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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4화 (5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54화

    13. 6살, 혈연(4)

    ‘ 흐음.’

    내가 아직 배도빈이란 아이를 잘 몰랐던 모양이다. 단 석 달뿐이었지 만 함께하면서 녀석의 천재성에 대 해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이 끊어졌음에도 연주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베테랑 연주자였으면 모를까.

    단원들도 놀라 순간 내게서 시선을 떼고 도빈이를 보았다.

    독주.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인 만큼 그 부담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아직 어려서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문인지.

    녀석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연주를 훌륭히 마쳤다.

    그리고.

    지휘를 마치고 돌아보자 언제부터 였는지 모르겠지만 객석을 향해 고 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들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지만 녀석은 박수 소리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고, 관중들의 환호가 끝나서야 고개를 든 뒤.

    나와 연주자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다섯 살(만)인 아이가 보일 행동이 아니다.

    연주 자체는 문제없이 진행했으나.

    아마 자신의 악기 관리 소홀에 대해 관중과 함께한 베를린 필하모닉 에 대한 사죄일 터.

    이 어찌 고고(孤高)한 한 사람의 음악가란 말인가.

    우선은 다음 곡을 시작해야 했기에 당당히 사과를 하고 물러가는 도빈 이를 두고 지휘봉을 다시 들 수밖에 없었다.

    * * *

    ‘빌어먹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다.

    최근 인터뷰든 기사든 CF든 이것저것 일이 많았다고는 해도 가장 기 본적인 일에 소홀했다는 점에서 용 서할 수 없었다.

    무대 뒤로 나와 분을 삭이고 있는 데 어머니께서 오셨다.

    “도빈아, 끝났니?”

    “네. 제가 할 연주는요.”

    “그렇구나.”

    어머니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하여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 곁 에 노신사 한 명이 함께 있었다.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똘똘하게 생겼구나. 할아버지와 저녁 같이할까?”

    할아버지?

    어머니를 보자 내키지 않으신 듯 어렵게 입을 떼셨다.

    “도빈이 외할아버지야.”

    어머니께서 외조부님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인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부모를 여위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

    눈치를 보니 뭔가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배도빈이에요”

    “그래. 하하.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사주마. 가자.”

    “죄송해요,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 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음?”

    “오늘 연주회에서 실수를 했어요. 연주회를 찾은 분들이랑 단원들에게 사과를 해야 해요.”

    “아까 보니 현이 끊어진 것 같던 데, 혹시 그 때문이냐?”

    “네.”

    “그거라면 어른스럽게 잘 대처한 것 같던데. 또 사과를 해야 하는 게냐.”

    “제 연주를 들으려 찾아오신 분들 이고 그걸 위해 함께 노력한 사람들 이니까요.”

    “할아버지가 음악은 잘 모른다만, 연주에는 문제가 없이 좋았던 것 같은데.”

    “연주의 문제가 아니에요. 준비에 소홀했다는 제 태도의 문제예요.”

    “흐음.”

    외할아버지가 생각을 하더니 내 옆 에 앉으셨다.

    “그래. 같이 기다려 주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총 90분의 연주회가 끝나 길 기다린 다음, 정문으로 향했다.

    관객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고 개를 숙여 그들에게 내 실수에 대해 사과를 했다.

    “어머. 배도빈 아니야?”

    “왜 여기에 있지?”

    “아까도 저러고 있던데.”

    그런 말을 들으며 얼마나 흘렀을까.

    허리가 아팠지만 고개를 숙인 채 있는데, 누군가 옆으로 왔다.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고개를 드니 푸르트벵글러가 내 곁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석 연주자들도 그 뒤에 함께 있었다.

    “이게••••••

    “누가 네 멋대로 이러라고 했느냐!”

    “네?”

    “누가 멋대로 너 혼자 사과하게 뒀 느냐. 어느 되먹지 못한 놈이 네게 이렇게 행동하라 가르쳤냔 말이다!”

    “제 잘못이니까……

    “떽!”

    푸르트벵글러가 처음으로 소리를 쳐 조금 놀랐다.

    “너는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이다. 이곳의 영광이 네 것이고 너의 실수는 우리 모두의 실수다. 어디서 못 된 것을 배워서 우리 얼굴에 먹칠을 하려는 게야!”

    큰 소리를 듣고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조금 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네 실수 따위 감당하지 못할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니다. 네가 실수했다고 해서 모른 척 너만 책임지게 둘 거였으면 단원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어!”

    “세프.”

    “자, 이제 네가 우리에게 해야 할 말을 알겠느냐.”

    “……혼자 책임지려 해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입을 열자.

    푸르트벵글러가 나를 끌어안았다.

    “오오, 이 착한 아이를 어찌할꼬.”

    나는 실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애정이 듬뿍 담긴 푸르트벵글러의 꾸중과 포옹 그리고 눈물을 훔치거 나 내게 엄지손가락을 보이는 단원

    들의 응원이.

    지금껏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뭉클함을 전해주었다.

    ‘……이것이 소속감인가.’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분명.

    소리를 잃은 뒤 처음 박수 소리를 받았을 때만큼이나 내 안이 충족됨을 느꼈다.

    *

    단원들과 인사를 하고 어머니와 외 할아버지에게 향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어머니께서 걱정스레 내 뺨을 훑어 주셨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닦아주신 것이다.

    “좋은 사람을 두었더구나.”

    “네. 좋은 사람이에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그래. 어서 가자. 시간은 소중하니까.”

    어머니가 불편해하시는 걸로 봐서 못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외할아버 지는 생각보다 정상인이었다.

    딸칵-

    정상인은 아닌 듯.

    할아버지를 따라 걷자 한 남자가 긴 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존 리처드 가 마련해 준 차보다 좋아 보이는 리무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얼핏 보기에도 부유 해 보였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 난하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꼭 잡고 할 아버지를 노려보셨는데, 확실히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

    부모와 자식 사이에 싸움이야 흔한 일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리무진에서 내려 향한 곳은 19세기 귀족의 저택처럼 호화로웠다.

    할아버지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귀족, 아니, 황족이라도 대하는 듯 정 중하여 뭔가 싶었는데.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 대우가 더 해졌다.

    곧 음식이 나왔고 먹기 시작했다.

    “도빈아, 할아버지에 대해 들은 적 있느냐.”

    “ 없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곳에서 보니 어머니와도 나이 차이가 꽤 많은 듯한데, 어머니께서 늦둥이셨거나 하는 사연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기 전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어.”

    “왜 그러느냐.”

    “맛있어요.”

    “하하. 그래?”

    할아버지가 옆에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곧장 어디론가 향했다.

    “처음 먹어보는 게냐.”

    “네. 정말 맛있어요. 할아버지도 드 세요.”

    뭔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나야 처음 본다지만 손자를 처음 보는 할아버지란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리 무리도 아니란 생각에 굳이 신 경 쓰지 않았다.

    “우리 도빈이가 올해로 몇이지?”

    “여섯 살이요.”

    “여섯 살인데 기특하구나.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줄도 알고.”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래. 사람이라면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지.”

    아, 이것도 맛있다.

    “음악은 제대로 배우고 있느냐.”

    처음 봐서 그런지 궁금한 게 많은 모양.

    “네. 재밌어요. 아직 배울 게 많아서 더 좋고요.”

    “가지고 싶은 건 없느냐.”

    “벌어서 사면 돼요.”

    “하하하.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벌어서 사야지. 그럼...... 선물은 어 떠냐.”

    할아버지가 식탁 위에 상자 하나를 올려놓으셨다. 핸드폰이다.

    그것을 직접 열어 내게 건네주기에 받았는데, 어머니께서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만해요, 아이 두고 무슨 짓이에요?”

    “할아버지가 손주와 밥을 먹는 것도 문제냐.”

    “안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도빈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뭐예요?”

    “진정해라.”

    “못 해요. 도빈아, 가자.”

    뭔가 맛있는 음식에 집중할 자리가 아니었던 모양.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가 없어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예상보 다 두 분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은 것 같다.

    툭 _

    막 어머니에게 이끌려 일어서려 하는데, 외할아버지가 식탁 위에 신문을 던져 놓았다.

    Q. 곧 싱글 앨범이 제작된다고 들었다. 기분이 어떤가.

    A. 돈을 벌 수 있다니 다행이에요.

    Q. 무슨 뜻인가. 돈을 좋아하나.

    A. 네. 좋아해요. 우리 집은 가난 하니까, 음악을 더 배우려면 돈이 필요해요.

    ‘미친.’

    이시하라 린과의 인터뷰 기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게냐. 너로도 모자라 네 아이까지 가난하 게 살게 할 테냐.”

    짐작하건대 어머니의 속은 문드러 졌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사이가 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께서는 외할아버 지에게서 떠나 독립을 하신 듯하다.

    “그간 도빈이에 대해서 알아봤다. 다들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 하더구나. 오늘 보니 어린 녀석이 책임감도 있고 강단도 있고. 부모가 돼서 더 좋은 환경은 마련해 주지

    못할망정 너야말로 지금 뭐하는 짓 이냐.”

    “아버지야말로 무슨 짓이에요? 배 서방한테 한 짓 잊으셨어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배 서방 지금 그렇게 살 지 않아도 됐고, 우리 도빈이 좋은 거 먹고, 예쁜 옷 입었을 거라고요!”

    ‘이것 봐라.’

    어디서 많은 들어본 것만 같은 느 낌이 들어 생각을 해보자.

    어머니께서 아침마다 보시던 아침 드라마가 떠올랐다.

    ‘이런 걸 보고 막장이라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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