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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5화 (5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55화

    13. 6살, 혈연(5)

    “그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몇 번 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네 남편 때 문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 줄 알고 그러는 게야?”

    “아버지야말로 그 한순간의 판단으로 몇 명의 학자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세요?”

    “그 사업은 가망이 없었어!”

    “실제로 발굴 중이었어요! 아버지 가 일을 중단한 걸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저랑 그 사람 떼어놓으려고 협박한 걸 모를 줄 아셨냐고요!”

    “배 서방이 그러더냐! 내가 너희 갈라놓으려 했다고!”

    “아뇨! 직접 들었어요. 저랑 결혼 할 거면 그 사업 포기하고 WH에서 일 배우라 하셨잖아요!”

    “그 사람 평생 꿈이었고 그것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에요. 아버지의 그 독단이 남편과 그 사업에 매진했던 사람 모두의 꿈을 앗아간 거라고요!”

    알 듯 말 듯한 대화였다.

    정말 아침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 이었는데, 어머니께서 저렇게 흥분 하신 모습은 처음이다.

    요약하자면 둘 사이에 오해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하시던 일 이 잘 안 된 모양이다.

    “이제 와서 뭘 어쩌시려고요? 왜요? 손주 얼굴은 보고 싶으셨나요? 아니면 그 잘난 회사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나요? 남편의 꿈마저도 모자 라 아들의 꿈마저 뺏으려고요?”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어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도빈이는 안 돼. 가자, 도빈아.”

    어머니에게 이끌려 일어서려는데 외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무시하셨고 나는 어머니를 따라 걷는 도중, 외 할아버지가 고개를 푹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건물에서 나와 급히 택시를 잡은 어머니는 덜덜 떨고 있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은 어머니께서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 에 눈물을 닦아드리자.

    나를 꽉 끌어안으셨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놀랬지?”

    무슨 말을 해드려야 좋을지 몰라, 고개를 젓고 어머니를 꽉 안아드렸다.

    숙소에 도착하고 어머니께서는 베 란다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아버지일 거라 생각하면서 화 장실에서 세수를 하는데 뭔가 웅웅거렸다.

    ‘뭐지?’

    요란하게 떨리는 주머니를 더듬으니 조금 전 외할아버지가 준 핸드폰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어머니 가 쓰는 걸 따라 해서 화면에 손가락을 대니 무엇인가가 와 있었다.

    [내일 다시 찾아가마. 푹 자거라.]

    아마도 외할아버지일 터.

    무슨 일로 내일 다시 찾아온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리 좋은 만남이 될 것 같지 않다.

    ‘회사를 맡아줄 사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중에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상속인가.’

    가업이라고 한다면 맡아줄 사람이 필요할 텐데, 내가 알기로 어머니께서는 형제가 없으시다.

    장녀이자 독녀인데 사'이가 저리 틀 어졌으니 어쩌면 정말 어머니 말씀처럼 그런 이야기 때문에 찾아왔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 참.’

    문득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두고 싸웠던 예전 일이 떠올랐다.

    남성편력이 심했던 요한나에게 카 를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나도 요한도 자식이 없었기에, 베 트호펜 가문을 이을 사람은 카스파의 아들 카를뿐이었다.

    비록.

    카스파가 허락도 없이 내 습작을 가져다 팔거나 멋대로 출판사를 바꾸어 흠씬 두들겨 패주었지만.

    그런 못난 동생이지만.

    결핵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아내와 함께 아들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던 녀석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스파의 아내 요한나는 부 유했던 친정 탓인지 낭비가 심했고.

    지참금으로 가져온 저택과 거금마 저 금세 탕진, 남자까지 갈아치우니, 나는 도저히 카를을 요한나 아래서 자라게 할 수 없었다.

    무려 4년.

    멍청하고 영혼도 없는 요한마저 자 식이 없었기에.

    베트호펜 가문을 위해서라도.

    한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는 카를을 반드시 데려와야만 했고, 결국에는 데려왔다.

    내가 죽은 뒤 녀석이 어찌 살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외할아버지도 그때의 나처럼 필사 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도빈아, 어디 가니?”

    “푸르트벵글러한테요. 밥도 먹고 올게요.”

    “너무 늦게 돌아오면 안 된다?”

    “네.”

    어제 어머니의 반응을 봐서는 외할 아버지와 만나는 걸 허락하실 리 없기에 대충 둘러대고 나왔다.

    조금 걷자 어제와 조금 다른 차가 보였다.

    조금 멋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의 아래로 내 려갔고,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잘 잤느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할아버지일 뿐이다. 손주를 바라보는 모습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타거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엄마 몰래 나온 거라 멀리 가는 건 안 돼요. 저기 공원에 카레 소시지 맛있는데 그거 사주시면 안 돼요?”

    할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괜찮구나.”

    “카레가 들어간 건 다 옳아요.”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카레 소시지를 먹었다.

    역시 소시지하면 독일이 최고다. 툭 하고 베어 물면 육즙이 터지고 거기에 카레까지 더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여섯 살 손주 녀석이 소개한 노점 상은 제법 실력이 있었다.

    이렇게 벤치에 앉아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지만 손주와 함께하니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

    적당히 배를 채웠겠다 슬쩍 운을 띄웠다.

    “도빈아.”

    “네.”

    “꿈이 있느냐.”

    “그럼요.”

    “무엇이냐.”

    “멋진 교향곡을 만들 거예요. 지금 까지의 음악을 모아 완벽한 곡을 만드는 거예요.”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예상했는데, 조금 다른 대답이 나왔다.

    이번 기회에 손주 녀석에 대해 알 고 싶어 한 번 더 물었다.

    “완벽한 곡?”

    “네. 그래서 그 음악을 들은 사람 들이 다음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거예요.”

    “그럼 완벽한 곡이 아니지 않느냐.”

    다시 한번 묻자 손주 녀석이 고민 하는 듯하여 잠시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그레고리안 찬트는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성가를 집대성해 정리한 거예요.”

    어린아이가 제법 어려운 말을 쓴다.

    “바흐는 세상에 떠돌던 음을 정리 해 후대 사람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했고요.”

    “모차르트는 바흐가 만들어 정리한 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었어요.”

    “흐음.”

    “다들 각자의 시대에선 완벽한 음악이었고, 후대 사람은 그것을 보고 또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죠. 저는 지금 이 시대에서 그 일을 할 거예요.”

    어린아이라서 꿀 수 있는 꿈일까.

    이제 갓 여섯 살인 아이가 시대를 만들어갈 거라 말하는데 이 늙은 가슴이 뛰는 듯했다.

    단순히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고 싶다.

    시대를 만들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을 가진 이 아이는 분명 다른 아이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도와줄 수 있을까?”

    도빈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선생님을 소개해 줄 수 있고 좋은 학교에 보내줄 수도 있단다. 그 어떤 악기보다 좋은 것을 줄 수 있어. 할아버지, 부자거든.”

    돈을 좋아한다기에.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하고 싶다기에 말했는데, 다시 한번 의외 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도와주면 편할 텐데?”

    “저도 돈은 좋아하지만 돈이 목적은 아니에요. 필요한 건 벌어서 사면 돼요. 저는 그 돈 벌 수 있어요.”

    용돈을 쥐어주면 수줍게 받거나, 그 의미조차 제대로 모를 나이일 텐데.

    나를 보는 저 곧은 시선에 자신감 이 있었다.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거란다. 돈을 벌 시간조차 아깝지 않겠느냐?”

    “연주회를 하든 앨범을 만들어 팔든 그 과정도 음악을 하는 거니까 도리어 즐거워요.”

    “지금 당장 좋은 바이올린을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연주회도 하면서 좋은 바이올린을 사면 더 좋지 않을까? 할아버지가 말하는 좋은 환경은 그런 뜻이란다.”

    “좋은 환경은……

    나를 보던 도빈이가 고개를 돌려 멀리, 정면에 시선을 두었다.

    “제게 좋은 환경은 엄마랑 아빠예요.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해 주시고 저도 두 분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거 든요.”

    “베를린 필이나 사카모토 료이치, 히무라 같은 사람이 제게 좋은 환경 이지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 편하게 사는 게 좋은 환경은 아니에요, 할 아버지.”

    이 아이는.

    “카레 소시지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이미 어른이다.

    저 작은 몸에 깃든 영혼은 그 무 엇보다도 고결하다.

    사업을 하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봤지만 이토록 나를 감화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 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손자가 제대로 못 살고 있어 안타까웠는데, 정작 그 손자가 내게 더 이상 어떤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엄마 뒤에 숨어서도 아니고.

    당당히 나와 마주하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홀로 괜찮다고.

    더는 자신과 가족을 떨어뜨리지 말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럼 가볼게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장아장 돌아가는 도빈이에게 물었다.

    “도빈아.”

    “네.”

    녀석이 돌아섰다.

    “바흐와 모차르트에 대해선 말했으면서 베토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구나. 베토벤은 어떤 음악을 남겼 느냐.”

    잠시 고민하다가 그 작은 입이 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 답을 찾을 때쯤이면.

    내 손주가 역사와 세계가 인정하는 음악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아!”

    그렇게 흐뭇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저만치 걸어간 손주가 크게 소리를 쳤다.

    “핸드폰은 주신 거니까 잘 쓸게요!”

    “하하하하! 그래!”

    녀석.

    자기 물건 챙길 줄도 알고, 배포도 있고 사업을 했으면 딱인데 말이야.

    ‘진희가 아들 교육 하나는 잘했구나.’

    *

    “다녀왔습니다.”

    “도빈아!”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께서 잔뜩 화가 나셔서 현관으로 달려오셨기 때문이다.

    “네, 네.”

    “대체 어디 갔었니. 응?”

    “푸, 푸르트벵글러••••••

    변명을 하려는데 어머니께서 정말 나를 노려보고 계시기에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점심으로 같이 먹으라고 사과파이 만들어 갔는데 푸르트벵글러 씨는 도빈이 왔다 간 적 없다고 하던데?”

    망했다.

    “도빈이 엄마한테 거짓말한 거야?”

    “그, 그게……. 끄악.”

    어머니께 이끌려 또다시 어머니의 무릎에 배를 대고 말았다.

    찰싹! 찰싹!

    “악! 자, 잘못했어요!”

    “좀 컸다고 엄마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어디 갔었어!”

    급히 떠오른 변명이 없어 말해선 안 되는 것만 빼고 말했다.

    “카레, 카레 소시지 먹으러 공원에 갔었어요.”

    “또또! 엄마가 그런 거 먹으면 몸 에 안 좋다고 했지? 엄마 속상하게 왜 그래 정말! 길 잃어버리면 어쩌 려고!”

    “그럴 리가 없.”

    찰싹! 찰싹!

    “ 악!”

    어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잔 뜩 예민하시고 또 걱정도 많이 하셨겠지만.

    정말. 너무 아프다.

    나이 육십에 엉덩이를 맞다니.

    “잘못했어, 안 했어!”

    찰싹!

    “잘못했어요!”

    이런 굴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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