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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7화 (4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47화

    12. 6살, 세계를 울리다(1)

    더위가 최고점에 이를 무렵.

    내 데뷔 무대가 결정되었다.

    일찍이 당일 나와 함께할 단원들이 정해졌고,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 가는 과정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이번에는 이승희와 함께하지 못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이 운용되는 방식에 따라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았던 탓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전용 콘서트홀 에서만 연간 100회 즉, 3일에 한 번 꼴로 연주회를 연다.

    이를 약 130여 명의 단원들이 돌 아가며 스케줄을 소화한다지만 확실히 빠듯하다.

    실내악 공연과 기타 일정을 포함하면 130명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빡빡하다.

    쉽게 피로해질 만한데.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의 열정을 보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국장 카밀라의 집무실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듣기로는 베를린 필은 본래 근무 시간이 따로 정 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어쩔 수 없이 8시간이라 정해놓고 있다지만).

    나만이 특수한 상황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지, 다들 자체적으로 연습을 포함한 시간을 관리한다고 한다.

    물론, 그에 따른 추가 수당도 없다고 한다.

    “그럼 왜 다들 밤늦게 남아서 연습 하는 거예요?”

    “음악을 좋아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연주에 만족할 수 없는 상 태로는 무대에 오를 수도 없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바순 소리.

    마누엘 노이어는 B플랫장조의 4악 장 연주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

    내가 바란 그대로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조금은 알 기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이 꼬맹이가 사람을 잡으려 들었어. 하하.”

    리허설을 마친 노이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멋지게 해냈으면서 힘들다고 앙탈을 부리는 그가 귀엽게 보일 정도다.

    “멋있었어요.”

    “그럼. 베를린 필의 바순 수석 자리를 그냥 얻었겠냐, 이 악마 같은 꼬맹이야.”

    비단 노이어만이 아니었다.

    현악부, 관악부, 타악부 모두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고, 나는 지난 며칠 간 그들이 보여준 열정에 화답하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연습다운 연습을 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마지막으로 나 와 연주를 한 사람들도 내 노력에 대해 알아주었다.

    “Das kann doch nicht wahr sein!”

    “Das ist ja unglaublich!”

    흡족스럽게도 반응은 열렬했다.

    어디까지나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완주를 들은 적은 처음이었던 단원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줄곧 틱틱 대던 노이어도 내 연주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12살의 하 이페츠를 보며 바이올린을 내던져야 한다고 했다지. 하이페츠가 살아 있었더라면 네게 그 말을 넘겨주었을 거다.”

    그 말은.

    다시 태어나고 일 년이 지났을 때, 내가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연주를 듣고 생각했던 말이다.

    * *

    독일에 온 지 벌써 꽤 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객원 연주자가 된 도빈이는 하루하루 즐거운 듯 콧 노래를 흥얼거렸다.

    푸르트벵글러 씨와 음악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즐 거워했기에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독일 말은 언제 배웠는지.

    통역도 없이 신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꼭 물을 만난 고기처럼 보였다.

    그런 아이 같은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간 너무 어른스러워 당황할 때도 있었는데, 그게 어린 시절의 가난함 때문에 생긴 압박감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빈이에게 너무 도 미안했으니까.

    ‘내가 집을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경제적으로 풍요했다면 도빈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고 밝게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는데.

    독일에 와서는 그런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좀 더 웃게 되었고, 요즘에는 가끔 장난도 친다.

    말이 늘어서 그런지, 어디서 봤는 지 혼자 깔깔 웃은 뒤에 쪼르르 다가와 묻는다.

    ‘엄마, 무가 울면?’

    ‘무가 울어?’

    ‘무뚝뚝!’

    라는 식으로.

    차 실장님이나 할 법한 아재개그지 만 저렇게 활발한 모습을 보니, 안 심하고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여러 상황에 감사하게 되었다.

    “여보!”

    “ 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남편이 도빈 이의 첫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배려 해 준 것.

    덕분에 57일 만에 잘생긴 남편 얼 굴을 볼 수 있었다.

    “살이 쏙 빠졌네.”

    “배 나오면 당신이 싫어할 거 아 냐. 다이어트 좀 하는 거지.”

    “말이나 못 하면.”

    그간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것 같아서 속상했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돌아가기 전에 배불리 먹여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이끌었다.

    “도빈이 오늘 첫 공연이라고? 몇 시인데?”

    “7시요. 서둘러 가면 늦지 않을 거 예요. 리허설 중이라 만나는 건 어 렵겠지만.”

    “다행이네. 우리 아들 아빠 보고 연주하다가 놀라서 실수하면 어쩌 나? 하하하!”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빠나 아 들이나 똑같다.

    그래도 이런 남자니까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도 바로 어 제 함께했던 것처럼 편안한 느낌.

    그가 슬며시 손등에 손을 올렸다.

    “도빈이 덕분에 유럽에 다시 올 줄 이야. 당신은 예전 생각 안 났어?”

    “왜 안 났겠어요. 내일 도빈이랑 같이 유람선 타요.”

    “좋지. 당신이랑 탈 때랑 얼마나 변했으려나.”

    그간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풀다보니 어느새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 도착했다.

    벌써 많은 사람이 와 있었고, 남편과 함께 좌석을 찾아 앉았다. 자리는 무대의 정면.

    카밀라 씨가 배려해 준 듯했다.

    이윽고.

    연주자들이 하나둘 자리하기 시작 했으며.

    푸르트벵글러 씨와 함께 도빈이가 무대 위로 나왔다.

    * *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다시 태어난 뒤 정말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보다 가슴이 뛴 적은 없었다.

    과거, 수없이 많은 연주회를 가졌지만 이번만큼은 느낌이 다르다.

    푸르트벵글러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었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뜻.

    고개를 숙이자 박수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개를 드는데, 어머니와 아 버지가 함께 계셔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교적 관중석은 어둡고 무대에 빛 이 내려오기에 잘 확인할 수 없었지 만, 그 어렴풋한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돌아서, 푸르트벵글러와 악수를 나 누었고 오늘 연주회의 콘서트마스터 인 니아 발그레이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받치고 푸르트벵글러와 시선을 교환한 뒤.

    첫 음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높게 평가하는 후대의 음악가 슈만은 4번 교향곡, B플랫장조를 두고 ‘두 거인 사이에 있는 그리스 소 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장난스러운 부분 때문에 쓴 표현인 지, 에로이카와 C단조의 웅장함 때 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시의 나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했던 곡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나의 데뷔 무대 곡을 B플랫장조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B플랫단조와 B플랫장조의 조성 변경 부터 시작해, 즐거움을 주고자.

    말 그대로 ‘음’을 즐기기 위한 곡이었음으로 나는 당시 마음을 떠올리며 악보에 주석을 달았고, 편곡했으며 그를 완벽히 이해한 푸르트벵글러의 지 휘 아래에서.

    Sinfonie Nr.4 B—dur의 1 악장이 완벽하게 연주되고 있다.

    이어서 팀파니와 트럼펫이 들어오 면서 곡에 활력이 붙고.

    비바체에 이르러 나 역시 제1바이올린과 호흡을 맞춰 현을 켜기 시작했다.

    JJW

    즐겁다.

    너무나도 즐겁다.

    이 아름다운 선율에 함께할 수 있고, 이 즐거움을 이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관중과 함께할 수 있어 즐겁다.

    1악장을 마치고, 으레 들려야 할 기 침 소리가 들렸고.

    호흡을 가다듬고 시작한 2악장.

    2악장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이 앞서고 뒤에 서며 아름다운 음과 부점 리듬의 반주를 대비시켰는데.

    이 역시 완벽히 이루어졌다.

    2악장이 마치고, 으레 들려야 할 기침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호흡을 가다듬고 시작한 3악장.

    시작부터 경쾌하게, 잔잔하게, 발랄 하게, 조용하게를 반복하며 콘트라베 이스가 도출되었을 때.

    내 독주가 시작되었다.

    본래 있던 연주를 좀 더 늘리고 변 형시킨 독주 파트.

    푸르트벵글러가 ‘이렇게 주제음을 변형시키는 사람은 베토벤 이후엔 처음이야’라고 말했던 그 파트다.

    ♪♫♬

    ♪♫♬

    빠르게. 더 빠르게.

    느려지다 더욱 빠르게!

    약 30초간의 독주 파트 안에 지금 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연주를 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뒤이어 받쳐 나오는 음들과 함께 연주를 멈추고 푸르트벵글러를 보았다.

    정열적인 연주 뒤에 오는 잔잔한 선율 그리고 그 사이마다 쉴 틈 없이 튀어나오는 경쾌한 사운드에 황홀할 지경.

    그렇게 3악장을 마치니.

    그 흔한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번 연주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공을 들인 4악장, 시작부터 치고 나가는 연주를 나와 제1바이올린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초절.

    16분음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나와 푸르트벵글러의 주석으로 더욱 빠르게 연주되는 와중에.

    관악기들 역시 전면으로 나와 그 진면목을 펼치기 시작했다.

    ‘역시 노이어.’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연주다.

    연주 중에 연주자를 볼 수는 없는 법이라 확인할 순 없지만, 그 역시 제법 만족스러워할 것이다.

    4악장의 중반에 이르러서는.

    바이올린과 다른 악기가 반복해 앞 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바이올린 파트는 오직 나만이 맡아 연주하였고.

    마침내.

    간결하면서도 가장 인상적인 피날 레까지 마치자.

    짝짝짝짝짝_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튀어 나왔다.

    실로.

    나는 이 소리를.

    수십 년 만에 듣는다.

    감격에 겨워 입술을 꽉 물고 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두 분은 분명, 울고 계셨다.

    약 38분 정도의 연주 시간.

    그리고 이 3분 정도의 시간.

    아마, 아마 잊지 못하리라.

    나는 푸르트벵글러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을 잡고 관중석을 향해 시선을 둘 뿐, 인사하지는 않았다.

    이 영광을 오직 내게 전달하려는 행동.

    그러나 이 완벽한 ‘작품’을 완성한 것은 나만이 아니다.

    이 무대에서 함께한 모든 사람의 결과이기에 푸르트벵글러와 콘서트 마스터 니아 발그레이에게 손바닥을 위로 보였다.

    그제야 모든 연주자가 일어났고.

    함께.

    관객석 가득, 거의 모든 사람이 일 어나 보내는 박수를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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