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61화 (6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61화

    15. 7살, 세계와 함께하다(1)

    아직 날이 덜 풀렸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옷깃을 여 민다.

    2월.

    일정에 찌든 삶에 회의를 느낀 나는 히무라와 담판을 지을 생각으로

    그를 불러 한마디 해주었다.

    “일 너무 많아요.”

    “그래. 안 그래도 이번 달은 연주 회 한 번 이외에는 없어.”

    뜻밖에 말이 잘 풀려서 조금 당황하 고 있자니 히무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간 잘 버텨줘서 고맙다. 활동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네가 음악을 하는 거니까. 작곡도 하고 연주 연습할 시간도 필요할 거라 생각 해서 일정을 많이 줄였어.”

    “히무라!”

    “그래도 팬들이 워낙 보고 싶어 하 니까 가끔은 나가도록 하자.”

    고개를 끄덕이니 히무라가 갑자기 내 사진을 찍었다.

    “뭐예요?”

    “방송 활동을 줄였으니 SNS라도 해야지. 원래 눈에 안 보이면 관심 이 줄어들 수밖에 없거든. 이런 식 으로라도 팬들과 교류해야 해.”

    “SNS?”

    히무라가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내 사진이 여러 장 있었는데, 거기 에 사람들이 댓글이라는 것을 올리 고 있었다.

    “이런 거 할 줄 몰라요.”

    “관리해 줄게. 가끔 사진이나 찍을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 그리고 이거라든지 전반적으로 도빈 이를 도와줄 사람을 한 명 구했어.”

    직원을 한 명 더 들인 듯하다.

    내가 생각해도 히무라가 하는 일은 너무 많았다. 방송국, 언론사, 음반 사 등 단체와 만나는 것으로도 모자 라 나를 직접 어디론가 데려다주고 하는 일까지 모두 도맡아서 하는데.

    내가 바쁜 이상으로 그도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히무라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이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린 아가씨다.

    “반가워, 도빈아. 오늘부터 도빈이 랑 같이 일할 박선영이라고 해.”

    “젊지만 유능한 친구지. 외국어에 도 능통하고 한국대 졸업생이야. 그 리고 원래 엑스톤에서 일하고 있기 도 했었고. 도빈이의 전속 매니저란다.”

    “매니저 누나라 불러줘.”

    20대 후반 정도의 어린 아가씨인데.

    ‘누나’라는 호칭은 과연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일단 이승희가 31살이니 거기까지는 말하는 것이 원래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반가워요.”

    손을 내밀자 박선영이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우선 첫인상은 합격이다.

    “그럼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와서. 으음. 도빈아, 또 영화 음악 제안이 들어왔는데.”

    “네.”

    ‘죽음의 유물’ 1, 2부를 작업했기에 영화 음악을 만드는 일에는 제법 익 숙해졌다.

    또 그만큼 내 곡을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아져서 그 소식이 반가웠 는데, 이번에는 진행 방식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전처럼 한 곡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앨범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시간은 많이 남은 거예요?”

    히무라가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그리 여유가 있는 일정은 아 니야. 4월까지, 그러니까 두 달 안 에 만들어야 하거든.”

    그 말을 듣자마자 절로 인상을 쓰게 되었다.

    일정이 생각보다 촉박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히무라가 계속해서 설명을 했기에 우선은 들어보았다.

    “영화 제목은 블랙 나이트 인크리 즈.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어마어마 한 기대작이야.”

    “그런 중요한 일이 왜 이렇게 급박 하게 되었어요?”

    “한스 짐이라는 분이 원래 맡기로 한 일인데 이번에 몸이 좋지 않으셔 서 어쩔 수 없이 캔슬이 되었대. 후 임자를 찾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거지.”

    중요한 일을 맡길 사람을 찾지 못 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이 급하기도 하지만 공을 들인 작품에 어설픈 사람을 쓸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번에 네 곡을 듣고 한스 짐 본인이 직접 도빈이, 너를 추천 했다고 해. 자기 뒤를 이어 블랙 나 이트 시리즈를 마무리할 사람은 너 뿐이라며.”

    "..."

    “알아. 촉박하다는 거.”

    “……이거 때문에 일정 취소한 거죠. 이거 하라고 다른 일 없애고 생 색낸 거였죠?”

    “아하하.”

    찔리는 게 있는 듯.

    히무라가 어색하게 웃는데 솔직히 저런 말을 듣고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알겠어요.”

    “휴우.”

    “대신 연주회도 빼줘요.”

    “그건……. 이미 티겟도 다 판매된 상태고 또 팬들도 너무 바라고 있으니까 조금 어렵지 않을까?”

    저번에 본 아동학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라 팬을 위 해서라는데,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와 맞춰야 하는 일도 아니고 단독 연주회라 틈틈이 준비하면 될 거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좋아. 자, 그럼 다음. 앨범 문제인 데, 도빈아, 신곡은 만들고 있니?”

    만들 수 있었을 리가.

    “그럴 시간이 없었잖아요.”

    “아하하.”

    멋쩍게 웃은 히무라가 내게 하나의 서류를 보여주었다.

    한글은 이제 대충 익숙해졌지만 어 려운 단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어서 히무라가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요약하면 도빈이가 만들 두 번째 앨범에 가우왕이라는 피아니스트가 함께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

    “가우왕?”

    최지훈이 존경한다는 피아니스트다. 이름은 들어본 적은 있지만 어 떤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그 사람이 왜요?”

    그다지 내키는 제안은 아니다만, 우선은 히무라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정확히는 소속사인 도이치 그라모 폰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는 게 맞겠지. 이쪽 업계에서는 괴물 수준으로 큰 곳인데, 아무래도 도빈이의 시장 성을 높게 판단한 것 같아.”

    기특한 친구들이다.

    “현재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음악 가 두 명이 함께한다면 좋은 시너지를 낼 거라 생각했겠지. 가우왕은 현재 20대 피아니스트 중에는 최고 로 평가 받는 남성 피아니스트야.”

    이어서 가우왕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설명한 히무라에게 가우왕의 연주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말만 들어서는 판단할 수 없으니까.

    “선영 씨, 이것 좀 틀어줄래요?”

    “네.”

    박선영이 오디오를 틀자, 스트라빈 스키의 페트루스카가 시작되었다.

    본래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피아노로 편곡했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그 편곡 능력에 감탄을 한 기억이 있다.

    그보다 연주는…….

    “자, 어떠니?”

    “잘 치네요.”

    확실히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인정받는 피아니스트라 할 만했다.

    “다른 곡도 들을 수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한 곡, 두 곡, 세 곡을 듣는데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결정을 못 했다.

    빠르고 난해한 곡을 정확히.

    그리고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기교 에 있어서는 과연 인정할 만한 사람 이고 연주 자체도 세련되어 듣기 좋은데.

    흡족하지가 않았다.

    “혹시 느린 곡도 있어요?”

    "음..."

    히무라가 가지고 있는 앨범과 핸드 폰을 뒤적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기교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그리고 요즘에는 템포가 느린 곡은 인기를 잘 못 끌거든. ”

    “왜요?”

    “아무래도 자극이 덜한 게 문제겠지? 가우왕이 인기를 끄는 것도 난이도가 높은 곡을 빠르게 잘 치기 때문이지.”

    그렇구만.

    현대 사람들이 그런 곡을 많이들 좋아한다면야 확실히 인기를 끌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곡을 한 번쯤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사실.

    나보다 연주를 빨리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가우왕이란 친구가 얼 마나 잘 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알겠어요. 한번 만들어 볼게요. 대신 6월 이후에.”

    당분간은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에 대한 OST를 만드는 데에만 집중해 야 할 듯싶어 단서를 두었다.

    “좋아. 물론이지.”

    히무라가 흔쾌히 대답을 한 뒤 메모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손을 씻고 저녁을 준비하고 계신 어머니 곁에서 수저를 놓고 있는데 아버지도 귀가하셨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들 드세요.”

    아버지와 함께 인사를 한 후 소불 고기를 집었다.

    역시 돈은 벌고 나서 보는 게 옳 다는 생각이 드는, 훌륭한 육질을 느낀 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늘 어놓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어요.”

    “어디? 샛별에?”

    “네. 히무라 아저씨가 너무 바빠서 도와줄 사람을 뽑았대요.”

    “그래? 어땠어?”

    “첫인상은 좋았어요.”

    어머니께서 수저 위에 도라지를 올려 주셨다.

    ‘이건 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먹는데 어머 니께서 걱정스레 물어보셨다.

    “요즘 너무 바쁜 것 같던데. 일이 너무 많잖니.”

    “아, 그래서 줄이기로 했어요. 이번 달에는 연주회 한 번만 나가면 된대요. 힘들다고 했더니 미리 그렇게 정리를 해두었대요.”

    “그래? 잘됐네.”

    “히무라 씨가 맡긴 게 잘한 일이라 니까. 그렇지 도빈아?”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소불고기를 집는데 어머니께서 그 위에 김치를 올려주셨다.

    ‘이 조합은 훌륭하지.’

    입 한 가득 넣고 씹고 있는데 한 가지 일이 더 떠올라서 서둘러 삼켰다.

    “도빈아, 꼭꼭 씹어 먹어야 해.”

    정말 귀신처럼 잘 보신다.

    “그리고 영화 음악 또 만들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앨범 전체를 만드는 일인데, 일정은 조금 촉박할 것 같아요.”

    “그래? 무슨 영화야?”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래요.”

    “풉!”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먹던 음 식을 뿜어내셨다.

    소중한 소불고기에 밥알이 튀어버려 절망했을 때, 아버지가 크게 소 리를 치셨다.

    “뭐, 뭐라고?”

    “블랙 나이트 인크리즈요.”

    ‘이거 남은 거 없으려나.’

    소불고기를 살피는데 어지간히 놀 라셨는지, 두 분이 흥분하셔서 계속 해서 질문을 하셨다.

    “정말? 정말이니?”

    “네. 근데 비밀이래요.”

    “그, 그래. 그래야겠지. 세상에. 내 아들이 블랙 나이트의 음악을 만들 다니.”

    “그렇게나 중요한 일이에요?”

    “그럼! 도빈아, 이번 음악은 정말 잘 만들어야 해. 꼭.”

    “네……

    굳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하 나의 곡을 만들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상에 보일 수 없으니까.

    “아,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미국에 가야 할 것 같아요. 히무라랑 같이 가는 거니까 괜찮죠?”

    “그래도 불편하지 않겠니? 엄마가 같이 가야 할 것 같아. 언제라고 하 니? 엄마가 히무라 씨하고 통화해볼까?”

    “그럼. 가야지. 가야 하고말고.”

    “여보?”

    “도빈이도 이제 다 컸어. 언제까지 우리 품에 두겠어. 도빈아, 걱정 말 고 다녀와라.”

    뭔가 아버지가 의욕적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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