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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3화 (4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43화

    11. 6살, 오케스트라에 대해(2)

    배도빈이 퇴장한 소연습실에는 적 막이 흘렀다.

    다들 본인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랜 시간 준비해 왔던 만큼, 그리고 일반적인 코스로는 절대로 승진할 수 없는 만큼.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그러나 전설적인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현재 상임 지휘자는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확실 한 실력을 갖췄고 더불어 단원들과 도 원만한 관계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완고한 그의 완벽주의가 흔들리는 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 그의 음악적 완벽성을 인정하기에, 첫 번째 오디션에서 전원 불합격이라는 판정이 나왔을 때도 결과에 승복했다.

    이후 푸르트벵글러가 지원자 한

    명, 한 명에게 코멘트를 남기는 성 의를 보였기에 지원자들은 지난 한 달간 자신들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 해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어렵게 올라온 이 자 리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아시아에서 온 어린아이의 연주를 듣고 한마디 중얼거렸다.

    정말 작은 소리였으나 고요한 장내 에 안개처럼 깔리는 듯했다.

    “Perfekt.”

    완벽하다는 말.

    어떤 사람은 그와 이제 막 1년을 함께했고, 어떤 사람은 그와 십 년을 넘게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연주를 해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로 부터 완벽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의 성향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지원자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인식하지 않았던 방금 연주를 되 새겨 보았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는 연주 속에서, 배도빈이라는 아이는 감정 전달을 놀랍도록 완벽히 해냈다.

    수백, 수천 번 들었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F장조였지만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다음, 준비되는 대로 시작하게.”

    이윽고 평가지 작성을 마친 푸르트벵글러가 다음 지원자를 불렀다.

    한 남성이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 가, 상임 지휘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 기회에 도전하겠습니다.”

    “……건투를 빌겠네.”

    그가 오디션장을 나가자, 다음. 그 다음. 사람도 하나둘씩 일어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디션을 포기하였다.

    “마에스트로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국장, 카밀 라 앤더슨이 정기 연주회에 관련하 여 사무국의 서류를 결재하다 문득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찾았다.

    “지금 아마 오디션 중일 거예요.”

    “오디션? 무슨?”

    “바이올린 부수석을 뽑는다고 하던 데요?”

    “정말이지. 아니, 매번 이렇게 우리 에게 말도 없이 오디션 진행하고 합 격 처리하라고 하면 어쩌자는 건 지.”

    “하하하. 그래도 마에스트로가 뽑 은 사람은 정확하잖아요. 지금까지 큰 문제 없었고.”

    “그렇긴 해도 분명 언젠가 문제가 생길 거라니까. 안 되겠다. 이번에는 단단히 이야기를 해야겠어.”

    “살살하세요.”

    푸르트벵글러의 큰 손이 굳세게 내 손을 잡았다.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글쎄. 다들 오디션을 포기하더군. 왜 그런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네.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일은 도빈 군이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단 사실 뿐이야.”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한번 내 손을 위아래로 흔든 뒤에 말했다.

    “함께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네.”

    “이쪽도 반갑네.”

    “음? 하하하하!”

    “도, 도빈아.”

    푸르트벵글러가 소리 내어 웃었고, 이승희가 안절부절못한다.

    “독일어를 정말 어디서 배웠는지 고풍스럽구만. 그럼, 오늘은 이만하 도록 하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 이야. 이 뒤에는 곧장 돌아가는 건 가?”

    “아뇨. 도빈이에게 홀을 보여주려고요.”

    “좋은 일이군. 앞으로 함께할 곳이 니 미리 둘러보는 것이 좋겠지. 그 럼, 내일 보세.”

    “반가웠네. 들어가시게.”

    “하하하하!”

    “도빈아.”

    푸르트벵글러가 떠났다.

    건물 밖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이승희가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셨더니 이승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믿을 수 없어.”

    “뭐가요?”

    “네가 합격할 거라는 건 나도 확신 했지만 다들 도전조차 포기할 정도였다니……. 도빈이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 모두 다 열심히 했거든.”

    “그렇게 보였어요.”

    “……그랬니?”

    이승희도 음료를 마시곤 한숨을 짧 게 푹 내쉬었다.

    모르긴 해도 그들 역시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자들일 것이다. 우선 이 곳에 지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터다.

    그런 사람들이 한 번 전원 탈락하 고,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재도전을 한 것이니 그 각오를 모르는 바 아니다.

    단지 결과는 내가 합격했으니.

    맡게 된 자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만이 내 할 일이 될 것이다.

    내게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도, 권 리도 없다.

    “참.”

    문득 뭔가를 떠올렸는지 이승희가 감탄사를 냈고, 큭큭대며 작게 웃기 시작했다.

    “도빈아, 독일어 무슨 영화로 배운 거야?”

    “..여러 가지요.”

    “도빈이가 쓰는 독일어가 음…… 뭐랄까. 대단히 할아버지 같다는 건 알고 있니?”

    이승희의 말을 듣고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했다.

    내 딴에는 최대한 시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독일 영화를 보며 내가 살던 당시의 말을 상당히 완화했는데.

    그렇게 들릴 줄은 몰랐다.

    애초에, 200년 가까운 시간 차이가 있어 내가 쓰던 독일어와 현대의 독일어가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쯤 은 느끼고 있었다.

    우선 표준어라는 리푸리아 방언 (Ripuarisch)조차 처음 독일 영화를 볼 때 어색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나름 차이를 메웠다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뭐, 다들 귀엽게 보는 것 같아서 문제없겠지만. 그나저나 영화가 애들에게 영향을 미치긴 하나 보네. 한스한테 했던 욕은 대체 어느 영화 에서 나온 말이니?”

    “기억 안 나요.”

    날 턱이 있나.

    “영화보다는 음……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게 아무래도 도움 이 될 거야. 많이 쓰는 말들이 나오 니까.”

    “그럴게요.”

    괜한 오해를 만들기 전에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볼까?”

    “네.”

    그렇게 햇볕을 쬑며 목을 죽이고는 이승희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로 향했다.

    정문에 들어서서 단 2분.

    내 눈앞에 이제껏 상상해 보지 못 했던 무대가 나타나고 말았다.

    “이건••••••

    “멋있지?”

    대답조차 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중앙 에 무대가 있고 관객석이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지금까지 무대는 항상 관객과 마주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완전히 부수는 형태였다.

    층층이 나뉘어 모든 방향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누나, 누나.”

    “응?”

    “자리에 따라서 음도 다르게 들리겠죠?”

    “그럼. 최대한 비슷하게 들리도록 했지만 다를 수밖에. 왜, 악기 배치 만 해도 바꾸잖니. 위치에 따라 다 르게 들릴 수밖에 없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확인하고 싶은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들어보고 싶어요.”

    “안 그래도 내일 정기 연주회가 있으니 함께 오_자. 도빈이 엄마랑 같이.”

    고개를 네 번이나 세차게 끄덕였다.

    기왕이면 같은 곡을 여러 자리에 앉아 들어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 건 어려울 것 같다.

    어차피 이곳에서 함께하기로 했으니 차차 그 기회도 생길 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쯤이 되어 호텔에 도착했는데, 합격 사실을 들은 어머니께서 너무나 크게 기뻐해 주셨다.

    “우리 아들이 최고네?”

    어머니께서 웃으시니 조금 진정했던 마음이 다시금 커졌다.

    “내일 공연이 있대요. 같이 보러 가요.”

    “그래. 엄마도 도빈이가 연주하는 곳 궁금한데 잘됐네. 으구으구.”

    엉덩이를 팡팡 쳐주시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

    다음 날 점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기 연주회에 참석한 나 와 어머니는 90분가량의 만족스러 운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의 곡 해석은 박력이 넘쳤다.

    그의 힘 있는 요구에 호응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자들 역시 대단하기는 마찬가지.

    이승희의 말대로 과연 세계에서 가 장 위대한 관현악단이란 말이 틀리 지 않았음을 내 귀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저들과 함께할 날이 너무 나 기다려졌는데.

    공연을 마치고 만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이승희의 표정이 이상했다.

    반가워하면서도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묘한 얼굴이었는데.

    결국 그들을 대신해 자신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직원, 카밀라라 소 개한 여성이 나와 어머니께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근로 청소년 기준법(Jugen dschutzgesetz) 입니다.”

    어머니와 나는 그 서류와 직원을 번갈아 보았다.

    “먼저 사무국에 확인을 받고 일이 진행되었어야 했는데,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께서 저희 일을 확인받 지 않고 일을 진행해 드린 점에 대 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크흠흠.”

    “이건 무슨……

    “JuSchG(근로 청소년 기준법) 제6조 사건에 대한 공식 예외에 따르면 음악 공연 및 기타 공연, 홍보에 관 련한 행사에 만 3살에서 6살 사이 의 아동에 대해서는 매일 오전 8시 부터 오후 5시 사이, 하루 최대 2시 간까지 일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반면 저희 베를린 필하모닉의 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계약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의 일반 계약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말씀 까지 드리진 않습니다만, 계약을 그 리 할 뿐, 근무시간을 정해놓지 않을 정도로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스케줄일 겁니다.”

    “하여 이러한 사유로 배도빈 군의 합격 사실을 번복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베를린 필하모닉을 대표하여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뭔 소리야.

    현실이야? 꿈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인가!”

    부푼 꿈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지, 진정하게, 도빈 군.”

    “도, 도빈아.”

    푸르트벵글러와 이승희가 나를 말 리려 했으나 어이가 없어 말조차 제 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승희 씨.”

    어머니께서 평소와 달리 위화감이 있는, 상냥한 목소리로 이승희를 불렀다.

    “네, 네. 어머님.”

    “저희 가족이 이번 결정을 내리는 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잘 아실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푸르트벵글러와 사무 직원 카밀라가 함께 들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말씀하셨다.

    “……네.”

    “저는 도빈이를 위해 많은 걸 준비 해 주신 승희 씨가 혹시 이런 사실 조차 확인 안 하시고 일을 진행했다 고는 생각 안 해요.”

    화가 나 폭발했던 나와 달리, 조곤 조곤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어딘지 모르게 무서웠다.

    “단순히 통보를 하시려는 건 아니 시죠? 대책을 마련하고 오셨으리라 믿어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세 사람.

    잠시 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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