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59화 (5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59화

    14. 6살, 안녕(4)

    “이야, 많이 컸는걸?”

    “히무라!”

    일본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사카모토가 독일로 왔다.

    그간 제대로 된 생활을 못했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추스른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그를 반겼다.

    “히무라 씨.”

    “잘 지내셨죠?”

    히무라의 안부에 어머니께서 작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완전 대스타가 되었던데? 설마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 설 줄이 야. 이거 같이 일하자고 하기도 미 안해지는데?”

    “호호.”

    “히무라가 추천해 줬잖아요.”

    “솔직히 승희 씨가 연주자가 부족하다기에 단원으로 활동할 수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지. 이럴 줄 누 가 알았겠니. 요 기특한 녀석.”

    히무라가 오랜만에, 건방지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간 베를린에 있으면서 있었던 일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곧 저녁시간이 되었고.

    초대를 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내 지휘 무대를 보기 위해 독일로 온 사카모토 료이치와 로스앤젤레스 필의 토마스 필스가 제일 먼저 찾아 와 히무라와 함께 담소를 나눴고.

    곧이어 푸르트벵글러, 니아 발그레 이, 이승희, 노이어 그리고 카밀라가 한꺼번에 방문했다.

    어머니와 둘만 있을 때는 넓다고 생각했던 숙소가 꽉꽉 들어차고 말았다.

    “꼬맹아,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노이어의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돌리자, 노이어뿐만이 아니라 카밀 라와 니아 발그레이도 궁금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되묻자 그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 려 사카모토와 토마스 필스를 보았다.

    뭔가 사카모토 료이치와 푸르트벵글러가 언성을 높이는 중이었다.

    “어쩌다 보니 도빈이를 도와주게 되셨어요.”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나를 대신해 어머니께서 답하셨다.

    가장 먼저 질문을 한 노이어는 어머니의 답을 듣곤 고개를 흔들며 샐 러드를 접시에 덜었다.

    “저 세 명이 함께 있는 광경을 볼 줄이야.”

    “그렇게 신기한 일이에요?”

    감탄하듯 혼잣말을 한 카밀라에게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어나 갔다.

    “그럼. 세 분 모두 내로라하는 거 장이니까. 마에스트로 사카모토는 빈 필하모닉에서 지휘를 하기 전에 베를린 필에서 콘서트마스터를 하셨단다. 물론 그땐 내가 없었지만.”

    “오, 내 이야기인가.”

    푸르트벵글러, 토마스 필스와 이야 기를 나누고 있던 사카모토가 이쪽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영광입니다, 마에스트로.”

    “하하하. 마에스트로는 무슨. 아직 그리 불러주니 고맙네.”

    “암. 그 배신자에게 그런 칭호를 쓰면 그 이름에 대한 예우가 아니 지.”

    “허허. 뭐라?”

    “내가 틀린 말 했나?”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애처럼 굴 텐가, 빌헬름. 정말 세월이 흘러도 유치한 점은 나아지질 않는군. 그렇지 않은가, 도빈 군.”

    “도빈이에게서 떨어져! 네 몹쓸 방 랑벽이 옮는다!”

    “허허.”

    방금 전에도 언성을 높이더니, 이런 식으로 투닥거린 모양이다.

    나와 어머니를 빼고 다들 두 노인 의 말다툼에 긴장한 듯 눈치를 살피 고 있었다.

    “그만들 하게. 이 무슨 추태인가?”

    “필스, 자네도 이 망나니한테 한마 디 해주게.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만 화 주제곡이나 만들고 다니는 건지, 원.”

    “만화 주제곡?”

    “도빈 군, 혹시 지구방위대 가랜드 라고 들어봤는가? 꽤 재밌는 만화일 세. 추천하지.”

    들어본 적 없다.

    “그 아이는 클래식 음악을 이끌어 갈 재목이야! 그런 거에 시간 낭비 해선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만화가 뭐가 나쁘다고 자꾸 그렇게 성을 내는가. 도빈 군은 아직 어 려. 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게 우리 같은 노인들이 할 일이 지. 필스 경, 그렇지 않은가?”

    “좋은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 보여주느냔 말이다!”

    사카모토와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가운데에 두고 시끄럽게 소리를 질 러대는데(사실은 푸르트벵글러의 일방적인 반응이었지만), 본인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내가 뭘 해야 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며 헛웃음 이 나왔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가 사카모토 료이치가 하는 음악에 대해 비난하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기에 따끔하게 말해줬다.

    “세프, 형편없는 음악은 있어도 나쁜 장르는 없어요.”

    “하하하! 이거, 도빈 군이 멋진 판결을 내주었군그래.”

    “끄응.”

    삐져서 팩 하고 몸을 돌린 푸르트벵글러가 멀찍이 가 TV 앞 소파에 앉았다.

    걱정이 되어 그를 보고 있자 니아 발그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저리 말씀하셔도 속마음은 다르단다.”

    “요즘도 가끔 마에스트로 사카모토 가 지휘한 앨범을 듣곤 하셔.”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 하게!”

    “호. 그거 처음 듣는 이야기로구만. 어디, 뭐가 그렇게 좋았었나, 빌헬

    “닥쳐!”

    사카모토 료이치가 다가가자 푸르트벵글러도 더는 성을 내지 않았다.

    가운데에서 토마스 필스가 조율을 했고 세 사람의 거장은 오래된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지휘자가 더이상 지휘를 하지 않아 부리는 투정일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히무라 가 깜짝 놀라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네? 도빈이가요?”

    고개를 돌리니 카밀라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카밀라가 나와 어머니 그 리고 히무라 모두와 시선을 마주한 뒤 밝게 웃었다.

    “일단은 휴스턴 영화평론가 협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도빈이의 ‘용감 한 영혼’이 후보에 올랐다고요.”

    “오오.”

    카밀라가 소식을 전하자 다들 식탁 주변으로 모였다.

    “정식 후보 발표는 12월 10일이래요.”

    “축하하네, 도빈 군.”

    “축하한다, 꼬맹이. 결국 일을 냈구나.”

    “크흠.”

    사카모토와 노이어를 비롯해 다들 한마디씩 축하를 해주는데, 왜 영화 평론가들이 내게 상을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뭔데요? 왜 상을 줘요?”

    “그건.”

    히무라가 설명을 시작했다.

    나와 어머니는 그의 말을 경청했는 데, 미국 텍사스에 있는 휴스턴 영 화평론가 협회 (Houston Film Critic s Society, HFCS)라는 곳이 매년 그 해 영화에 특출한 성취를 이룬 사람을 선정해 상을 준다고 한다.

    “그렇게 26명의 영화평론가가 선정하는 거란다. 그들이 네 ‘용감한 영혼’이 ‘죽음의 유물: 2부’를 더욱 풍성하고 깊게 만들었다고 판단한 거지.”

    ‘영화평론가가 내 음악을 평가한다고?’

    히무라의 설명을 들으니 의문은 더 욱 커졌다.

    “도빈이가 후보로 오른 부문은 최 고의 오리지널 악보•야. 역사가 긴 상은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야. 아마 앞으로 네 최연소 기록이 갱신 되는 일은 없을걸?”

    “내키지 않아요.”

    “음?”

    “제 곡을 평가하는 사람은 평론가 나 영화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연주회에 오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 들이죠.”

    “암. 평론가란 놈들은 제대로 알지 도 못하면서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법이지.”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완전히 동의 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상을 준다고 해서 나는 전혀 기쁠 이유가 없다.

    도리어 불쾌하다.

    “빌헬름, 가만있게.”

    사카모토 료이치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도빈 군, 혹시 불쾌한가?”

    “네.”

    “평론가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자네 의 음악을 듣고 좋다고 생각한 사람 들일세. ‘용감한 영혼’이 영화를 더 욱 빛나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건데, 불쾌한 이유가 있을까 싶네만.”

    “그런 건 편지로 하면 돼요. 누구 의 음악은 떨어뜨리고 누구의 음악 은 상을 주는 행위가 오만한 거예요.”

    사카모토 료이치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것 같기에, 계속 말을 이

    어나갔다.

    “누군가 제 곡을 듣고 어떠했다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건 괜찮아요. 그건 그들의 자유고 저는 그런 사람 들 덕분에 음악을 계속할 수 있으니 까. 하지만 많은 훌륭한 곡을 두고 그중에 더 뛰어난 것을 선택하는 것 은 나쁜 일이에요. 떨어진 곡을 만든 사람과 그 곡을 좋아하는 사람에 게 실례고, 그렇게 상을 받는다 한 들 저는 그들의 기준에 맞춰주기 위 해 곡을 쓴 게 아니에요.”

    사카모토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암. 백번 맞는 말이다. 무대에서 받는 박수와 그들이 보낸 팬레터, 요즘은 댓글로도 보내더만. 그것만 이 진정한 평론이지. 도빈아, 말 한 번 잘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를 지지했다.

    “도빈아,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 란다. 사카모토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건 그저 기념을 할 뿐이야. 그런 의도까지 들어 있지는 않아.”

    “……아닐세.”

    사카모토가 이승희의 말을 끊었다.

    “내 생각이 짧았구먼. 도빈 군의 말이 맞네. 기준이 다를 뿐, 상을 못 받았다고 해서 나쁜 곡이 아니고 상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곡 이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자 사카모토 료이치 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작년 ‘가장 큰 희망’이 상을 못 받았고 해서 못 만든 곡이 아닌 것 처럼 말이야.”

    신경 쓰고 있지 않지만.

    뭔가 묘하게 화가 난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래모폰이 선 정한 기준으로 암스테르담보다 못한 게 아닌 것처럼 말일세.”

    “뭐, 뭐라고!”

    “하하하하!”

    푸르트벵글러가 역정을 내자 다 함께 한번 웃었다.

    노이어가 내 귀에 대고 ‘세프가 저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이야’라고 속 삭였고.

    나는 이 다혈질이나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이 완벽주의자 푸르트벵글러 의 진짜 모습이라 생각했다.

    사카모토 료이치와 다투는 그가 내 뱉은 말은 험하지만 얼굴은 욷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빈아, 이건 그런데.”

    “왜요?”

    일단락이 된 이야기인 줄 알았는 데, 히무라가 아쉽다는 듯 입을 다 시며 말했다.

    “상이 네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 이야. 권위 있는 상을 받으면 잘 모 르는 사람도 일단 믿고 도빈이 음악을 들어보게 되거든.”

    “물론 그 상을 이용하면서까지 장 사를 하고 싶지 않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홍보란 그런 거야. 도빈이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도빈이 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잖니?”

    “어……

    그건…… 또 맞는 말이다.

    “그러기를 위해서라도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드는 건 좋단다.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어. 도빈이가 그렇게 생각하면 시상식에 가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받기 싫어서 안 갔는데 그걸 이용하자고요?”

    뭔가 그럴 듯한 말을 하던 히무라 가 질문을 받더니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아악! 답답해!”

    이승희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도빈이 너, 쪼꼬만 게 왜 이렇게 답답하니?”

    슬쩍 이승희가 앉았던 자리를 보자 빈 샴페인병이 쓰러져 있었다. 저 큰 것을 혼자 다 마신 모양이다.

    “그럼 뭐, 상 받은 나는 아주 못된 사람이겠다? 세프, 그렇게 말하는 세프도 상이란 상은 다 받았잖아 요!”

    “그, 그건 내가 1등……

    “시끄러워요! 도빈이 너, 네가 그러면 그 상을 받고 싶어서 1년 내 내 노력하고 못 받은 사람은 뭐가 되니? 네가 심사위원 비위 맞춰주려 고 음악하는 게 아닌 거 누가 몰 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승희는 말을 멈출 생각이 아직 없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삐뚤어진 성격 누나가 콱 고쳐줄 게. 누가 감히 우리 도빈이한테 그 런 생각을 해? 근데, 누나 눈엔 네 가 그런 거 같은데?”

    이승희 아주머니께서 크게 화가 난 모양이다. 딱따구리보다 빨리 입을 놀 리는 그 기세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너 대단하다고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 거야, 이 애늙은이야! 그러니 까 고맙게 받고 음악은 너 하던 대 로 하면 돼. 알겠어?”

    “하지만.”

    “알겠어?”

    차마 대답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 이니 이승희가 내게 잔을 쥐어주더니 샴페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축하해, 미래의 마에스트로.”

    그리고 씩 웃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위험한 처자일세.’

    첫인상대로.

    시끄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다.

    한바탕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흐르 고 어머니와 카밀라가 이승희를 객 실에 옮기고 돌아왔다.

    “어…… 그럼 다음 소식을 전해도 되겠네요.”

    “네?”

    “휴스턴에서뿐만이 아니라, 로스앤 젤레스에도 연락이 왔어요. 이게 본 론이라 뒤에 말하려 했는데, 어째 일이 길어져 버렸네요.”

    카밀라가 또 모르는 이야기를 꺼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