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63화
15. 7살, 세계와 함께하다(3)
“반가워.”
“반가워요.”
내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
틀림없이 그 무게감 있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면 지긋한 중년 남성일 거라 생각했는데.
4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크리스틴 노만 감독은 이야기를 나 누기 전에 우선 영상을 볼 것을 제 안했다.
아직 편집이 완벽히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도움이 될 거라는 말에 동의 하여 아직 미완성의 영화를 보았는 데.
이 감독의 천재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고가 가장 뒤에 나오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영화가 어떤 분위기로 홀러갈지 잘 보여줘야 해.”
“네. 어떤 의민지 알 것 같아요. 비장한 느낌을 주었으면 하는 거 죠?”
“응.”
“로고가 뒤에 나오는 건 왜 그런 거예요?”
“영화를 보고 제목을 생각해 봤으면 해서?”
“그럼 그 부분에서는 음악을 배제 하는 게 좋겠네요. 생각을 할 수 있게.”
“좋아.”
스파팅 세션 과정은 내 생각보다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 대본이나 참고자료에서는 알 수 없었던 크리 스틴 노먼 감독의 의도를 좀 더 명 확히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이 영 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꾼 의 입장으로 있을 수 있었다.
스파팅 세션을 마치고 노먼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어땠어?”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셔서 고마워요, 노만.”
“나도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녀를 보고 있는데, 살짝 웃더니 가방에 손을 넣는다.
“여기. 사인 좀 해줄래?”
“ 아.”
그녀가 꺼내 보인 것은 내 첫 번 째 앨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이었다.
“사실 한스 짐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이번 영화의 오리지널 스 코어를 만들 사람은.”
“그래서 한스 짐이 아파서 일을 못 한다고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고민이 많았거든. 그 때문에 후임을 찾는 일도 늦어졌고.”
그녀가 얼마나 한스 짐이란 사람을 신뢰하는지 말하는 태도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 그와 제작사가 도빈이, 너를 추천했을 때도 사실 그리 내키지 않았어. 너에 대한 이야기는 뉴스로 몇 번 접했지만 이 영화, 이 트릴로지의 OST는 한스 짐이 맡아 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오랜 시간 함께했던 유능한 동료.
마음이 맞았던 동료를 대신하는 거니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한스가 보내준 이 앨범을 듣고 마음을 굳혔어. ‘Auferstehun g’. 부활이라는 뜻이라지? 이 처절하고 고독한 전개. 끝에 이르러서는 고결한 사명을 짊어진 듯한 이 곡을 쓴 사람이라면 함께하고 싶다고 생 각했어.”
그녀의 말을 듣고 씩 하고 웃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부 활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을 비슷하게나마 읽은 듯했다.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와줘 서 고마워.”
먼저 개봉한 두 편의 영화를 보면 서도 얼핏 느꼈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훌륭한 이 야기를 보여줄 수 없었을 테고.
또 그러니 지금 내게 이렇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유물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 업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최선을 다 해야겠다.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말이다.
“아, 그런데 아직 오케스트레이터를 못 구했다고 들었는데. 빨리 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아는 사람 이 없다면 한스 짐과 같이 작업한 사람을 소개해 줄게.”
“오케스트레이터?”
“난 잘 모르지만 작곡을 하면 오케스트라로 편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 하던데.”
고개를 끄덕이니 노먼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편곡자를 따로 구하던데?”
“괜찮아요.”
“음?”
물론 편곡자를 따로 두면 작업 속 도는 빨라질지도 모르지만.
내 성격상 그걸 또 일일이 확인해 야 할 것이 뻔하다.
내 의도를 세밀하게 녹여낼 사람이 드물기도 할 뿐더러, 어차피 다시 확인해야 하는 이상 그럴 필요 없다 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혼자 했던 작업이니 만큼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남이 한 것을 다시 고치는 스트레스보다는 나을 것이다.
“제가 하면 돼요. 걱정 마요.”
조금 황당해하는 감독을 보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노먼.”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내게 요청한 것은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었다.
고곤, 고독, 고결.
괴롭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고독하게 싸우는 고결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그 처절함과 비장함을 표현하기 위 해 나는 어떤 악기를 내세워야 할 지, 어떤 전개를 가져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크리스 틴 노먼이 전달해 준 참고 자료와 대본을 반복해 보았고.
블랙 나이트라는 캐릭터에 대해 완 전히 이해했을 때.
깃펜을 들었다.
첫 곡은 G단조.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기)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
편성은 플루트2, 오보에2, 바순2, 호른2, 호른, 튜바2, 현악5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하프).
위기가 다가오는 분위기와 영화 중 간, 모든 교통수단을 잃는 장면에 삽입될 ‘A day of reckoning(심판의 날)’이 완성되었다.
4분 남짓한 곡을 완성했을 때.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토마스 필스가 내방하여 노먼 감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이걸 정녕 3일 만에 만들었다는 말인가.”
굳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작곡 속도가 빠르지 않다.
도리어 느린 편인데 영화의 메시지 가 너무나 강렬하고 인물이 확실했기에.
작업하기 수월했을 뿐이다.
그러나 곡을 빨리 만들고 느리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노만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야기 진행은 빨랐다.
“필스 경, 녹음은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일정이 빠듯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준비하도록 하지. 정기 연주회가 없는 날에는 틈틈이 작업하도록 하 자꾸나, 도빈아.”
“네.”
그렇게 작곡을 하는 와중에 노먼과 함께 녹음 상황을 보러 가고, 다시 작곡을 이어나가는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
두 번째 곡을 거의 완성할 즈음 ‘심판의 날’에 대한 녹음이 끝났는데, 함께 완성된 곡을 감상하였다.
♪♫♬♪♫♬
내 의도대로 긴장감을 주는 도입부 와 불안정한 음계 차로 생기는 묘한 불안감이 제대로 전달되었다.
역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토 마스 필스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크리스틴 노만 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질문을 했다.
꼭 아이와 같은 얼굴로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어디에 들어갈 거라 생각하고 만들었니?”
“철도와 공항이 부서질 때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노먼이 밝게 웃더니 두 팔로 꽉 안고 얼굴을 부비며 내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세상에나. 정말 괴물이 되었구만.” 네 번째 곡을 만들 쯤엔 한 달 정도가 지났는데.
음악을 잘라 영화에 입히는 작업 (미키마우싱)과 에디터 역할을 해주 러 사카모토 료이치가 로스앤젤레스 로 왔다.
앞서 만든 세 개의 곡을 들은 사카모토가 기쁜 얼굴로 악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작업 속도, 완성도, 표현력. 모든 것이 완벽하네. 정말 괴물이야, 괴 물. 우리 LA 필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네.”
함께 있던 토마스 필스가 앓는 척을 했다.
그의 뛰어난 지휘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녹음 작업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거 내가 늑장을 부렸구만. 아직 일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 생 각해서 천천히 왔더니.”
“맞아요. 너무 늦었어요.”
“허허. 그럼 서둘러야겠구먼. 뒷일 은 내게 맡기고 도빈 군은 어서 계 속 작업하게나. 노먼 감독, 바로 진 행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사카모토 씨.”
완성된 하나의 곡을 자르고 영상에 붙이는 일은 영화를 잘 이해하고, 음악을 잘 아는.
두 분야에 대해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크리스틴 노먼과 사카모토 료이치 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특히 사카모토 료이치가 내 곡을 훼손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도리어 내 의도를 잘 파악해 적절 한 곳에(아마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도) 삽입해 줄 거라 믿고.
다시금 곡 작업에 들어갔다.
저녁 시간.
히무라, 박선영, 사카모토와 저녁을 함께하는데 사카모토가 재밌는 이야 기를 꺼냈다.
“도빈 군, 영화 음악에 대해 공부는 좀 해봤나?”
“아니요.”
“흐음. 정말 많은 거장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을 했었지. 예를 들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장면에는 어떤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궁금하게 만들어야겠죠?”
“그렇지. 그래서 어떤 음악가는 칼 림바라는 아프리카 악기를 사용했었네.”
“칼림 바?”
히무라와 박선영도 모르는 눈치다.
“하하. 사실 나도 그 사람에게 듣기 전까지는 몰랐던 악길세. 그러니, 그 처음 듣는 음색에 사람들이 호기 심이 자연스레 생기지 않았을까?”
“ 아.”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자네처럼 정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었지. 요리쿠네 라는 사람은 멜로디만으로 관객을 압도했지. 음. 이런 식으로 말이야.”
사카모토가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었는데.
그 힘이 대단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하만 이란 사람인데, 정말 대단하다네. 정말 독특한 소리를 냈지.”
“어떻게요?”
사카모토가 이번에도 핸드폰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틀었는데, 박선영이 아 하고 감탄했다.
“저 이거 알아요. 헤이치콕 감독의 매드에서 욕실 살해 장면.”
“영화를 좋아하나 보군. 정확하네.”
살해 장면이라.
확실히 그 기이한 사운드가 감정을 극도로 긴장하게 만든다.
“흔히들, 이쪽 업계에서는 영화 음악을 로션이라 말한다네.”
“로션?”
매일 어머니께서 세수를 하면 얼굴에 치덕치덕 발라주시던 그 로션인 가 싶어 되물으니, 사카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에 감정을 덧입혀 주지 않나. 그러니 로션이지.”
정말 좋은 표현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