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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53화 (5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53화

    13. 6살, 혈연(3)

    CF라는 것을 찍기 위해 한국에 다 녀왔는데, 몹시 불쾌한 기억이었다.

    [세상은 나를 기다렸다. 나 배도빈, 샛별처럼 나타나 빛을 비추다. 피아노계의 샛별 체르니 피아노.]

    민망한 자세와 말을 요구한 주제에 어색하게 따라 하니 귀엽다는 말로 날 달래는 CF 제작진에게 잔뜩 성 이 났다.

    돈을 주니 하긴 했는데, 다시는 CF 따위 찍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 무리하고.

    독일로 돌아오자마자 모레 있을 정 기 연주회 연습을 하는데, CF가 대 한민국에 퍼질 생각을 하자 자꾸만 손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 어휴.”

    “비행기 오래 타느라 힘들었지?”

    쉬는 시간, 이승희가 다가와 물었다.

    “아뇨.”

    비행기는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모양인지 조금 답답할 뿐, 내 생 각보다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럼 왜?”

    “먹고 살기 힘들구나 싶어서요.”

    “……그, 그래.”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지만, 지금은 안 계시니까.

    혹시 몰라 이승희에게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셔야 해요’라고 말하자 애 매한 표정을 지어서 손가락을 걸었다.

    허튼소리를 해서 어머니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실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도빈 군.”

    “네.”

    이승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콘서트마스터인 니아 발그레이가 다가 왔다.

    오디션을 볼 때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있었던 금발의 잘생긴 남자다.

    3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마스터를 맡고 있는 만큼, 뛰어난 사람이다.

    “이번에도 제2바이올린 파트를 부 탁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문제없어요.”

    “교향곡에 독주 파트를 넣는 게 인 기를 끌고 있어 어쩔 수 없긴 하지 만 연습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 이 되네.”

    “재밌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한번 맞춰 볼까?”

    “네. 바로 해도 괜찮아요.”

    모레 연주할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G 단조.

    그 천재의 후기 작품인데, 아름다 운 선율 가운데 나타나는 고독함과 방황이 슬픈 곡이다.

    금관 악기 없이 현악기와 플루트, 오보에, 바순, 호른만으로 연주되는 데.

    그 비극적인 분위기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곡이라 나도 악보를 보곤 머릿속으로 참 많이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를린 필하모닉 의 단원들과 함께 모차르트의 G단 조를 연주해 봤는데, 상당히 좋은 느낌이었다.

    한차례 연습을 마치자 니아 발그레 이가 다가왔다.

    “일정 때문에 바빴을 텐데 연습을 했던 모양이구나. 정말 좋았어.”

    “처음 해본 거예요.”

    “어?”

    “시간이 없어서 처음 연주해 본 건 데 악보대로 연주가 되어서 맞추기 편했어요. 세프도 없는데 이렇게까 지 맞출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해요.”

    처음이라는 말에 놀란 모양인지 니아 발그레이가 말을 하지 않았다.

    “하하하. 악장, 걔 원래 그런 거 알잖아. 새삼 놀랄 것 없어.”

    “노이어.”

    “모차르트 곡은 많이 들었으니까요.”

    “여기서 모차르트 곡 많이 안 들은 사람이 어딨냐, 꼬맹아. 이리 와서 악보나 같이 보자.”

    바순 수석 노이어가 불러 가보니 다들 각자의 해석을 나누는 중이었다.

    푸르트벵글러의 해석을 따르는 거 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토론을 한 뒤에 의견을 제시하는 건 베를린 필하모닉의 오랜 전통이다.

    정해진 일에 대해서는 상임 지휘자 의 말에 완벽히 따르지만.

    그 전까지는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는 곳.

    다들 자기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이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세프에게 건의하고자 하는데 말이야.”

    “플루트를 더 많이 넣으면 멜로디는 드러나겠네요.”

    “그렇지? 요즘은 멜로디를 강하게 가져가는 게 좋지 않나 싶은데. 다들 그쪽으로 집중을 하니까.”

    “조율을 해나가면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효과가 있을까요?”

    “확실히 더 전달이 잘 되지 않을까?”

    악기의 수가 두 배가 된다고, 소리 의 크기가 두 배가 되는 건 아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 연주자는 보통 두 명이 하나의 악보를 공유한다.

    쉴 틈이 없기 때문인데 보통 연주 하는 도중 악보를 넘겨야 한다.

    그래서 짝을 이뤄 한 사람은 계속 연주, 한 사람은 페이지를 넘기도록 악보 보면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보통은 안쪽에 있는 연주자가 그 역할을 맡고, 객석에 가까운 사람이 계속 연주를 하는데.

    이때 연주되는 악기의 숫자로만 판 단하면 절반이 연주를 멈추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그런 만큼 악기 한 대가 빠지고 들어가는 것은 실제로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10명이 연주하는 소리의 크기를 두 배로 키우려면 대충 100명이 필요하다.

    “플루트가 한 대 더 늘어난다고 해 서 관객들이 느낄 순 없을 것 같아요. 당장 우리도 악기 하나가 더 낀다고 그 소리의 크기를 가늠하기는 어렵잖아요.”

    귀가 좋아서 미세한 연주 속도의 차이, 음색 차이 등을 찾아낼 수는 있어도 소리의 크기는 잘 느끼기 어렵다.

    “흐음.”

    “플루트는 그러지 않아도 전달력이 좋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것 봐. 도빈이도 나랑 같은 생각 일거라 했잖아.”

    “아니. 효과에 대한 문제잖아. 도빈 아, 너도 멜로디를 강조한다는 의견 에는 동의하는 거지?”

    “저도 관객들이 쉬운 음악에 더 반 응한다고 생각해요.”

    “봐라. 문제 자체는 남아 있다고. 악기를 늘리는 게 방법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다들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고 있다.

    저 싸움이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연주를 위한 노력임을 잘 알기에 훙 미롭게 듣는 중이다.

    한쪽이 방법을 내놓으면 다른 한쪽이 반론, 그럼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견이 나오니까.

    그러니까 이들, 베를린 필하모닉이 세계 최고인 것이다.

    잠시 뒤.

    “이게 무슨……"

    "음.."

    “들어보고 싶다.”

    플루트를 두고 옥신각신한 자리에 결국 푸르트벵글러까지 참가.

    결론은 악기 배치를 달리해 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39년, 레오폴드 스토콥스키라는 사람이 실험한 방법을 참고했는데 푸르트벵글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단원들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요상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오른쪽 가장 앞에 위치했고, 그 뒤에 바순과 클라 리넷이.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왼 쪽에 나란히 정렬해 있고 갈 곳을 잃은 비올라와 첼로가 제2바이올린 뒤로 갔다.

    결국 나누고 보니 왼쪽은 현악기.

    오른쪽은 목관악기로 갈라지게 되었는데(모차르트의 G단조에는 팀파 니나 금관악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어떻게 들릴까 궁금해졌다.

    그러고 각자 새롭게 정해진 위치에서 연주를 해보았는데, 지휘를 마친 푸르트벵글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 배치는 이대로 가기로 하지.”

    다들 객석에서 직접 듣지 못해 그 차이에 대해서는 의문을 풀지 못했지만.

    상임 지휘자가 결정을 내렸다.

    그들이 직접 투표로 20년 가까이 선출한 세계 최고의 지휘자를 믿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시 한번 연 습을 이어나갔다.

    공연 당일.

    데뷔 무대 이후 두 번째로 협연 형태로 준비를 한 만큼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무대 위로 향했다.

    무대에 서는 것은 언제나 짜릿한 경험.

    이들에게 박수를 받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사를 하고, 푸르트벵글러와 시선을 교환한 다음.

    베를린 필하모닉이 모차르트의 G 단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1악장은 ‘매우 빠르게(Molto allegro)’.

    비올라가 주제음을 열면서 시작된다. 두 개의 주제음이 제시된 뒤 이 어지는 플루트와 오보에의 하모니.

    아름답고 비극적인 선율이다.

    2악장. ‘느리게(Andante)’.

    E플랫장조인 2악장은 현악기가 주 인공이다.

    이승희가 이끄는 첼로와 콘트라베 이스가 아래를 받쳐주고 비올라가 주제음을 펼쳐나간다.

    바이올린들은 비올라를 따르며 그 애수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3악장. ‘조금 빠르게(Allegretto)’.

    스트레토로 긴장감을 주는, 4악장을 위한 고조 단계.

    마무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나오도록 목관 악기가 마무리를 잘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주 파트가 나오는 4 악장.

    시작부터 현악부가 빠르게 치고 나가고.

    긴장을 준 뒤 나오는 목관악기.

    그리고 돌아온 자리에서 내 독주가 시작되었다.

    ♪♫♬♪♫♬

    ♪♫♬♪♫♬

    그런데.

    순간 人현이 끊어지고 말았다.

    관리는 분명 제대로 했을 텐데.

    ‘칫

    망설일 시간은 조금도 없다.

    제2바이올린으로서 있었다면 뒤로 물러나 현을 교체라도 하고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독주를 위해 앞서 있다.

    오래 준비한.

    새롭게 시도한 이 무대.

    그리고 이 연주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멈출 순 없다.

    파지를 달리 했다.

    A현이 없더라도 연주는 어떻게든 이어나갈 수 있다.

    ♪♫♬♪♫♬

    즉흥적으로 이어가 30초에 이르는 독주 파트가 마무리되고.

    연주는 다시금 본래의 모차르트 D 단조를 연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이올린을 내리 고, 4악장이 마무리될 때까지.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사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볼일 보시고 가세요. 들어가 봐야 해요.”

    “오랜만에 만난 애비한테 할 말이 고작 그뿐이더냐.”

    한편 배도빈이 연주를 시작하기 전.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서 조 금 떨어진 곳에서.

    유진희가 유장혁 WH그룹 회장과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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