    어머니의 말을 듣는 동안 히무라를 보자 그가 죄책감에 싸여 고개를 들 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_응-

    “그래서 병원에 왔는데 하루 입원 하고 가래요. 하루만 쉬면 괜찮대요. 정말 괜찮은데 의사가 조금.”

    - 입원?

    “입원이긴 한데 큰일은 아니고.”

    -도빈아, 히무라 씨 옆에 있니?

    “ 있어요.”

    - 바꿔주렴.

    ‘일 났군.’

    어머니께서 내시는 목소리의 음이 내려간 걸로 보아 분명 화가 단단히 나셨다.

    경험상, 이럴 때 괜히 ‘안 오셔도 돼요’라는 식으로 나갔다간 화를 부추기는 꼴이니 조용히 히무라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그래도 히무라에게 먼저 전해 듣는 것보다는 나을 터.

    내 목소리를 직접 듣고 대화를 나누셨기 때문에 아침부터 히무라에게 ‘도빈이가 입원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충격을 덜 받으셨을 것이다.

    히무라는 전화기를 받아들곤 복도로 나가 통화를 나누었고.

    크리스틴 노만이 다가왔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걱정스레 보았는데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니 이 불을 좀 더 올려 덮어주곤 인사를 했다.

    이렇게 다들 난리를 피우니 적응이 안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무리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데, 사 실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 싶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은 모양인지, 다들 내일 또 오겠다는 안부를 남기곤(내일은 퇴원한다 는데도) 떠났고.

    히무라는 잔뜩 지쳐서 병실로 돌아왔다.

    “엄마가 뭐라고 하셨어요?”

    “날 믿으니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 정말이지 도빈이 네게나 어머니께나 면목이 없다.”

    “그런 말 말아요. 잠 안 자고 곡을 쓴 건 저예요. 이 작업을 하기로 결 정한 것도 저고요.”

    사실을 말했음에도 히무라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먹고 싶은 것 좀 사 주세요.”

    “물론이지. 식욕이 있어 다행이네. 뭔데? 뭐든 구해다 줄게.”

    “저번에 사카모토랑 여기 왔을 때 묵었던 호텔이 있는데, 거기 시폰 케이크가 맛있었어요. 그거랑 크림 소다랑 콜라. 아, 그리고 단 오렌지 주스도요.”

    “그거 먹으면 나을 것 같아요.”

    “아닌 거 같은데. 그냥 평소에 못 먹던 걸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 이럴 때 먹어야죠.”

    히무라가 한숨을 푹 내쉬곤 나가서 한 시간 뒤, 만족스러운 간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콰당탕탕탕-

    아주 만족스러운 소리가 완성되어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틀간 푹 쉰 뒤에 다시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사카모토 료이치의 도움을 받아 악기가 내는 소리가 아 닌 다른 소리를 음악에 삽입하는 작 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도전하는 일이라 사카모토 료이치의 조력이 너무도 큰 힘이 되었다.

    또 이렇게 음악을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되어 조 금은 들뜬 상태였다.

    “제법 그럴싸하구나.”

    “완성되면 그럴싸하다는 말은 못 할 거예요.”

    “하하하!”

    이후 집중하여(밤 10시에는 억지로 자야 했지만) 곡을 다듬고 만들어 완성한 ‘인크리즈’.

    바단조의 격렬한 곡을 완성해 녹음 과 덧씌우기 작업까지 마칠 수 있었다.

    처음 그 완성된 음원을 들은 나와 토마스 필스, 사카모토 료이치, 히무라 쇼우 그리고 크리스틴 노만은 누 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두 팔을 번 쩍 들었다.

    9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성장했구나.”

    “그럼요.”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음악과는 조금 다른 영역에 한발 내디딘 작업이었다.

    타인의 요구를 받아 음악을 만드는 일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하겠다 마음먹었는데.

    (‘가장 큰 희망’과 ‘용감한 영혼’을 작곡했을 때는 전적으로 내게만 권한이 있었다. 아마 사카모토 료이치 의 배려와 권한이었던 듯싶다.)

    이렇게 함께 작업을 하며 하나의 큰 예술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확실히 새롭게 다가왔고.

    그 계기가 되어준 ‘블랙 나이트 인 크리즈’는 내게 너무도 좋은 환경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편집을 하느라 최근 얼마간 계속해 철야 작업을 하고 있는 노먼 감독이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한스 짐이 쓰러졌을 때는 정말 세 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 잘해줄 줄은 몰랐어. 진심으로 고마워, 마에스트로.”

    노먼이 내 손을 꼭 잡고 감사의 뜻을 전했고.

    그가 한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얼마 만에 듣는 말일까.

    “큰일을 했군, 마에스트로.”

    토마스 필스와 사카모토 료이치가 동시에 노먼과 함께 나를 칭했다.

    단순한 호칭일 뿐이지만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보면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죽기 전.

    유럽에서의 나는 마에스트로라 불 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불멸의 음악가.

    나를 칭할 단어는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이라는 이름뿐이라 생각했기에 그러했는데.

    지금 이 ‘마에스트로’라는 단어는 내게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태어난 이 시대에.

    이 새로운 시대가.

    이 나를, 배도빈을 인정했다는 뜻이고 나의 음악이 그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뜻이니까.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은 불멸의 무엇을.

    사람의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감정에 충실했던 나의 음악.

    그것을 인정받은 듯하여 기쁘게 그들의 표현을 받아들였다.

    이것이야말로 그래미상보다 가치 있는 진정한 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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