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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9화 (2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29화

    8. 6살, 첫 친구(5)

    쉬는 시간.

    “도빈아, 넌 어디 살아?”

    “나? 행운동.”

    여자애들이 몰려들어와 조금 급한 데 화장실에 가지도 못한 채 둘러싸 이고 말았다.

    그중에 몇몇이 사는 곳을 묻기에 대답해 줬더니 다들 모르는 눈치다.

    하긴, 차를 타고 꽤 걸렸으니 이쪽 에 산다면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 했다.

    “그럼 아파트에 살아?”

    “아니. 주택.”

    “주택? 대단하다. 그럼 정원도 있어?”

    “있긴 한데 좁아.”

    “그럼 네 방도 있어?”

    “없어.”

    “에이.”

    얘들이 뭔데 지금 내 호구조사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지만, 어머니께 서 여자아이에겐 친절하게 대하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어쩔 수 없이 질문에 답해주고 있는데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여덟 살 꼬마가 다가왔다.

    “치. 그게 무슨 주택이야? 너 솔직히 말해. 그 옷도 브랜드 아니지?”

    ‘옷이 브랜드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야?’

    녀석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제법 현대 대한민국에 익숙해졌다 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

    어머니, 아버지께서 나를 걱정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직은 얘들이 내가 사는 곳을 궁 금해하는 이유라든지, 무엇을 입고 있는지 솔직히 말하라는 의도를 이 해할 수 없었으니까.

    굳이 솔직히 말하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인가, 싶어 우선은 대 답해 주었다.

    “응. 시장에서 샀는데.”

    “풋. 봐. 얘 뭐 잘하냐고 물었는데 도 대답 안 했단 말이야. 집도 주택 에 산다고 거짓말이나 하고.”

    “거짓말쟁이네?”

    “거짓말쟁이래요〜 거짓말쟁이래요〜”

    지금 얘들이 나한테 싸움을 거는 건가?

    어린 것들이 못된 것만 배워서는 사람 귀찮게 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이런 꼬맹이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화장실에 다녀와 앞서 배운 리코더나 몇 번 더 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만해. 오늘 처음 온 친구한테 그러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하고 막 일어서려는 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이 일곱 살 꼬맹이가 최지훈이라고 알려준 녀석이었다.

    최지훈이 이쪽으로 오더니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난 최지훈이야. 일곱 살. 잘 부탁해.”

    얜 또 뜬금없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지훈이 멋있다.”

    “지훈이 말이 맞아. 왜 귀여운 도빈이한테 뭐라고 해?”

    가관인 것은 최지훈이 내게 인사를 하자 그때까지 가만있던 몇몇 아이가 나서서 나를 옹호하기 시작한 것.

    ‘영재라더니. 아닌 거 같은데?’

    이게 평범한 ‘영재’의 사고방식인 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유치원보다 짜증 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선은 화장실이 급했기에 최지훈 이 내민 손을 대충 잡고 흔들었다.

    “그래. 근데 화장실은 어디야?”

    “어? 어…… 나가면 왼쪽에 있어.”

    “고맙다.”

    대충 둘러싸인 아이들을 헤쳐 강의 실 밖으로 나오니 과연 왼쪽에 화장 실 표시가 있었다.

    어린 몸은 방광이 약하다.

    * * *

    저녁 식사 시간.

    “도빈아, 학원은 어땠어?”

    “재밌었어요.”

    “학원에서 뭐 했는데?”

    “리코더 배웠어요. 단순한데 아직 소리를 제대로 내진 못해요. 그래도 금방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는 사귀었니?”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음악 하는 친구들이랑 음악 얘기 도 하고 그러면 재밌지 않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예전 음악 친구들과 그리고 사카모토 료이치와 보낸 시간을 회상했다.

    확실히 즐거운 추억인데, 코는 흘 리지 않지만 학원 아이들의 수준을 생각하니 그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문득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다, 수준 차이가 난다 등의 말을 했다간 어머니께서 또 슬퍼하실 것만 같았다. 그래서 군말 없이 어머니의 바람을

    들어주자고 마음먹었다.

    “아니에요. 해볼게요.”

    “그래. 다행이다. 자, 이것도 먹어.”

    오물오물.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계란프라이는 노른자가 익은 정도가 절묘하다.

    * * *

    점심시간.

    어제 어머니의 말씀도 있고 해서 옆에 앉은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음악가 좋아해?”

    “ 나?”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고민하더니 손뼉을 친다.

    “난 유진 킴이 좋아.”

    “유진 킴?”

    “응. 전자바이올린 연주하는 사람 인데, 몰라? 엄청 멋있어.”

    “전자바이올린?”

    뭔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해서 관심을 보였더니 여자애가 자기의 핸드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꼬맹이가 핸드폰도 가지고 있네.’

    신기해하며 기다리는데, 내게 이어 폰을 주어 귀에 꽂았다.

    꼬마애가 내게 보여준 핸드폰 화면 에는 한 청년이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화면이 나왔다.

    그리고 들리는 충격적인 소리.

    나는 약 5분간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토록 나를 놀라게 한 연주자는 적어도, 다시 태어난 뒤에는 없었다.

    꽤 많은 녹음된 음악을 들었고 이승희와 같은 천재도 만났지만.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음색을.

    이만한 기교로 감성마저 가슴에 때 려 박는 듯 전달하는 사람.

    음질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게 천 추의 한이었다.

    “어때? 좋지?”

    “응. 정말 좋아.”

    “치. 음악 한다면서 유진 킴도 몰 라? 너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돈도 없으면서.”

    “리코더도 잘 못 불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제부터 묘하 게 내게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다.

    내게 가장 먼저 말을 건 일곱 살 먹은 꼬맹이가 주동자인 듯한데, 귀찮아서 무시했다.

    “너희 자꾸 도빈이한테 왜 그래?”

    “뭐가? 너도 걔랑 있으면 수준 떨 어질걸? 빨리 떨어져.”

    요즘 애들은 대체 뭘 어떻게 자랐기에 어려서부터 이렇게 비뚤어졌는 지 모를 일이다.

    부모님 계시고, 굶을 일 없고. 병 에 걸려 일찍 죽는 형제가 있는 세 상도 아닌데 말이다.

    며칠 뒤.

    날이 갈수록 아이들은 유치해졌다.

    내가 입은 옷이 싸구려라든지, 거 짓말을 한다든지, 요즘 유행하는 음악도 모른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떠 들어 댔는데.

    그와 별개로 나는 꽤 이곳이 마음 에 들었다.

    적어도 내가 오선지를 펼쳐 놓고 곡을 쓰거나 수정할 때, 그것을 못 하게 막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나 마 음에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뭐 하냐? 음악도 모르는 주제에 음표 그린다고 다 음악 되는 거 아 니야!”

    여덟 살 꼬맹이(이름은 들은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와 몇몇이 와 서 귀찮게 굴었다.

    “쉭. 쉭.”

    손을 휙휙 저어 저리 가서 놀라고 한 뒤, 새롭게 만들 피아노 소나타를 수정하고 있을 때 그놈이 기어이 내 악보를 빼앗아가고 말았다.

    “내 놔.”

    “눼놔〜”

    “히히 히히.”

    며칠째 이어진 귀찮은 짓과 이제는 악보까지 뺏어가는 버릇없는 행동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저놈의 주둥아 리에 주먹을 꽂아줄까 생각하다가.

    어른으로서 참아야지,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만두지 못해?”

    그때였다.

    최지훈이 짜증 나는 꼬맹이의 뒤에 서 내 악보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하는 녀석에게

    소리쳤다.

    “너 자꾸 그러면 어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그, 그치만.”

    “우리 아빠 누군지 알지? 너 혼나 기 싫으면 도빈이 괴롭히는 거 그만 둬!”

    “아, 알았어.”

    아이들이 이루는 촌극을 보고 있는 데, 최지훈이 내게 악보를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 괜찮아?”

    “응.”

    “이거 네 악보야? 나도 봐도 돼?”

    똘망똘망한 녀석이니 보여주는 것 쯤이야 문제될 것 없다.

    “봐.”

    “고마워.”

    부잣집 도련님 같은 최지훈은 내 옆에 슬며시 앉더니 이내 감탄을 터 뜨렸다.

    “와, 이거 다 네가 외운 거야?”

    내 곡이니 외우고 있는 건 맞다.

    "응."

    “대단하다. 난 이렇게 많은 분량을 외워서 베낄 수 없는데. 너 기억력 엄청 좋구나?”

    “베껴?”

    “이거 따라 적은 거잖아?”

    “무슨 소리야?”

    “……설마, 이거 네가 만든 곡이야?”

    “그럼?”

    얘는 그나마 정상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말을 해댄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이 아이 수준에서는 이만한 곡을 만 든다는 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최지훈이 나 와 악보를 번갈아 본 뒤 웃었다.

    “너 대단하다.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리면서.”

    “응. 난 대단하지.”

    “그러게. 혹시 뭐 또 잘하는 거 있어?”

    “피아노랑 바이올린.”

    “정말?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대 회 같은 곳은 안 나가봤어?”

    “대회를 왜 나가?”

    “돈 줘?”

    “아, 응! 그렇기도 한데 대회에 나 가서 1등 하면 기분 좋잖아. 주변에 서 칭찬해 주고.”

    “칭찬이야 내 곡 들어주는 사람들 이 해주는 거지. 근데 돈은 얼마나 주는데?”

    “유치부는 100만 원 정도?”

    “적네.”

    그 뒤로 최지훈과는 이런저런 이야 기를 했다.

    음악 내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 녀석과 대화를 하는 건 꽤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많았다.

    국내의 유명 콩쿠르에 대한 정보라 든지, 그것을 통해 상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이건 최지훈이 아직 금 전 감각이 없어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또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있는 유명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빈아, 우리 피아노 치러 갈까?”

    “피아노가 있어?”

    “응. 복도 끝에 있는 방에 있어. 가자.”

    최지훈을 따라 간 곳에는 그럴 듯한 피아노가 있었다.

    일 년 전과는 달리 제법 몸이 컸 고, 자세만 잘 잡으면 어색하게나마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최지훈은 키 가 나와 차이가 꽤 났는데, 피아노 의자에 앉으니 제법 자세가 나왔다.

    ♪♫♬

    최지훈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또래 나이에 비해서 확실히 뛰어났다.

    음악을 일찍 배운 아이라고 해도 이만한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텐데,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어때?”

    “잘 치네.”

    “이제 네가 한번 해볼래?”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에 올라갔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이젠 이 정 도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었다.

    팔 길이가 짧으니 음폭이 좁은 곡을 연주하면 그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슈베 르트 19번 소나타 A플랫 장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지난 생의 끝 무렵에 만난 젊은 천재를 회상하며, 그가 남긴 아름다운 선율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주를 마치고 여운을 즐긴 뒤 의 자에서 내려오자, 최지훈은 입을 벌 리고 멍하니 있었다.

    “왜 그래?”

    “너…… 피아노 정말 잘 쳤구나.”

    “응. 잘 치지.”

    당연한 말을.

    “너도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 배웠어? 아, 아니지. 지금도 불편해 보 이는데 예전엔 더 힘들었겠다.”

    “팔이랑 손이 짧긴 했어.”

    허리랑 다리도.

    “..하아.”

    최지훈이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은 놀랐다.

    ‘갑자기 왜 이래?’

    “뭐야. 왜 그래? 압도적인 실력 차 이에 좌절한 거야?”

    “끄아아앙!”

    얼마쯤 지났을까?

    가만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는데 좀 진정이 되었는지 최지훈이 눈물을 슥슥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

    “별로.”

    “정말 천재가 있었구나.”

    “있지.”

    잠시간의 침묵 뒤에 최지훈은 피식 웃은 뒤 감탄했다. 그 낭랑한 목소 리가 조금 잠긴 듯했다.

    “응. 정말 있었어. 대단하다, 너.”

    “ 암.”

    “ 암?”

    “그렇다는 말이야.”

    최지훈이 나를 잠시 이상하게 보더 니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는 부잔데, 내가 피아노를 잘 치는 걸 엄청 좋아하셔.”

    그냥 들어주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무엇 때문에 힘 들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사정 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아무래도 나와의 큰 수준 차이 때문에 좌절한 게 맞는 것 같으니 말이다.

    “칭찬해 주시니까. 좋아하시니까 계속 연습했는데 어느새 주변에서 날 천재라고 부르더라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됐어. 내가 못 하면 아빠 가 실망할 테니까. 우리 아빠, 엄청 무섭다?”

    어디서 많은 들어본 이야기였다.

    “그래서 막 연습하는데, 연습한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았어. 난 천재 니까. 어쩌다 연습하는 걸 들키면 놀고 있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어. 그럼 또 나는 더 대단한 천재가 되 더라구.”

    “그냥, 말하고 싶었어.”

    나는 최지훈의 말에 간격을 두었다 가 입을 열었다.

    “난 피아노 부수려고 했던 적도 있는데.”

    “뭐? 정말?”

    “응. 보기만 해도 화가 나서 부수 려고 했어.”

    “……피아노 안 좋아해?”

    “좋아해.”

    “응?”

    “넌 그럼 음악 안 좋아해?”

    “……아니, 좋아해.”

    “그럼 하면 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음악가란 그런 거야.”

    “……응.”

    최지훈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반으로 돌아오니 나와 최지훈이 없어진 줄 알고 걱정한 학원 강사 이이 진 씨가 어디에 갔었냐고 다그쳤다.

    그러곤 복도에서 잠시간.

    나란히 벌을 서야 했다.

    복도에 서 있는 동안에도 나와 최지훈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왜 작곡을 하는가.

    나의 마음속에서 샘솟는 것이 세상 밖으로 나와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곡을 짓는다.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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