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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4화 (4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44화

    11. 6살, 오케스트라에 대해(3)

    “카밀라, 어떻게 방법이 없는가?”

    푸르트벵글러의 말을 듣자, 카밀라 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법이 이런데 저라고 한들 어쩌겠어요. 애초에 저한테 묻지도 않고 일을 벌이신 두 분 책임이라고요.”

    카밀라가 쏘아붙이자 푸르트벵글러 와 이승희가 움찔했다.

    “유진희 부인 그리고 배도빈 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마에스트로도 이렇게 어린 음악가와 함께 한 적이 없어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배도빈 군이 뛰어나다는 뜻 이겠죠. 부디 훗날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한 모든 책임을 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카밀라의 말은 정중하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되는 일에 대 해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저는 음악이나 법에 대해서는 모 르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떨 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음악을 할 도빈이를 생 각해서라도 세 분께 더는 말씀을 못 드립니다. 카밀라 씨는 오늘 처음 뵙지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씨와 이승희 씨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 지 클래식 음악 팬으로서 잘 알고 있어요.”

    “어머님.”

    이승희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려 야겠습니다. 도빈이가 이곳으로 오 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했고 포기했는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도빈이, 아직 어리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성숙하고 진 지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도빈이가 여러분과 같은 훌륭한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머니께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머니께서 이렇게나 달변가인 줄은 조금도 몰랐다.

    지금의 어머니를 뵙고 처음 보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나 또한 많이 당황스럽지만.

    어머니께서는 직장마저 버리고 나를 위해 멀리 이곳까지 함께하셨다.

    아버지를 혼자 두는 결정도 쉽지 않았으리라.

    그 많은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오디 션을 보도록 허락한 것이다.

    오직, 나를 위해.

    그런데 그 결과가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 악단 측에서 기본적인 사항조차 체크하지 않아서 생긴 문 제라니.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 와 어머니는 억울하고 어이없고 허 탈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마음을 꾹 참고.

    고개를 숙이신 것이다.

    여기서, 내가 호통을 치면 지금 어머니께서 숙인 고개 위에 물을 끼얹는 꼴.

    나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

    살면서 단 한 순간조차도 비굴했던 적 없었다.

    그러나 나 배도빈.

    나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음악뿐.

    음악으로 다시 세울 수 있는 법.

    그 때문에 어머니를 내가 욕되게 할 순 없다.

    “부탁드립니다.”

    어머니 곁에서 나도 고개를 숙였다.

    “도빈아. 흑.”

    눈물이 터진 이승희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님, 어머님, 고개 드세요. 죄 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승희가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일 으키려 했으나 어머니께서는 자세를 고치지 않으셨다.

    맞은편을 보자 푸르트벵글러는 헛 기침을 하며 눈가를 닦고 있었다.

    여태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카 밀라조차도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움직 이지 않으셨다.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은 상당히 잠겨 있었다.

    그제야 어머니께서 고개를 드셨다.

    “객원 연주자로서는 활동이 가능합니다. 마침 공연 시간이 2시간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법에 접촉되는 부분은 없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연습할 시간이 없겠네요.”

    어머니께서 카밀라의 말을 받았다.

    “네. 하지만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가 앞뒤 가리지 않고 뽑을 인재 라면, 혼자서도 가능하겠죠. 그렇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카밀라가 말하는 도중에 푸르트벵글러에게 눈치를 줬다.

    “아암! 그렇고말고. 도빈 군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아니 라, 옆집 할아버지로서 손주 같은 아이에게 개인 교습을 해줄 수도 있겠네요.”

    “여, 옆집 할아버지?”

    카밀라가 째려보자 푸르트벵글러가 헛기침을 해댔다.

    “그, 그럼. 그렇고말고.”

    카밀라가 다시 시선을 돌려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방문한 것 은…… 견학으로 처리하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카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 와 어머니께 고개를 숙였다.

    “네. 다시 한번 저희의 실수로 이 런 일이 벌어진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카밀라가 나를 보았다.

    “부인께서 이렇게 나오실 때 어쩌 야 하나, 죄송할 따름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배도빈군이 제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반드 시 잡아야 한다고요. 분명 분하고 억 울할 텐데 저 어린아이가 부인께서 고개를 숙이니 이를 악물고 참더라 고요. 저 역시 오늘 부인과 배도빈 군을 처음 뵙지만, 부인의 말씀대로 도빈 군이 음악에 대해 얼마나 진지 한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분 의 사랑도요.”

    그렇게 말한 카밀라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디 베를린 필하모닉에 함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카밀라 씨.”

    어머니께서 일어나 카밀라를 직접 일으켜 세우셨고, 카밀라는 어머니 께 약속했다.

    “혹시 모를 법적인 제제에 대해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부분 말고도 조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배도빈 군이 건강히 음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카밀라는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사사하게 되었다.

    물론, 카밀라가 선을 확실히 그은 대로 어디까지나 옆집 할아버지로서의 친절일 뿐.

    덕분에 강의료는 조금도 내지 않아도 되었다.

    “휴우. 정말이지 다행이야. 자네도 그렇지, 그런 방법이 있었더라면 진 즉에 말해주지 않고.”

    “뭐라고요?”

    배도빈과 유진희를 배웅하고 사무 국으로 돌아온 카밀라는 상임 지휘 자의 불평에 잔뜩 성질을 냈다.

    “도대체가 일을 어떻게 진행하는 거예요? 마에스트로면 다예요? 부 수석 자리를 반년 가까이 비워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디션에서 전원 불합격을 시키질 않나. 사무국 허락 도 없이 미성년자, 아니, 미취학 아 동에게 손을 뻗쳐요?”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제 말이 틀려요? 네? 그런 방법 이 있었다면 진즉에 말하라고요? 그런 방법 없어요! 없다고요! 지금부 터 만들어야 한다고요! 대체 그 자 리에 있었으면서 무슨 말을 들은 거 예요?”

    푸르트벵글러는 할 말이 없었다.

    배도빈의 음악에 홀려 주변 정황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심, 악단 운영에 있어 지대한 영 향을 끼쳤고, 적어도 단원을 뽑는 일에 대해서는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기에 평소와 같이 행동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정말이지. 안 그래도 그 재벌가 사람이라 긴장했는데.”

    카밀라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건 무슨 소린가?”

    “ 뭘요?”

    신경이 잔뜩 날카로운 상태였기에 카밀라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재벌가라니?”

    “……모르셨어요? 배도빈군 어머님, 유진희 씨. WH그룹 유장혁 회장 장 녀잖아요.”

    두 눈만 끔뻑이는 푸르트벵글러를 보며 카밀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어제와 오늘 느낀 부담감이 얼마나 컸 는지 말을 대신해 내뱉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음악 바보라니까.”

    카밀라가 본인 책상 위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 푸르트벵글러에게 보여주었다.

    “봐요. 10년 전에 미술계에서 신성으로 유명했던 사람이에요. WH그룹 유장혁 회장의 장녀였고. 독일 유학 중에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는데, 결혼 때문이었나 보네요.”

    “허허. 도빈 군의 감수성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건가.”

    “합격 고지 듣고 알아봤는데, 처음에는 배경 믿고 자식 들이밀려는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만나 보니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자네 지금 날 뭘로 보는가. 내가 어디 그런 허튼수작에 놀아날 거라 생각하는 겐가!”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순순히 굴었던 푸르트벵글러가, 단원을 뽑는 일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는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유일하 게 그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무국장 카밀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럼 다섯 살 어린애를 단원으로, 그것도 부수석 연주자로 뽑는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나이 드셔서 노망 나셨나 싶었지.”

    “뭐, 뭐라고?”

    “아무튼!”

    카밀라 사무국장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상임 지휘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정말 확실한 거예요?”

    “흥!”

    “그러지 말고 말해보세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모차르트도 다섯 살부터 작곡을 배웠 어요. 그런데, 다섯 살 난 그 애가 가 장 큰 희망을 짓고, 바이올린 연주로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의 혼을 빼 놨다고요?”

    확실히.

    카밀라 사무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듯한 의심이었다.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본인의 판단을 떠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푸르트벵글러도 오랜 인연인 카밀라 가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네. 자네 말 모두 사실이야.”

    “사카모토 료이치의 제자라는 말도요?”

    “그 친구 말로는 제자가 아니라 친구 라 하던데. 가르칠 게 없다고.”

    카밀라가 고개를 저었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이라 일을 진행하려 했으나 도저히 의심을 지울 수 없는듯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푸르트벵글러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의심되면 직접 한번 들어보게. 자네 말대로 옆집 할아버지로서 같이 연주하며 놀려고 그러니까.”

    “••••••좋아요.”

    그렇게 말한 카밀라는 다음 날, 배도빈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듣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자, 잘하는 정도가 아니잖아요.”

    “그럼. 물론이지. 이 내가 부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뽑을 정도니까.”

    그녀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한 지 20년.

    비록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간 수많은 연주를 들으며 일해 왔다.

    그중에서도 배도빈의 연주는 손에 꼽을 만큼, 매료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카밀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차 좀 들어요. 도빈아, 주스 마시자.”

    “아, 감사합니다, 부인.”

    “고맙소.”

    그렇게 배도빈의 연주를 감상하자 유 진희가 다과를 내왔다.

    아직까지 연주의 여운에서 빠져나오 지 못한 카밀라 앞에서 배도빈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하나도 안 달아요.”

    “단 거 많이 마시면 이 상해요.” 도저히 방금까지 그 고혹적인 연주를 한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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